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옛 역사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조선 역사에 관한 기록의 흐름과 문제점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을 찾으려면 '신지(臣智)'라는 인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지는 권벽(權擘, 조선 선조 때 인물)의 응제시(應製詩)에 등장하는 인물로, 단군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사관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신지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수두(蘇塗)라는 제사장의 직위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수두 대제에서 신지들은 우주의 창조, 조선의 건설, 산천 지리, 그리고 후세가 배워야 할 교훈을 노래로 전하곤 했다. 이 노래들은 후대의 문인들에 의해 이두문으로 편집되거나 한자로 번역되어 왕궁에 보관되었고, ‘신지비사(臣智秘史)’또는 ‘해동비록(海東秘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려 시대의 역사 기록과 사대주의의 영향
고려 시대에는 삼한고기, 해동고기, 삼국사와 같은 역사서들이 있었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도 등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이다. 왜 나머지 기록들이 사라졌는지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김부식과 일연의 저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고려 초부터 시작된 사상적 갈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고려 초에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북쪽의 옛 영토를 되찾자는 화랑의 무사파와, 사대(事大)를 국시로 삼아 압록강 이남에서 안정을 추구한 유학파가 대립했다. 이 두 파가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묘청이 화랑의 북벌 사상을 음양설과 결합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유교를 따르던 김부식에게 패배하였다. 김부식은 이후 사대주의를 근간으로 삼국사기를 집필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 문화의 기원인 부여와 발해를 역사에서 배제하고, 사건을 왜곡하거나 중복되게 기록하였다.
고려 멸망과 역사서의 소실
고려가 몽골에 패배한 이후, 많은 역사 기록들이 소실되었다. 몽골의 압박 속에서 독립과 자존을 담은 문헌은 금기시되었고, 결국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이 살아남았다. 이후 고려 말에 쓰인 기록들은 몽골의 눈치를 보며 자국의 역사를 축소하거나 왜곡한 내용이 많았다. 이러한 기록들이 조선 시대 정인지가 편찬한 고려사의 기초가 되었다.
조선 태조와 태종은 몽골의 압박을 받은 고려 말의 기록을 토대로 역사를 정리하였으며, 실제로 중요한 역사서들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이후 세조는 북벌을 준비하며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깨닫고 동국병감과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으나, 여전히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 후기의 역사 연구와 한계
조선 후기에는 몇몇 학자들이 독창적인 역사 연구를 시도했다. 허목은 단군과 신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독특한 견해를 담았다. 유형원은 역사 전문 저서는 없었으나, 반계수록에서 정치 제도를 논하여 사학에 기여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조선 역사 지리학의 기반을 마련했고, 이후 정약용, 한진서, 안정복등의 연구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일부 역사서들은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문헌을 방대하게 인용했지만, 중요한 국제적 사건이나 민족의 흐름을 놓쳤다.
역사 기록의 한계와 문제점
조선의 역사 기록은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 사적인 역사 기록 금지: 조선 초에는 관에서 간행한 몇몇 역사서 외에는 개인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역사 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 전 왕조의 역사 말살: 새 왕조가 세워질 때마다 이전 왕조의 역사와 유적을 파괴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로 인해 삼국과 고려의 유적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 기록의 부실: 조선의 관료들은 임금의 말과 행동을 정확히 기록하지 못해 역사적 자료가 부족했다. 국문이 도입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역사서는 한문으로만 기록되었다.
- 역사적 단절: 조선 시대 학자들은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의 생활과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한 단절은 역사 연구의 연속성을 방해하였다.
결론: 새로운 역사관의 필요성
조선 후기에는 당파 싸움이 극심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역사 기록이 활성화되었다. 한백겸, 안정복, 이종휘, 한치윤과 같은 사학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배경 덕분이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는 여전히 주자학과 사대주의적 관점에 얽매여 있었으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에는 미흡했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학술적 공헌의 크고 작음을 평가하며, 민족의 자주성과 문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해석해야 한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