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열국의 쟁웅시대-열국의 분립
동부여의 분립
1) 동부여의 분립과 해부루의 동천
북부여와 두 동부여, 그리고 고구려라는 네 나라는 모두 신조선의 영토 내에서 건국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정확한 건국 과정, 즉 신조선이 멸망하고 부여 왕조가 되어 다시 세 나라로 나뉘었는지, 아니면 부여가 신조선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신조선에서 직접 세 나라가 분립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신조선이 흉노 모돈에게 패배한 시기가 기원전 200년경이고, 동부여와 북부여의 분립도 같은 시기이므로 후자의 설이 더 타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전사에서는 동부여와 북부여의 분립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여왕 해부루가 고령에도 후사가 없어 산천에 기도하던 중 곤연(경박호)에서 금와를 얻어 태자로 삼았다. 이후 상아란불이라는 인물이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며 동해변 가섭원으로의 천도를 건의했고, 해부루는 이를 받아들여 동부여를 세웠다는 것이다. 한편 옛 도성에는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는 해모수가 나타나 통치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이 신화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해부루가 금와를 양자로 삼은 것, 아란불의 건의로 천도를 단행한 것,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을 자처하며 옛 도성을 장악한 것 등은 모두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두 가지 한계가 있다. 첫째는 이것이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시조 추모왕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어, 해부루와 해모수의 분립 과정만을 간략히 다루고 그 이전의 역사는 생략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원문이 신라 말기 한학자인 불교승에 의해 개찬되면서, '신가'를 '상가'로, '갈사나'를 '가섭원'으로 바꾸는 등 원래의 용어가 변형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제왕은 정치적 통치자인 동시에 종교적 제사장이었으며, 장상은 군사 지휘관이면서 동시에 무사이자 복사였다. 해부루는 대단군의 제사장 직책을 세습한 인물이었고, 아란불은 강신술을 가진 무사이자 예언자의 역할을 겸한 신가였던 것이다. 신조선의 전통에서는 내우외환은 물론 천재지변까지도 그 책임이 대단군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흉노 모돈과의 전쟁 패배로 인해 민심을 잃은 해부루가 아란불과 함께 갈사나(지금의 훈춘)로 이주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다.
한편 해모수는 해부루와 같은 혈족이며 고주몽의 아버지인데, 그는 해부루의 동천을 기회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자처하며 왕위를 차지한 것이다. '부여'라는 말이 도성 또는 도회를 의미하므로, 해부루가 세운 나라를 동부여라 했을 때 해모수는 자연히 북부여라 칭했을 것이나, 이 명칭이 역사서에서 누락되어 후대 학자들이 구별을 위해 새로 부여한 것이다.
2) '가시라(갈사)의 실체와 역사적 위치'
먼저 '가시라'의 어원과 의미를 살펴보면, 우리 고대어에서 숲을 '갓' 또는 '가시'라고 했던 것이다. 당시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 그리고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는 수천 리에 달하는 울창한 대삼림이 펼쳐져 있었는데, 이 지역을 '가시라'라고 불렀다. 즉 '가시라'는 삼림의 나라라는 뜻인 것이다.
이 '가시라'는 문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서는 이두문으로 갈사국, 가슬라, 가서라, 아서량 등으로 표기했고, 대각국사의 《삼국사》에서는 가섭원이라고도 했다. 한편 중국 사서에서는 이를 '옥저'라고 기록했는데,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옥저는 만주어 '와지'(숲)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예(읍루)족이 만주족의 선조로서, 다른 조선 열국과 달리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삼국지》와 《북사》에서 이들의 언어가 특별히 달랐다고 기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즉 우리말의 '가시라'를 예족은 '와지'라 불렀고, 중국인들은 이를 다시 '옥저'로 번역한 것이다.
이 지역은 두만강을 경계로 북갈사와 남갈사로 나뉘었는데, 이는 곧 북옥저와 남옥저에 해당하며, 현재의 함경도는 남옥저 지역이었다. 고대 문헌에는 남북 옥저 모두 기름진 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함경도가 메마른 땅인 것을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토질이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순박하고 근면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으며, 여인들의 아름다움으로도 유명했다. 이로 인해 부여나 고구려의 지배층들이 이들을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길을 운반하게 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뽑아 후궁으로 삼았다고 한다.
해부루가 북가시라(현재의 훈춘)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운 후, 그의 손자 대소 대에 이르러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에게 패해 죽자, 그의 아우 모갑과 종제 모을이 국권을 다투었다. 이 과정에서 모을은 구도에 근거지를 두고 북갈사 혹은 남동부여를 건국했다.
그러나 기존 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첫째, 동부여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몰랐고, 둘째, 옥저가 갈사와 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셋째, 북동·남동의 두 갈사가 곧 남북 옥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넷째, 강릉의 '가시라'(기슬나) 지명이 신라 경덕왕 때 북방 영토를 상실한 후 남쪽으로 옮겨온 것임을 모르고, 이를 동부여의 옛 수도로 오해했다.
3) 북부여의 문명과 문화적 특성
북부여의 역사적 기록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다. 해모수가 도읍을 세웠다는 사실과 고구려 유류왕 본기에 황룡국이란 별칭으로 한 번 언급된 것 외에는, 조선인의 기록으로 전해진 것이 거의 없고 대부분 중국 사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북부여의 수도는 '아스라', 즉 부사량이었는데, 이는 대단군 왕검의 삼경 중 하나인 것이다. 현재 소련령 우수리라는 지명은 바로 이 '아스라'라는 이름이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다. 북부여의 본래 영토였던 지금의 합이빈 지역은 수천 리에 달하는 광활한 평원 지대로, 다음과 같은 지리적,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농업 생산력이 뛰어났다. 기름진 토질 덕분에 오곡이 잘 자랐으며, 이는 국가 발전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둘째, 수운 교통이 발달했다. '송(아리라)'이라 불린 강들이 종횡으로 흘러 교통과 물류의 중심 역할을 했다. 셋째, 주민들의 기질이 근면하고 강인했다. 이는 국가 발전의 인적 기반이 되었다.
북부여의 경제적 기반은 매우 다양했다. 대주와 적옥의 채굴, 화려한 비단과 자수 비단의 생산, 여우·삵·원숭이·담비 등의 모피 수출이 이루어졌다. 또한 성곽과 궁실의 건축 기술이 발달했고, 풍부한 창고 저축을 자랑했는데, 이는 모두 고도의 문명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북부여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치수법을 가르쳤다는 금간옥첩의 문자가 왕궁에 보관되어 있었고, 이두문으로 쓰인 역사서인 신지와 시가집인 풍월도 이 나라에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모수 이후 북부여의 국운은 부침이 심했다. 처음에는 예족과 선비족을 정복하여 강국의 지위에 올랐으나, 후에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고구려로 귀속되자 국세가 급격히 쇠퇴하여 조선 열국 간의 패권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고대 국가의 흥망성쇠가 얼마나 급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발흥
1) 고구려 건국과 추모왕의 생애
고구려의 시조 추모는 타고난 영웅적 자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용맹과 힘, 특히 활쏘기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과부였던 소서노의 재산을 기반으로 영웅호걸들을 모았고, 왕검 이래의 신화적 전통을 교묘히 활용하여 자신이 하늘의 알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고구려를 건국했다.
추모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대내적으로는 여러 나라의 신임을 얻어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했고, 대외적으로는 그의 비범한 행적이 중국 전역에 알려져 제왕과 백성들의 숭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신라 문무왕이 "남해에 공을 세우고, 북산에 덕을 쌓았다"고 찬사를 보냈으며, 중국 2천년 역사에서 유일한 공자 반대자로 알려진 동한의 학자 왕충이 그의 사적을 기록할 정도였다.
추모의 출생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리라(송화강) 부근의 한 장자에게 유화, 훤화, 위화라는 세 딸이 있었는데, 모두 절세미인이었고 특히 유화가 가장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유화와 사통하여 임신하게 되었으나,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왕실과 서민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해모수는 유화를 외면했다. 이에 분노한 유화의 부모는 그녀를 우발수에 던졌으나, 한 어부가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에게 바쳤다.
금와왕은 유화의 미모에 반해 후궁으로 삼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화가 해모수의 아이를 낳았다. 유화는 이를 '해의 기운을 받아 낳은 천신의 아들'이라고 했으나 금와왕은 의심하여 아이를 여러 차례 죽이려 했다. 그러나 아이가 매번 기적적으로 살아남자, 마침내 유화에게 양육을 허락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또래에서 가장 힘이 세고 특히 활솜씨가 뛰어나 '추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추모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여러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위서》에서는 그를 '주몽'이라 했고, 이는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라 설명했다. 《만주원류고》에서는 "지금 만주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이라 하니, 주몽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추모'로, 문무왕의 조서에는 '중모'로 기록되어 있다. '주몽'이란 이름은 중국 사서의 기록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옮겨 고구려 본기에 실은 것으로 보인다.
'추모'나 '중모'는 조선어로 '줌' 또는 '주모'로 읽어야 하고, '주몽'은 예어(만주족 시대의 말)로 '주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사서의 '주몽'은 예어를 기록한 것으로, 《만주원류고》의 설명이 타당한 것이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대소가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그를 죽이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유화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19세가 된 추모는 궁중에서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한 준마의 혀에 바늘을 꽂아 말이 먹지 못하게 하여 몸이 여위게 했다. 왕은 오히려 이 말을 상으로 주었고, 추모는 바늘을 빼고 말을 잘 길러 신수두의 10월 대제 때 사냥에 참가했다.
단 한 발의 화살만을 받았음에도 추모는 말 타기와 활쏘기의 뛰어난 재능으로 대소 형제들보다 훨씬 많은 짐승을 잡았다. 이에 대소의 시기가 더욱 깊어져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를 알아차린 22세의 추모는 오이, 마리, 협부 등 측근들과 함께 도망쳐 졸본부여로 갔다.
졸본부여에서 추모는 37세의 과부 소서노를 만나 결혼했다. 소서노는 아버지 연타발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고, 이전에 해부루왕의 서손 우태의 아내로 비류와 온조를 낳았던 여인이었다. 추모는 소서노의 재산을 기반으로 뛰어난 장수 부분노 등을 영입하고 민심을 모아 국가 기반을 다졌다. 흘승골의 산 위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이두자로는 고구려)라 했는데, 이는 '중경' 또는 '중국'이란 뜻이었다.
추모는 졸본부여의 왕 송양과 활쏘기 시합에서 승리하고 그 무기고를 습격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아냈다. 또한 인근의 예족을 몰아내고,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정복했으며, 부위염을 보내 동부여를 공격하여 북가시라의 일부를 차지했다. 이로써 고구려의 기틀을 확고히 다진 것이다.
한편 전사에서 송양을 나라 이름으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구삼국사를 보면 '비류왕 송양'이라 했는데, 비류는 곧 부여, 즉 졸본부여를 가리키므로 송양은 졸본부여 왕의 이름인 것이다. 또한 추모가 졸본부여 왕녀와 혼인했다는 기록도 잘못된 것으로, 왕녀와 혼인한 것은 추모의 아들 유류이며, 추모의 아내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었다.
끝으로 추모왕을 본기에서 '동명성왕'이라 한 것은, '동명'이 '한몽'으로 읽히는 신수두 대제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서 높이 받들었기에 '한몽'(동명)이란 칭호를 올린 것이며, '성왕'의 '성'은 '주무'를 의역한 것이다.
2) 동부여와 고구려의 갈등
고구려의 왕위는 추모왕에서 아들 유류왕으로, 다시 그의 아들 대주류왕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 유리와 같은 인물인데, 유류·유리·유리(類利)는 모두 '누리'로 읽어야 하며 '세상'이라는 뜻과 '밝음'이라는 뜻을 가진 것이다. 또한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인데, 무·주류·무홀은 모두 '무뢰'로 읽어야 하며 '우박'의 뜻이자 '신'의 뜻을 가진 것이다. 본기에서 이들의 이름과 시호를 혼동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류왕 시기에 동부여는 매우 강성했다.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은 왕위에 오르자 고구려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출 것과 볼모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두 명의 태자가 희생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첫째 태자 도절은 볼모로 가기를 거부하다 왕의 분노를 사서 병으로 죽었고, 용맹했던 둘째 태자 해명은 유류왕이 동부여를 두려워해 수도를 국내성(지금의 집안현)으로 옮기자 이를 비겁한 처사라며 반대했다.
북부여왕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 시험하자, 해명은 그 자리에서 활을 꺾어 북부여 사람들의 힘없음을 조롱했다. 유류왕은 해명이 국가에 위험한 인물이라 판단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제거하려 했으나, 북부여왕이 오히려 해명을 귀히 대우하여 보내자 직접 해명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동부여와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대소왕은 여러 차례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고구려는 크게 피폐해졌고, 대소가 조공을 독촉하자 유류왕은 두려워하며 애걸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어린 왕자 주류가 죽은 해명의 기개를 이어받아, 부왕의 명령이라 사칭하여 동부여 사신을 꾸짖어 돌려보냈다.
격분한 대소왕이 다시 군사를 일으키자, 유류왕은 주류에게 전권을 맡겼다. 주류는 동부여의 마병이 많고 고구려의 보병이 적은 상황을 고려하여, 학반령 골짜기에 복병을 두는 전술을 썼다. 험한 지형에서 마병의 기동이 어려워지자 동부여군은 말에서 내려 산으로 도망갔고, 주류는 이들을 섬멸하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이 전투로 동부여의 정예병력이 전멸하여 더 이상 고구려와 맞설 수 없게 되었고, 주류는 태자가 되어 군사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3) 대주류왕의 정복 활동과 낙랑국의 멸망
대주류왕은 즉위 4년에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벌을 시작하여 동부여를 공격했다. 이때 그는 창술의 명수 마로와 검술의 명수 괴유를 얻어 선봉으로 삼았다. '가시라' 남쪽에서 진구렁을 마주하고 진을 쳤을 때, 동부여의 대소왕이 직접 말을 타고 고구려 진영을 공격하다가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는 바람에 괴유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대소왕의 죽음은 오히려 동부여군의 사기를 높였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대주류왕의 군대를 겹겹이 포위했다.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을 입었으며, 고구려군의 사상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대주류왕은 7일 동안 포위 속에서 굶주렸으나, 다행히 짙은 안개가 끼자 풀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진영에 세워두고 군사를 이끌고 탈출했다. 이물림에 이르러서는 전군이 굶주림과 피로로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들짐승을 잡아먹으며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동부여는 승리했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이 일어났다. 계제 모갑은 부하 백여 명을 이끌고 남가시라에서 사냥하던 해두왕을 살해하고 이 지역을 장악하여 남동부여를 세웠고, 종제 모을은 옛 도읍에서 북동부여를 세웠다. 그러나 다른 종제들이 모을을 공격하자, 모을은 1만여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고 대주류왕은 마침내 북동부여를 평정할 수 있었다.
4) 대주류왕의 낙양
한편 낙랑에서는 최씨가 왕위를 이어 낙랑왕을 칭했는데, 마지막 왕 최이는 고구려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딸을 통한 화친을 도모했다. 이때 남동부여 왕의 손녀가 대주류왕의 후궁이 되어 낳은 아들 호동이 외가를 방문하는 길에 낙랑을 들르게 되었다. 최이는 호동을 자신의 사위로 삼았으나, 이는 결국 낙랑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낙랑국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북과 나팔로 속국들의 군사를 소집했는데, 호동은 아내 최녀를 설득하여 이 북과 나팔을 파괴하게 했다. 대주류왕이 낙랑을 공격했을 때 최이는 속국의 지원을 받지 못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동은 왕후의 모함으로 자살하게 되어, 이 사건은 결국 호동과 최녀 두 사람의 비극적인 최후로 끝났다.
이 사건의 연대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모순이 있다. 갈사왕의 손녀가 호동을 낳고 호동이 성장하여 결혼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 기록상으로는 이 모든 일이 11년 만에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는 신라 말기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축소하고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보이며, 실제로는 대주류왕 20년경의 일로 추정된다.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1) 소서노 여대왕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는 고구려 본기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백여 년의 연대 감축은 물론이고, 시조와 그 출신에 대해서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실제 백제의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으로, 그는 하북위례성(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소서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다른 한 사람은 하남위례홀에 도읍했고 결국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본기에서는 소서노를 완전히 제외하고 비류와 온조의 분립만을 기록했다. 더구나 온조왕 13년에 하남위례홀로 천도했다고 기록하여, 같은 장소로 천도했다는 모순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중대한 오류는 비류와 온조의 출자 관계이다. 이들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 남편인 부여 사람 우태였으므로, 비류와 온조의 성은 부여인 것이다. 근개루왕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인정했는데, 본기에서는 이들을 추모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이다.
소서노는 우태의 아내로 비류와 온조를 낳고 과부가 된 후, 추모왕에게 재혼하여 자신의 재산을 들여 고구려 건국을 도운 것이다. 이로 인해 추모왕은 소서노를 정궁으로 대우하고 비류와 온조를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유류가 그의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에서 오자, 예씨가 원후가 되고 소서노는 소후로 밀려났으며, 유류가 태자가 되면서 비류와 온조의 지위도 위태로워진 것이다.
이에 비류와 온조는 의논 끝에 추모왕이 살아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새로운 터전을 찾기로 한 것이다. 소서노는 추모왕의 허락을 받아 많은 재물과 오간, 마려 등 18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낙랑국을 거쳐 마한으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마한의 왕은 기준의 자손이었는데, 소서노는 뇌물을 바쳐 서북쪽 백 리의 땅인 미추홀과 하북위례홀 등지를 얻어 스스로 왕이 되고 국호를 백제라 한 것이다.
이후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과 결탁하여 압박해오자, 소서노는 처음에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을 견제하다가, 나중에는 예족의 침략이 낙랑국의 사주임을 깨닫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기울인 것이다.
백제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일부 서술이 연대와 지명, 그리고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서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백제의 본기(本紀)에 기록된 "낙랑왕"과 "낙랑태수"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백제의 초기 역사에서 수십 년에서 백여 년 정도의 연대가 축소된 후 이를 중국의 연대와 맞추어 기록한 결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낙랑을 한나라의 군현으로 간주하여 "낙랑태수"라 기록한 것이다. 또한, 예(濊)를 말갈(靺鞨)로 표기한 것은 신라 말기에 당나라 문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예를 말갈로 혼동하여 기록하였고, 이후 고대 문헌에서도 예가 말갈로 대체되었다.
2) 소서노의 죽음과 비류·온조의 분국(分國)
소서노는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사망한 후, 두 아들 비류와 온조는 고민에 빠졌다.
두 형제는 이렇게 의논하였다.
“서북쪽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고 있으니, 어머니와 같은 성덕이 없이는 이 땅을 지킬 수 없다. 차라리 새로운 땅을 찾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낫겠다.”
이에 두 사람은 오간과 마려를 비롯한 신하들과 함께 부아악(지금의 한양 북악산)에 올라가 도읍할 만한 땅을 살폈다. 비류는 미추홀을,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각각 새로운 도읍지로 삼으려 하였다.
오간과 마려가 비류에게 권하였다.
“하남 위례홀은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끼고 있습니다. 천혜의 지리 조건을 갖춘 곳인데, 왜 다른 곳을 고집하십니까?”
그러나 비류는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형제는 백성과 영토를 나누었다. 비류는 미추홀로, 온조는 하남 위례홀로 각각 떠나면서 백제는 동·서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온조의 재위 13년은 곧 소서노가 나라를 다스리던 마지막 해이며, 그 다음 해인 14년이 온조의 즉위 원년이었다.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천도 조서는 비류와의 의견 충돌 이후에 하남 위례홀로 옮긴 백성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는 기록은 비류와 온조가 백성을 나누어 각자의 도읍으로 이동한 사실을 나타낸다.
미추홀은 오늘날 ‘메주골’이라 불렸으며, 위례홀은 ‘오리골’(본래는 ‘아리골’)이라 불렸다. 오늘날에도 동쪽에 오리골, 서쪽에 메주골이 남아있으나 그 유래는 오래되어 정확히 알기 어렵다.
비류가 차지한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기 어려웠고, 결국 백성들은 흩어져 달아났다. 반면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고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 이에 비류는 자신의 선택을 부끄러워하며 병을 얻어 죽었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온조에게로 귀속되었다. 그리하여 나뉘었던 동·서 두 백제는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3) 온조의 마한 정벌
백제는 마한의 땅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웠기에, 소서노의 시대에는 마한에 예를 갖추어 공손히 대하였다. 사냥에서 잡은 사슴이나 노루, 전쟁에서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내며 신하로서의 예를 다했다.
그러나 소서노가 죽은 후, 온조는 서북쪽에서 예와 낙랑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패하(浿河)(지금의 대동강)에서 웅천(熊川)(지금의 공주)에 이르는 땅을 백제의 영토로 편입할 것을 요청하였다. 마한은 이를 허락하였고, 온조는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경계에 성책을 쌓았다.
이에 마한왕은 사신을 보내어 온조를 꾸짖었다.
“왕의 모자가 처음 남쪽으로 왔을 때 발 디딜 땅조차 없어 내가 서북 백 리의 땅을 떼어주어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이제 국력이 조금 강해졌다고 우리 땅에 성책을 쌓다니, 이는 의리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니냐?”
온조는 겉으로는 부끄러운 척하며 성책을 철거했으나, 측근들에게 말했다.
“마한왕의 정치는 이미 정도에서 벗어나 나라가 쇠약해졌다. 지금 취하지 않으면 이 땅은 결국 다른 이의 차지가 될 것이다.”
온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을 나가는 척하며 마한을 기습 공격하여 수도를 점령하였고, 마한의 50여 개 나라를 모두 정복하였다. 또한, 의병을 일으킨 주륵의 온 집안을 처형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후 기준은 남쪽으로 달아나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한(韓) 성을 사용하며 후손들에게 전하였으나, 결국 멸망하였다. 《삼국지》에서는 이를 두고 “준의 후예가 끊어져 마한 사람들이 다시 왕을 세웠다(準後滅絶 馬韓人 復自立爲王)”고 기록하였다.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 칭한 것은 중국인들이 백제를 마한으로 혼동하여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왕(劉留王)과 대주류왕(大朱留王)과 동시대 인물이었다. 이후 백제의 역사에서 낙랑의 침략 기록이 사라진 것은 대주류왕이 이미 낙랑을 정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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