00:00
00:00

Ⅳ. 열국의 쟁웅시대-열국의 총론

 

열국 연대의 정오

삼조선이 붕괴된 후, 각지에서 신수두님, 신한, 말한, 불구래 등의 칭호를 참람되게 사용하는 자들이 등장하여 열국 분립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 열국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사(前史)에서 축소된 연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연대 축소 문제는 세 가지 증거로 입증되는 것이다. 첫째, 고구려가 멸망할 때 "9백 년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기(秘記)가 유행했다는 점이다. 비록 비기가 신빙성 있는 자료는 아니지만, 당시 민심 동요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8백여 년의 역사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전사에 기록된 705년이라는 연수가 의문스러운 것이다.

둘째, 광개토왕비의 기록과 고구려 본기 사이의 불일치이다. 본기에서는 광개토왕을 시조 추모왕의 13세손이라 하지만, 광개토왕비에는 17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대 차이는 본기의 705년이라는 연수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셋째, 《북사》고려전의 기록이다. 막래(곧 대주류왕)가 부여를 정복한 시기와 한 무제의 사군 설치 시기를 고려할 때, 고구려의 건국은 사군 설치보다 약 백여 년 앞선 것이 분명한 것이다.

이러한 연대 축소의 원인은 고대 국가들이 건국의 선후로 지위를 다투는 풍조 때문인 것이다. 특히 신라가 자신들의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두 나라를 멸망시킨 후 기록상의 세대와 연조를 줄여서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나라로 만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동부여, 북부여 등의 연대도 함께 축소된 것이다. 

강역의 축소 문제는 두 가지 주요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는 신라 경덕왕이 북방 영토를 상실한 후, 북방의 옛 지명과 고적을 남쪽으로 옮긴 것이다. 둘째는 고구려가 쇠약해져서 압록강 이북을 자신들의 옛 영토로 인정하지 못하게 되면서, 북방의 여러 나라들을 남쪽으로 옮겨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강역 축소의 구체적 사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부여의 경우, 본래 북부여(지금의 합이빈), 동부여(지금의 훈춘), 남부여(함흥)로 구분되었으나, 후대 학자들은 이를 잘못 해석하여 개원, 강릉 등으로 비정한 것이다. 사군의 경우도 본래 위만의 땅인 해성·개평 일대였으나, 후대 학자들은 이를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지로 잘못 비정한 것이다. 낙랑국의 경우는 한의 낙랑군과 별개의 나라임에도 이를 혼동하여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원전 190년경을 동부여, 북부여, 고구려의 분립 시기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열국의 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각 나라의 강역도 신라 경덕왕 이후에 남쪽으로 옮겨진 지명들을 바로잡아 원래의 위치로 복원해야 하는 것이다.


열국의 강역 

계속해서 열국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신조선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을 때, 그 세부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는데, 《삼국지》에 "현도의 북쪽 천 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금의 합이빈 지역이었으나, 기존 학자들은 이를 잘못 해석하여 개원으로 보았다. 둘째, 동부여는 갈사나에 도읍했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공격할 때 '북벌'이라 했다는 기록을 통해, 이 지역이 고구려의 동북쪽, 즉 지금의 훈춘 등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존 학자들은 이를 강릉으로 잘못 해석했다. 셋째, 남부여는 동부여가 분열된 이후에 형성되었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후, 동부여는 둘로 나뉘어 하나는 원래의 갈사나에 머물렀는데, 이것이 곧 남부여가 된 것이다. 동부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여 국호가 사라졌고, 남부여는 문자왕 3년(기원 494년)에 이르러서야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동부여와 남부여는 모두 지금의 함흥 지역에 있었으나, 기존 학자들은 그 강역은 물론 명칭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사군의 경우도 중요한 오해가 있었다. 위만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는 《위략》의 만반한,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문번한, 즉 지금의 해성·개평 등지로, 헌우란이 정확한 위치이다. 한나라 무제가 점령한 조선 영토는 패수 부근, 곧 위만의 옛 땅이었다. 그가 설치한 사군은 단지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안에 임의로 설정한 것이었는데, 기존 학자들은 사군의 위치를 현재의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 여러 도와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 환인 등지로 잘못 비정했다.

낙랑국의 경우는 한나라의 낙랑군과는 별개의 정치체였다. 이는 지금의 평양에 건국된 독자적인 나라였으나, 많은 학자들이 이를 한나라의 낙랑군과 혼동하는 오류를 범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수도, 그리고 신라와 가야의 위치에 대해서는 기존 학자들의 수정이 대체로 정확했으나, 군현이나 전투 지점의 위치는 대부분 신라 경덕왕 이후에 남쪽으로 옮겨진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여 착오가 발생했다.

이러한 역사적 오류들을 바로잡는 작업은 우리 고대사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히 열국시대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리적 오해와 연대 착오를 바로잡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