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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조선 구사의 결점

 

역사는 오로지 역사 자체를 기록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 외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역사는 사회의 움직임과 그로부터 발생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며, 저술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거나 추가하거나 수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가가 사람의 초상화를 그릴 때, 연개소문을 그린다면 그의 장대한 모습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을 그린다면 왜소한 체구를 그려야 한다. 만약 이 두 사람의 특징을 억지로 바꾸거나 섞어 그리게 되면, 이는 화가의 본분에 어긋날 뿐 아니라 본래 인물의 모습을 왜곡하는 것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로 사실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영국사를 쓴다면 그것은 영국사가 되어야 하고, 러시아사를 쓴다면 그것은 러시아사가 되어야 하며, 조선사를 쓴다면 그것은 조선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지금까지 진정한 조선사가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면서, 내란과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조선의 옛 역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조선사의 손실이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보다도, 오히려 역사를 기록한 사가들에 의해 더 많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역사라는 것은 시간, 장소, 인물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바탕으로 사회의 발전을 기록해야 하는데, 그 중요한 요소들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라는 박, 석, 김 세 성씨와 여섯 부의 사람들뿐 아니라, 경상도라는 지리적 장소와 고구려와 백제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만약 이 조건 중 하나라도 변했다면, 예를 들어 신라가 2000년 전 왕검과 같은 시대에 존재하거나, 2000년 후인 현대에 존재했다면, 아무리 박혁거세와 육부의 사람들이 그대로 있었더라도 당시와 같은 신라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신라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위치했더라도 그 역시 당시의 신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시간, 장소, 인물의 조화는 역사 서술에서 필수적인 요소인데, 기왕의 조선 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을 자신들의 신념에 맞추어 왜곡하고, 존재하지 않는 지명을 억지로 끌어다 사용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시발지인 졸본을 성천이나 영변으로 옮겨 놓고, 안시성을 용강이나 안주로 옮기며, 단군이 나라를 옮겼다는 아사산을 황해도의 구월산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또 신라의 초기 수도인 가슬라를 강원도의 강릉으로 잘못 옮긴 예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단군 시대에 인도의 범어식 지명과 인명을 넣었으며, 유교 사가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속에서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도용하여 삼국사의 기록을 유교적인 윤리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그 결과, 조선 전역에서 수백 년 동안 민심을 지배했던 영랑, 술랑, 안상, 남석행 같은 인물의 논설은 삭제되었고, 최치원과 같은 중국 유학파 인물만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이처럼 시간적 맥락을 무시한 역사 서술은 결국 특정 사상의 틀 안에 역사를 가두게 되었다. 심지어 사람까지 속여 신라의 금관왕을 인도의 왕족이라고 왜곡했으며, 고구려의 주몽을 중국 신화 속 고신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조선 사상의 중요한 원천이었던 서운관의 책들을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불태우기도 했다.

이두형은 최근 전기나 묘지명을 보면, 모든 주인공이 용모가 단정하고 덕성이 뛰어나며, 학문은 정주를 따르고 문장은 한유를 숭상하는 등 천편일률적인 특징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는 개인 전기의 사실성을 잃었다는 개탄이지만, 조선사를 기록한 사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삼국 시대의 다양한 풍속과 문화를 기록하기보다는 유교적 관점에서 과거를 해석했고, 이조 시대의 문약한 사고방식으로 상고지리를 왜곡하기도 했다. 그 결과, 조선, 부여, 삼국, 동북국, 고려, 조선 5천 년의 역사가 한데 뒤섞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민 사상의 차이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얼굴에 있는 혹을 그대로 그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화가의 아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조선 사가들은 조선사의 혹을 제거하려 했으며, 오히려 조선의 눈, 귀, 코를 잘라내고, 다른 곳에서 불필요한 혹을 가져와 붙였다.

기존의 조선사는 조선인이 읽어도, 외국인이 읽어도 왜곡된 역사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탕으로 바른 조선사를 쓸 수 있을까? 이는 사금을 캐는 것과 같아서, 모래 한 말 속에서 좁쌀만 한 금을 찾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사를 연구하려면 만주와 조선의 땅을 발굴해 새로운 사료를 발견해야 하며, 금석학, 고전학, 지리학, 미술학, 계보학 등의 학문이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이 맞는 말이지만, 현재로서는 기존에 남아 있는 사료들을 비교하고, 잘못된 점을 수정하며, 조선사 연구의 앞길을 개척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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