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열국 쟁웅-고구려
태조·차양 대왕의 정치와 문화 제도
1. 태조왕과 차대왕의 혈통에 대한 기록 오류
고대 왕조의 혈통 기록은 사학자들이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사에서는 왕조의 계보가 세대별로 전해지므로, 그 정확성과 오류를 가릴 필요가 있다. 먼저 태조왕의 계보에 대해 살펴본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은 유류왕의 아들로, 재사라는 인물의 아들이며 대주류왕의 조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류왕은 광개토경호태왕의 16대조로, 태조왕에게는 4대조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류왕을 태조왕의 아버지로 기록한 것은 명백한 오류이거나 후대에 조작된 기록이다.
재사는 고추가라는 벼슬을 가진 인물로, 이는 고대 고구려에서 종친 대신을 의미하는 직위였다.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태조왕이 연나부 출신으로,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고구려의 정치 체제가 중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므로, 연나부 출신이 왕위에 오른 것은 특이한 경우였다. 이는 태조왕이 연나부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 왕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재사는 대주류왕의 조카가 아니라 3세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차대왕 역시 재사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 태조왕의 왕위를 이어받은 차대왕은 태조왕의 아우가 아니라 서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우라면 ‘왕제’로 기록되었어야 하나, ‘왕자’로 불린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차대왕은 태조왕이 즉위할 때 불과 7세였으며, 어머니인 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당시 재사는 나이가 많아 이미 노쇠한 상태였고, 이후 차대왕과 신대왕을 낳았다는 기록은 비현실적이다. 차대왕이 즉위할 당시 76세였고, 신대왕은 77세였으므로, 이는 재사가 태조왕 이후 19년이나 지나서 다시 자식을 낳았다는 말이 되며,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
차대왕과 신대왕, 인고는 태조왕의 서자이며, 태조왕의 적자인 막근과 막덕은 차대왕에게 살해되었다. 이 기록은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들이라는 후한서의 기록이 실록에 가깝고,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우로 기록한 본기의 내용은 오류이거나 왜곡된 기록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2. 태조왕과 차대왕 시대의 ‘선배’ 제도
고구려의 강성함은 ‘선배’ 제도의 창설에서 비롯되었다. 이 제도는 태조왕과 차대왕 시기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선배는 원래 ‘신수두’라는 종교적 집단에서 유래했으며, 매년 3월과 10월에 열리는 신수두 대제에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겨루어 우수한 자를 선발하였다.
선발된 ‘선배’는 국가로부터 생활 지원을 받았으며, 이들은 집단 생활을 하며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국방과 사회적 의무를 수행했다. 전쟁이 발생하면 선배들은 단독 부대를 조직해 싸움에 나섰으며, 승리하지 못하면 전장에서 죽기를 각오하였다. 선배들은 전투에서 용맹함을 발휘하여 고구려 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선배의 계급은 수석인 ‘신크마리’를 필두로, ‘대형’, ‘소형’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지위를 얻었으며, 학문과 무예에서 탁월한 인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이 선배 제도의 잔재는 함경북도의 재가화상이라는 집단으로 남았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재가화상은 형벌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중국의 형벌 제도를 오해한 결과다. 재가화상은 고구려의 선배들이 후대에까지 그 전통을 유지한 것으로, 학문과 기술을 전수하던 고구려 선배의 후예들이다.
3. 태조왕과 차대왕 시대의 행정 제도
추모왕 시기 고구려는 작은 나라들이 산재해 있었고, 체제도 미완성이었다. 그러나 태조왕과 차대왕 시기에 이르러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고구려는 ‘삼한’의 제도를 참고하여 삼재상 제도를 도입하였다. 세 재상은 각각 ‘신가’, ‘팔치’, ‘발치’로 불리며, 이들은 대보, 좌보, 우보의 역할을 맡았다.
5부 체제가 확립되었으며, 각각 동부는 ‘순라’, 남부는 ‘불라’, 서부는 ‘열라’, 북부는 ‘줄라’, 중부는 ‘가우라’로 불렸다. 각 부는 다시 세부적으로 나뉘어 행정을 담당했으며, 각 부의 수장은 ‘라살’(이두로는 ‘누살’)로 불렸다.
‘신가’는 내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최고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임기는 3년마다 대왕과 주요 관료들이 회의를 통해 선출되었다. 라살은 대체로 세습되었으나, 필요에 따라 대왕과 신가의 명령으로 해임되기도 했다.
고구려의 행정 체계는 고대 한국과 중국의 기록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전해지며, 이두와 한문으로 혼용되어 기록되었다. 이로 인해 일부 기록에서 오역과 혼동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고추가는 종친대관이었으나, 외교관으로 오해되었고, 조의두 대형이 선배 조직의 수장임에도 대신으로 잘못 기록되었다.
태조왕과 차대왕의 치세는 고구려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다.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는 고구려의 강성함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태조왕과 차대왕의 한족 축출 및 고토 회복
1. 한나라의 국력과 동천(東遷)의 배경
모본왕이 한때 요동을 회복한 것은 이미 제1장에서 서술한 바 있다. 그러나 모본왕이 피살된 후, 태조왕이 7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국내의 인심이 동요하였다.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태조왕은 요서 지역에 10개의 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한나라는 그 국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한나라는 명장 반초(班超)를 서역 도호로 파견하여 서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인 거사(渠師), 비선(毗善)을 정복하고 지중해에 이르렀으며, 대진(大秦, 지금의 이탈리아)과 교류하였다. 이로 인해 후한서에는 서양의 해행문자(蟹行文字, 서양 문자)와 백인(白人)의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또한 두헌(竇憲)은 약 5천 리에 달하는 원정을 통해 외몽골 지역의 북흉노를 대파하였다. 패배한 북흉노는 흑해 인근으로 밀려나 동고트족을 압박하였고, 이는 서양 역사에서 민족 대이동의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흉노 대왕 아틸라가 유럽 전역을 뒤흔들게 된 원인도 이때의 패전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강대한 국력을 지닌 한나라가 고구려의 요동을 영원히 내어줄 리 없었다. 또한, 고구려나 선비(鮮卑)가 매년 2억 7천만에 달하는 굴욕적인 세폐를 지속적으로 바칠 수도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세폐를 중단하고 장수 경기를 보내어 요하를 건너 6개 현을 재점령하였다. 이후 경기를 요동태수로 임명하고, 한나라의 동쪽 침략에 대비하였다.
2. 왕자 수성의 요동 회복
당시 후한서에서는 고구려 침략의 주도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사실 태조왕은 고구려의 군주로 군림하였을 뿐, 전쟁의 실질적인 지휘는 차대왕인 왕자 수성이 담당하였다.
초기 전쟁은 한나라가 주도하여 요동을 침략하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이에 맞서 방어하며 피동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는 주도권을 잡고 요동을 탈환하였으며, 한나라의 변경을 지속적으로 침략하였다. 이러한 전쟁은 서기 105년에 시작되어 121년에 마무리되었으며, 총 17년 동안 이어졌다.
전쟁이 시작된 서기 105년, 왕자 수성은 34세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전쟁 방략을 세웠다.
“고구려는 한나라에 비해 영토와 인구 면에서 부족하나, 산세가 험준하고 계곡이 깊어 방어에 유리하다. 적은 병력으로도 한나라의 대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반면, 한나라는 평원 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침략하기 용이하다. 고구려가 한 번에 한나라를 무너뜨리기는 어려우나, 빈틈을 노려 지속적으로 변경을 혼란에 빠뜨려야 한다. 이를 통해 한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후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것이다.”
이러한 전략 아래, 고구려는 정예 병력을 동원하여 요동에 진입하였다. 신창과 후성 등 6개 현을 공격하여 수비병을 격파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후 예족과 선비족을 설득해 매년 한나라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등을 잇달아 침략하게 하여 한나라의 국력은 17년 동안 소모되었다.
서기 121년 정월, 한나라의 안제(安帝)는 고구려의 지속적인 침입을 우려하여 유주자사 풍환(馮煥), 현도군수 요광(遙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태조왕은 왕자 수성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수성은 2천 명의 병력을 험지에 배치하여 풍환 등의 공격을 막고, 3천 명의 병력으로 요동과 현도의 각 고을을 공격하여 후방 지원을 차단하였다. 결국 풍환 등을 대파하였다.
같은 해 4월, 수성은 선비족의 8천 병력을 이끌고 요동의 요대현을 공격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정예병은 신창에 매복하여 요동태수 채풍의 구원병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채풍을 포함한 100여 명의 장수를 참수하고 다수의 군사를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아 요동군을 점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백제와 예족의 기병 1만 명을 동원해 현도와 낙랑 두 군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위우거(衛右渠) 때 잃었던 조선의 옛 영토인 오열홀(烏列忽)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한나라는 장기적인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데다, 대패를 겪자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결국 요동을 고구려에 내어주고, 세폐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화의를 요청하였다. 당시 포로는 성인 1명당 명주 40필, 어린이는 20필로 교환하였다.
3. 요동과 낙랑의 회복
태조왕 본기와 후한서에는 요동과 낙랑의 회복이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의 역사학자 가탐(賈耽)의 저술에는 “요동과 낙랑이 한나라 건안(建安) 연간에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건안은 서기 196년 한나라 헌제(獻帝)의 연호이므로, 이는 건광(建光)의 오기로 보인다. 건광은 서기 121년 한나라 안제의 연호로, 이는 고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회복한 시기와 일치한다.
고구려는 요동을 점령한 후, 현재 개평현 동북쪽 70리에 환도성을 축조하여 서방 경영의 중심지로 삼았다. 국내성, 졸본성과 함께 이를 삼경(三京)이라 불렀다.
환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후세 학자들 간의 논쟁이 있었다. 일부는 이를 환인현 부근, 즉 혼강 상류의 안고성이라 주장하고, 일부는 집안현 홍석정자산에 위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의 주장은 산상왕 때 제2의 환도성이며, 뒤의 주장은 동천왕 때 제3의 환도성이다. 태조왕이 건설한 제1의 환도성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안시성은 곧 환도성”이라 기록되었으며, 삼국유사에는 “안시성은 일명 안촌흘(安寸忽)이라 한다”고 서술되었다. 환은 우리말로 ‘알’을 의미하므로, 안시성과 환도성은 동일한 지역, 즉 개평현 동북쪽 70리의 옛 자리임이 분명하다. 후대에 세 환도성을 구분하지 못해 환도성의 위치가 모호해졌던 것이다.
차대왕의 왕위 찬탈
1. 태조왕의 가정불화
태조왕의 서자였던 왕자 수성은 요동을 회복하고 한나라로부터 세폐를 다시 받게 되자, 태조왕으로부터 ‘신가’에 임명되어 군국 대사의 모든 일을 도맡게 되었다. 그의 위세와 권력이 날로 커졌고, 그에 대한 명성과 인망이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수성은 이 명성과 인망을 바탕으로 요서를 공격하여 옛 삼조선의 서북 땅을 회복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가정 문제로 인해 공명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렸다.
수성의 가정 불화는 그가 서자였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태조왕의 적자인 막근과 막덕은 왕위를 계승할 법적 권리가 있었고, 수성은 요동 전쟁에서 거둔 빛나는 공적을 바탕으로 왕위를 노렸다. 이로 인해 태조왕은 태자를 정하지 못하고 갈등을 오랫동안 방치하게 되었다.
수성은 요동 전투를 마친 후 한나라와 화의를 맺고 급히 귀국하여 정치를 안정시키며, 목도루와 고복장 같은 어진 신하를 등용해 팔치와 발치의 직책을 맡겼다. 이들은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수성은 사적으로도 자신의 세력을 키우며 태자 자리를 얻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특히 ‘불라’의 미유와 ‘환라’의 어지류 같은 인물들은 수성의 뜻을 알고 그의 야망에 아부하며, 태자의 자리를 빼앗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태조왕은 적자인 막근을 태자로 세우자니 수성의 세력이 두려웠고, 수성을 태자로 세우자니 왕실의 법도에 걸려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수성은 10여 년 동안 정치를 독점했으나 태자 자리를 얻지 못하자 점점 불만을 드러냈고, 그의 음모가 주변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막근은 태자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했으나 군사권이 없었고, 수성의 위세와 명망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막근은 태조왕의 마음을 돌려 수성의 야망을 막는 데에 집중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신수두’에는 신단의 무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부여와 달리 정권을 쥐지는 않았으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능력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고 있었다. 막근은 이 무사들에게 뇌물을 주고 도움을 청했다.
기원후 142년 환도성에 지진이 발생하고, 태조왕은 꿈에서 표범이 범의 꼬리를 물어 끊는 장면을 보았다. 이에 불길함을 느낀 태조왕은 무사에게 꿈의 의미를 물었다. 무사는 이를 기회로 삼아 수성을 참소하며 말했다.
“범은 모든 짐승의 어른이고, 표범은 범의 후손입니다. 범의 꼬리는 곧 뒤를 의미하니, 이는 대왕의 작은 아들이 대왕의 후사를 끊으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말은 수성이 막근을 해칠 것이라는 암시였다. 그러나 태조왕은 수성에 대한 애정이 깊어 이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복장을 불러 조언을 구했다. 고복장은 신단의 말을 반박하며, 태조왕을 위로했다.
“대왕께서 나라를 집안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신다면, 재난이나 변괴가 있어도 무슨 화가 닥치겠습니까?”
2. 수성의 음모와 태조왕의 선위
수성은 40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며 위세와 명망을 독점했다. 그는 마근을 죽이고 왕위 계승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태조왕이 노쇠하여 곧 죽을 것이라 여겼고, 조급히 행동하지 않았다. 태조왕은 두 사람의 갈등을 조화시켜 자신의 사후에 변란이 없도록 만들기를 바랐으나,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기원후 146년, 태조왕은 즉위한 지 94년이 되었고, 그의 나이는 백 살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성 또한 76세가 되어가면서 자신이 태조왕보다 먼저 죽어 막근에게 왕위가 돌아갈까 두려워했다.
그해 7월, 수성은 왜산에서 사냥을 하던 중 지는 해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그의 측근들은 수성의 뜻을 알아차리고 모두 그를 지지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은 수성에게 반대하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성명하셔서 백성들이 존경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왕자께서 소인배들과 함께 대왕을 폐위하려 한다면, 이는 실로 가느다란 실로 만근의 무게를 끌어올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효도로써 대왕을 섬기신다면 대왕께서 양위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큰 화가 닥칠 것입니다.”
수성은 이 말을 못마땅히 여겼고, 그의 측근들이 그를 살해했다. 이후 음모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복장은 수성의 음모를 눈치채고 태조왕에게 보고하며 수성을 처단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태조왕은 수성을 죽이지 못하고, 결국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자신은 별궁으로 물러났다. 수성은 차대왕으로 즉위하였다.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태조왕 80년에 좌보 패자 목도루가 수성이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차대왕 2년에도,
“좌보 목도루가 병을 핑계로 노쇠하여 물러났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모순된 기록이다. 병을 핑계로 물러난 지 15년 후에 다시 병으로 물러났다고 기록된 것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여러 기록을 무분별하게 수록했기 때문이다.
또한 태조왕 94년 8월에,
“태조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
는 기록은 『후한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태조왕이 아닌 신대왕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이 이를 태조왕의 94년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며, 심지어 월까지 적어 넣은 것은 더욱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는 김부식이 국내외 기록을 수집하며 근거 없이 연월을 설정하고 내용을 가감했기 때문이다.
차대왕의 피살과 명림답부의 전권
1. 차대왕의 20년 통치와 피살
차대왕은 태조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아 20년간 고구려를 통치한 후, 연나부의 조의(朝衣)였던 명림답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차대왕 본기는 대단히 간략하고 불완전하여, 그가 어떤 방식으로 통치했는지, 왜 피살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기 어렵다. 먼저 본기의 내용을 현대적으로 번역한 후, 이를 바탕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차대왕의 본기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으로, 태조왕의 동모제(同母弟)였다. 그는 용맹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함은 부족하였다. 태조왕이 왕위를 물려주어 즉위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76세였다.
즉위 2년(서기 147년) 봄 정월, 관나부(貫那)의 패자(覇者)였던 미유를 우보(右輔)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우보였던 고복장을 처형하였다. 고복장이 죽을 때 이렇게 말했다.
‘억울하다. 내가 선조의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난을 일으킬 자를 미리 경고했건만, 선군(先君)께서 내 말을 듣지 않으셨다. 이제 새 왕이 즉위하였으니, 정의로운 정치로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충신을 억울하게 죽이니, 나는 이 같은 무도한 세상에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
고복장이 처형된 후, 많은 이들이 분개하였다.
같은 해 7월, 좌보(左輔)였던 목도루가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왕은 환나부(桓那)의 우태(右台)였던 어지류를 좌보로 임명하고, 대주부(大主簿)의 작위를 더해주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비류나부(比流那)의 조의였던 양신을 중외대부(中外大夫)로 삼고, 우태로 승진시켰다. 이들은 모두 차대왕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지진이 발생하였다.
즉위 3년(서기 148년) 봄, 왕은 태조왕의 장남이자 원자(元子)였던 막근(莫根)을 살해하였고, 그의 동생 막덕(莫德)은 두려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같은 해 7월, 왕은 평유원(平遊原)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흰 여우를 만나 화살을 쏘았으나 맞추지 못하였다. 신하가 말하였다.
‘흰 여우는 요사스러운 짐승입니다. 천제가 임금에게 경고하려는 뜻이니, 덕을 닦으셔야만 재앙을 막고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왕은 이를 비웃으며 말했다.
‘흉하다고도 하고 길하다고도 하니, 어찌 거짓말이 아니겠느냐?’
왕은 신하를 처형하였다.
4년째 되는 해, 일식이 발생하였고, 5월에는 다섯 개의 별이 동쪽에 모였다. 점관이 이를 길한 징조로 해석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겨울 12월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다.
8년(서기 153년) 여름에는 6월에 서리가 내렸고, 겨울에는 천둥과 지진이 함께 일어났다.
13년(서기 158년)에는 패성(覇星)이 북두성(北斗星)을 침범하였고, 5월에 또다시 일식이 발생하였다.
즉위 20년(서기 165년) 봄 정월에도 일식이 있었다. 같은 해 3월, 태조왕이 별궁에서 서거하니 그의 나이는 119세였다. 그해 겨울 10월, 연나부의 조의 명림답부가 차대왕이 백성들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며 왕을 살해하였고, 이후 그를 ‘차대왕’이라 부르게 되었다.”
차대왕의 정치와 피살의 원인
차대왕 본기의 마지막 구절은 “차마 백성들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하였기에 살해되었다”고 기록하지만, 앞선 기록에서 차대왕이 백성에게 가혹한 정책을 시행한 정황은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처형한 인물들은 대부분 개인적 원한이나 정치적 대립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백성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 기록은 없다.
고복장은 차대왕의 음모를 폭로했기 때문에 처형되었고, 목도루는 중립적 태도를 보이다가 실각하였다. 무사는 태조왕의 꿈을 해석하여 차대왕을 해치려 한 죄로 처형되었다. 막근과 막덕 형제는 왕위 계승권을 두고 대립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모든 사건은 차대왕의 즉위 초기에 집중되었고, 피살되기까지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따라서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살해한 이유를 단순히 ‘잔혹한 통치’로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오히려 차대왕이 기존의 고구려 통치 방식인 **벌족 공치(閥族共治)**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전제군주로서 군림하려 했기 때문에 내부에서 배신을 당한 것이다.
차대왕의 패망과 명림답부의 반란
고구려는 본래 국왕이 단독으로 정치를 결정하지 않고, 5부의 대관들과 회의를 통해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체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차대왕은 부왕을 가두고, 신앙의 중심이었던 무사를 살해하며 독단적으로 군림하였다. 이로 인해 초기에는 그를 지지했던 어지류와 여러 신하들이 결국 등을 돌렸다.
명림답부는 연나부의 지도자로서 외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내부에서는 차대왕의 측근이었던 어지류와 미유, 양신 등이 내응하였다. 태조왕이 서거한 틈을 타 이들은 차대왕을 살해하고, 벌족 공치 체제를 회복하였다.
2. 명림답부의 전권 장악과 외교 전략
차대왕이 피살된 후, 명림답부는 백고(伯固)를 신대왕으로 옹립하고 대사면을 단행하였다. 차대왕의 아들 추안도 양국군으로 봉하고, 차대왕의 가혹한 법령을 폐지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명림답부는 국상의 직위를 맡고 모든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서기 169년, 후한의 현도태수 경림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 명림답부는 신대왕과 신하들을 설득하여 지키면서 싸우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고구려는 적은 병력과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에 집중하였고, 결국 후한의 군사들이 지쳐 퇴각하자 좌원에서 대대적으로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명림답부의 평가
명림답부는 일각에서 고구려 최초의 혁명가로 평가되지만, 그는 단순히 벌족 공치를 회복한 권력 쟁탈의 효웅에 불과하다. 혁명은 역사의 진보적 변화를 의미하지만, 명림답부의 행동은 단지 기존 체제의 복구에 그쳤다. 그는 고구려의 국가 체제를 유지하며, 외세에 맞서 국토를 수호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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