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열국 쟁웅-한 무제의 침입
한나라 군대가 고구려에 패퇴한 9년 전쟁에 관한 기록
고조선이 남북으로 나뉘어 여러 나라가 분립하던 시기에, 한나라 무제의 침략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일시적인 정치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조선 민족의 문화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조선은 이두문을 사용하여 역사와 정치 제도를 기록하던 유일한 민족이었다. 조선은 종종 중국을 침략하거나 저항했고, 중국 역시 제(齊)·연(燕)·진(秦) 시대부터 조선을 방어하거나 침략해왔다. 그러나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일어난 뒤에는 북쪽 흉노의 침략에 시달렸다.
한나라 고조는 흉노의 모돈 선우를 공격하다가 백등(白登)에서 크게 패배한 후,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 세폐를 바치고 황녀를 모돈의 첩으로 보내야 했다. 이러한 굴욕은 그의 증손자인 무제에게 이어졌다. 무제는 야심만만한 제왕이었으며, 백여 년의 평화 끝에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공격해 선대의 수치를 씻고, 조선에 대해서도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무제의 침략 대상이 된 조선은 두 곳이었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와 『사기 평준서(平準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무제가 즉위한 후 몇 년 만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을 공격하여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으니, 연(燕)과 제(齊) 지역이 크게 소란해졌다.”
또한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筍彘)가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후자의 조선은 위만조선임이 분명하지만, 전자의 예맥조선에 대한 기록은 그 구체적인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사학자들은 예맥조선이 강릉에 있었던 나라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필자는 예맥조선이 동부여를 가리킨다고 본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기 전에 이미 동부여를 한나라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고구려와 9년 동안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 패퇴한 것이다.
이 주장은 여러 사료를 통해 입증된다. 『후한서(後漢書)』 예전(濊傳)에는
“한 무제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에 예의 남려왕이 반란을 일으켜, 우거(右渠)가 28만 호(戶)를 이끌고 요동으로 와 항복하자, 한나라는 그 땅에 창해군을 설치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서 본기(本紀)』에는
“원삭 3년(기원전 126년) 봄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이는 기존 학자들이 강릉을 예맥조선의 위치로 비정한 것과 모순된다. 동부여는 현재의 훈춘(琿春)과 함흥(咸興)에 위치했으며, 강릉과는 거리가 멀다. 강릉이 동부여의 위치로 오인된 것은 신라가 동북쪽 국경에서 잃은 고적들을 내지로 옮기면서 생긴 오해이다. 따라서 예맥조선은 함흥의 동부여였으며, 강릉과는 관련이 없다.
『식화지』의 기록에 따르면,
“무제가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팽오가 예맥조선을 쳤다.”
이는 창해군 설치가 무제 즉위 13년 후의 일이므로, ‘몇 년’이라는 표현에 맞지 않는다. 또 『한서 주부언열전(朱浮顔如列傳)』에는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에 이미 예주를 공략하고 창해군을 설치하려는 상소가 있었으므로, 창해군 설치는 원삭 원년이 아니라 그 이전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동부여와 한나라는 약 9년 동안 전쟁을 벌였고, 한나라는 여러 차례 패배했다. 그 결과 창해군을 폐지하고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 역사학자들이 전통적으로 패배의 기록을 숨기려 했기 때문이다. 『삼국지』 왕숙전(王肅傳)에 따르면, 사마천이 경제와 무제의 잘못을 기록했을 때 무제가 크게 분노하여 그의 기록을 삭제하고 사마천에게 궁형(宮刑)을 내렸다고 한다. 만일 한나라의 패배를 기록했다면 그는 더 큰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사기』와 『한서』에 등장하는 예맥조선에 대한 기록은 왜곡되었으며, 팽오가 예맥조선을 멸망시켰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 팽오는 오히려 고구려에 패퇴한 것이다.
고구려와 한나라의 9년 전쟁에서 싸운 이는 대주류왕, 즉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이다. 그러나 고구려 본기는 연대를 축소해 대주류왕을 한나라 광무제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 기록했다. 또한 한나라가 낙랑국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대주류왕의 업적을 왜곡하여 중국의 기록과 맞추기 위한 허구이다.
한무제가 위씨 조선을 정복한 과정
한무제는 동방의 조선을 침략하여 위씨 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해 긴 세월 동안 다양한 전략을 동원하였다. 앞서 9년 동안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한동안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지 못했으나, 그는 동방을 정복하려는 야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특히, 위씨 조선은 조선 여러 나라 중 하나였으나 그 왕조의 기원이 중국에서 비롯되었고, 주요 관리들 또한 중국 출신이나 망명자의 후손들이었기에, 한무제는 그들을 매수하여 조선의 나머지 지역을 잠식하는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섭하의 사신 파견과 위씨 조선과의 갈등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사신 섭하(涉何)를 위씨 조선에 파견하여, 한나라와 동부여 사이의 사절단이 위씨 조선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요구를 전달하였다. 한편으로는 위씨의 국왕 우거(右渠)를 한나라의 위엄과 금은보화로 회유하려 했으나, 우거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섭하는 귀국 길에 위씨 조선의 국경인 패수(浿水)에서 우거가 보낸 사절을 습격해 살해하고, 이를 자신이 우거의 부왕을 죽인 것처럼 보고하였다. 이에 한무제는 진위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우거는 이 사건을 크게 분개하여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공격하여 죽였다.
한무제의 대규모 침공
이 사건을 빌미로 한무제는 좌장군 순체(荀彘)에게 보병 5만을 이끌고 패수로 진격하게 하고, 누선장군 양복(楊僕)에게는 병선 7천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열수(洌水)로 진입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양복의 군대는 열구(涅口)에서 상륙을 시도하다가 큰 패배를 당하고 산으로 퇴각하여 잔여 병력을 수습하였다. 순체 역시 패수를 건너려 했으나, 위씨 조선의 군사들이 강력히 저항하여 진군이 막혔다.
한무제는 두 장군이 모두 실패하자 사신 위산(衛山)을 파견해 우거의 신하들을 매수하였다. 위씨 조선은 원래 중국에서 망명한 자들과 조선의 도적들이 모여 이루어진 나라이기에, 많은 관리들이 충성심보다는 금전적 이익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이로 인해 위씨 조선의 신하들은 전쟁을 주장하는 파와 화평을 주장하는 파로 나뉘어 갈등을 벌였다. 한나라의 금은보화가 뿌려지자 화평파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고, 우거에게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 화해를 시도하라는 압박이 가해졌다.
우거는 태자를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보내겠다고 했으나, 한나라 장군은 무장하지 않은 1만의 병사를 보내라고 요구하며 대립이 이어졌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었고, 한나라는 다시 공격을 감행하였다.
내부의 배신과 위씨 조선의 멸망
한무제는 더욱 많은 금은보화를 보내어 우거의 주요 신하들을 매수하였다. 우거의 재상 노인(路人), 한음(韓陰), 삼(參), 그리고 대장 왕겹(王歙)은 점차 한나라에 내통하며 전쟁을 방관하였다. 순체는 패수를 건너 위씨 조선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의 서북쪽을 공격하였고, 양복은 산에서 내려와 동남쪽을 공격하였다.
한무제는 협상 실패와 두 장군의 패배에 분노하여 위산을 처형하고,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파견하여 두 장군을 감독하게 하였다. 공손수는 순체의 편을 들어 양복을 가두고 그의 군사를 순체에게 합류시켜 전투를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한무제는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결국 위씨 조선의 내부에서 배신이 발생하였다. 한음과 왕겹은 한나라에 항복하였고, 재상 삼은 우거를 암살하고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에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삼을 공격하였으나, 우거의 아들 장(藏)이 삼에게 가담하고 노인의 아들 최(崔)와 연합하여 성기를 죽였다. 그들은 성문을 열고 한나라 군을 받아들였고, 위씨 조선은 멸망하였다. 한무제는 그 땅을 나누어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 낙랑(樂浪)**의 네 군(郡)을 설치하였다.
사마천의 역사적 기록
위씨 조선의 멸망 과정은 사기 조선열전에 의존하고 있으나, 사마천은 한나라가 위씨 조선을 정복하는 데 금은보화를 사용한 사실을 명확히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사마천이 당시의 정치적 압박 속에서 진실을 온전히 기록할 수 없었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은유적으로 한나라의 전략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사마천은 위만이 병력과 재물로 이웃을 정복했다고 기록하면서, 한무제가 위씨 조선을 정복한 방식 역시 병력보다는 재물로 매수하여 성취한 것임을 비꼬았다. 또한, 위산과 공손수가 이유 없이 처형된 것을 기록한 것은 한무제가 병력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금은보화로 겨우 위씨 조선을 멸망시킨 것에 대한 불만을 나타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씨 조선이 멸망한 후 봉후의 작위를 받은 자들은 한나라의 장군이 아닌, 위씨 조선의 배신자들이었다. 이는 위씨 조선의 멸망이 한나라의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내부의 배신과 금전적 유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한사군의 위치와 고구려와의 관계에 대한 현대적 해석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한(漢)나라가 진번(眞番)·임둔(臨屯)·현도(玄菟)·낙랑(樂浪) 네 군(郡)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들 사군(四郡)의 위치는 조선사 연구에서 큰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위만조선의 중심지로 알려진 만번한(滿番汗)·패수(浿水)·왕검성(王儉城) 등이 현재 만주(滿洲)의 해성(海城)과 개평(開平) 일대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당시의 지리적 배경을 살펴보면 지금의 개원(開原) 북쪽은 북부여국(北扶餘國), 흥경(興京) 동쪽은 고구려(高句麗), 압록강 남쪽은 낙랑국(樂浪國), 함경도와 강원도는 동부여국(東扶餘國)이었다. 따라서 한사군은 이들 네 나라를 제외한 요동반도 안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사군의 위치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지명에 대한 오해와 혼동
지명의 동일성과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점이 첫 번째 원인이다. 예를 들어, 패수와 낙랑은 모두 ‘펴라’로 읽을 수 있으며, 이는 지금의 대동강(大同江)과 평양(平壤)을 의미한다. 당시 대동강은 ‘펴라’라는 강으로, 평양은 ‘펴라’라는 수도로 불렸다. 이는 현대 청주(淸州)의 ‘까치내’라는 물과 그 옆 마을이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유사하다.
패수(浿水)의 ‘패(浿)’는 ‘펴라(浿羅)’의 앞 음절 ‘펴’를, 수(水)는 뒷 음절 ‘라’를 따온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낙랑(樂浪)·평나(平那)·백아강(白雅江)도 모두 ‘펴라’로 해석할 수 있다.
한무제(漢武帝)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신(辰)·말(末) 두 조선의 지명을 위만조선의 지명으로 대체하였다. 예컨대, 해성의 헌우란(獻于蘭)은 본래 ‘알티(安地)’라 불렸으나 이를 패수로 변경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은 변경된 지명을 기반으로 사군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이로 인해 사기(史記)에는 “한나라가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漢興---退以浿水爲界)”거나 “위만이 패수를 건넜다(滿東走出塞漢浿水)”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진번(眞番)은 신(辰)·불(不) 두 조선을 통칭한 것이며,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이러한 지명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패수와 진번을 사군의 실제 지명으로 오인하였다. 또한 헌우란 패수와 대동강 패수, 진번이라는 나라와 한(漢)의 진번군을 혼동하여 오류를 범했다.
2. 기록의 진위와 위서(僞書)
사서(史書)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지 못한 점도 혼란의 원인이다. **한서(漢書) 무제본기(武帝本紀)**에 따르면, 진번군의 군치(郡治)는 삽현(歃縣)이며 장안(長安)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 임둔군은 동이현(東耳縣)으로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이 담긴 **무릉서(茂陵書)**는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기(史記)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17년에 사망하였다. 이는 진번·임둔군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보다 10년 앞선 시점이다. 따라서 무릉서는 위서일 가능성이 크며, 그 안의 지리 정보는 신뢰할 수 없다.
또한, **한서 지리지(地理志)**에는 요동군 외에 현도군과 낙랑군의 위치가 따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위략(魏略)**에 따르면 만번한(滿番汗)은 요동군의 번한현(番汗縣)이며, 사기에서 언급한 패수 역시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로 확인되므로, 지리지의 기록은 후세에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3. 사군 설치의 가상성
사군은 본래 특정한 지리적 구획이 아니라 한나라의 가상적인 설정이었다. 즉, 고구려를 점령하면 진번군을, 북동부여와 북옥저를 점령하면 현도군을, 남동부여와 남옥저를 점령하면 임둔군을, 낙랑국을 점령하면 낙랑군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무제는 이 가설을 실현하고자 기원전 108년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전쟁이 끝났다. 한나라는 패배하였고, 진번·임둔 두 군은 폐지되었다. 현도군과 낙랑군은 요동군 내로 편입되었으며,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소제(昭帝)가 진번·임둔을 폐지하고 낙랑·현도로 통합하였다.
고구려와 한의 관계
고구려는 낙랑국과 남동부여가 한나라와 밀접히 교류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한나라는 요동에 현도군과 낙랑군을 설치하여 두 나라와의 교섭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필요할 경우 이들을 이용해 고구려를 공격하려 했다. 반면 고구려는 두 나라가 한과 교류할 때마다 군사를 동원해 응징하였다. 이로 인해 수백 년 동안 고구려와 한 사이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었다.
결론
일본 학자들이 낙랑 고분에서 한대(漢代) 연호가 새겨진 유물을 발견하고 대동강 남쪽이 낙랑군의 군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남낙랑이 한과의 교류를 통해 수입한 것이거나 고구려가 전쟁에서 노획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러한 유물만으로 대동강 일대가 낙랑군의 군치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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