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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관한 참고

 

만약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대답이 매우 어렵지만 우선 나의 경험부터 말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에 국권 상실의 치욕에 분노하여 처음으로 동국통감을 읽으면서 사평체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어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표했고, 이어서 수십 명의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중국식 연의체를 본뜬 것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년사라는 것을 집필하다가, 두 가지 모두 사고로 인해 중단하고 말았다. 그 논평의 독단적이었음과 행동이 대담했음을 지금까지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만, 그 이후로 얼마간 분발하여 노력한 적도 있었으나 진전이 미미했던 원인을 오늘에 와서 국내 일반 역사학계에 호소하고자 한다.

첫째, 옛 비석의 참조에 대하여 말하겠다.

일찍이 사곽잡록을 읽다가 "신립이 선춘령 아래에 고구려의 옛 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몰래 사람을 보내 두만강을 건너가서 탁본을 떠왔는데, 알아볼 만한 글자가 300여 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 글에서 황제라고 한 것은 고구려 왕이 스스로를 일컬은 것이며, 그 상가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대신을 일컬은 것이었다."라는 구절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만주 깊은 산중에 천년 고사의 빠진 부분을 보충할 만한 비석 조각이 이것 하나뿐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해외에 나간 날부터 고구려와 발해의 옛 비석을 답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매우 깊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에게서 그 항로 중에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에 우뚝 서 있는 윤관의 기공비를 보았다는 이야기와, 봉천성에서 간접적으로 이통주를 유람했다는 사람이 그 고을 동쪽 70리에 남아있는 부여의 왕 해부루의 송덕비를 보았다는 이야기와, 발해의 옛 수도에서 온 친구가 폭이 30리인 경박호의 앞쪽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견줄 만한 1만 길 비폭을 구경했다고 하는 말과, 해룡현에서 나온 나그네가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의 세 섬을 가라앉히겠노라고 한 문무대왕의 유묘를 참배했다는 이야기 등은 나에게는 귀로 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한번은 네댓 명의 친구와 함께 압록강 위의 집안현, 즉 고구려 제2의 환도성을 잠깐 보았는데, 이는 나의 인생에서 기념할 만한 장관이었다. 그러나 여비가 부족하여 능묘가 모두 몇 기인지 세어볼 여유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 기이고, 묘가 1만 기 내외라는 추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이 주는 댓잎에 그린 금척과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박아서 파는 광개토왕 비문의 값만 물어보았으며(깨어진 그 땅 위에 나온 부분만), 수백의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남아있는 8층 석탑, 사면이 네모진 광개토왕릉과 그 오른편의 제천단을 붓으로 대강 그려서 사진을 대신했고, 그 왕릉의 넓이와 높이를 발로 재고 몸으로 견주어서 자로 재는 것을 대신했을 뿐이었다.

(높이는 10길 가량이고, 아래층의 둘레는 80발인데, 다른 왕릉은 위층이 파괴되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층의 둘레는 대개 광개토왕릉과 같았다.) 왕릉의 위층에 올라가 돌기둥이 섰던 자취와 덮은 기와의 남은 조각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 후한서에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이해했다. '수백 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발굴해볼 수 있을 것이고,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발굴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데'라는 꿈같은 생각만 했다.

아! 이와 같은 천장된 비밀의 보고를 만나고서도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와 물력이 없으면 자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으로도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의 면모가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 항주 도서관에서 우리나라 금석학자 김정희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중국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을 보니,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조와 풍속의 참고가 될 것이 많았고, 한성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도 그 조사한 동기의 부적절함이나 주해의 억지스러운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미한 서생의 손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자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둘째, 각종 서적의 상호 증명에 대하여 말하겠다.

일찍이 고려 최영전에 의하면, 최영이 "당나라가 30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 3만을 내어 이를 크게 물리쳤다"고 했으나, 삼국사기 50권 중에는 이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의 고려도경에 "재가한 화상은 가사도 입지 않고 계율도 행하지 않으며, 흰 천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도로의 청소, 도랑의 개척, 성벽의 수축 등 공사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거란도 이들에게 패했으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았으므로 이웃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으로 승군의 면모를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유래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없지 않다.

통전과 신당서 등 유명한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이라는 관직명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를 연나조의라 했으며, 후주서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이라고 했으니, '선인'이란 글자는 모두 우리말 '선인'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고, '조의' 혹은 '백의'란 고려도경에서 말한 흰 천으로 허리를 동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선인은 신라 고사의 국선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의 단장이요, 승군은 국선 아래 딸린 군사이며, 승군을 재가한 화상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하면서, 그 근원을 물으니 복역한 사람이라는 추측성 해석을 해준 것이다. 이로써 고려사를 통해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으로 인해 고려사에 자세하지 않은 승군의 성격을 알게 되고, 통전, 신당서, 후주서와 신라의 고사 등을 통해 승군과 선인과 재가의 화상이 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말하면 당나라의 30만 침입군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에게 크게 패했다는 몇십 자의 간단한 역사를 6, 7가지 서적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써 비로소 알아낸 것이다.

셋째,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다쳤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이 매번 이것을 역사에 기록하는데, 이색의 정관음에도 "어찌 현화가 백우에 떨어질 줄 알았으리"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했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국인의 신구당서에는 보이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린다면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눈을 다친 사실을 중국의 사관이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했다.

송나라 태종이 거란을 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도망쳐 돌아가서, 몇 해 후에 결국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송사나 요사에는 보이지 않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이 고증하여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나는 중국인들이 그들의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 패하여 다치거나 죽은 경우, 그것을 나라의 수치라 여겨 숨기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서 나의 앞선 가설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중국인에게 국가적 수치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고 해서 당나라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다쳤다는 실증이 되지는 못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에 태종이 정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했다고

했고, 유박전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이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했다고 했으며, 본기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않아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 23년 5월에 죽었다고 했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목에는 이질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고 했고, 자치통감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했다.

대개 높은 이와 친한 이의 불명예스러운 일을 꺼려 숨겨서, 주천자가 종후의 화살에 맞았음과 노나라의 은공과 송공 등이 살해당하고 쫓겨났음을 춘추에 쓰지 않았는데, 공자의 이러한 편견이 중국 역사가들의 버릇이 되어, 당나라 태종이 이미 잃은 눈을 유리로 가리고, 그의 임상 병록의 기록을 모두 다른 말로 바꾸어놓았다. 

화살의 상처가 내종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으로 되어 전쟁의 부상으로 인해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없애버려서, 위나라 군대를 격파한 사법명과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을지문덕이 도리어 중국의 역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전해졌으니(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중국사에서 인용한 것이므로 그 논평에서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 했다),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음이 고구려의 전쟁사에서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임에도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린 것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태종의 눈을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해결함에 있어서 - 진정의 야산묵담에서 같은 종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자의 춘추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와 통감강목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고 은미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 병록(이질 등) 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밝혀내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의 신뢰성을 실증하고, 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의 패전과 부상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 3년에 안시성에서 눈을 다치고 도망하여, 돌아가서 당시 외과 의사의 불완전한 치료로 거의 30개월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이 수십 자를 얻기 위해서도 5, 6종의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읽어보고 들며 나며 혹은 무의식중에 얻고 혹은 무의식중에 찾아내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않았다.

승군의 내력을 모르면 무엇이 해롭고 당태종이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이 이롭겠느냐고 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러나 역사학이란 것은 하나하나를 모으고 잘못 전하는 것을 바로잡아서 과거 인류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깨우쳐주는 것이니, 승군 즉 선인군의 내력을 모르면 단지 고구려가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뒤따른 명림답부의 혁명군의 중심과 강감찬이 거란을 격파한 군대의 주력이 다 무엇이었는지 모르고, 따라서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의 1천여 년 군제상 중요한 점을 모를 것이며, 당태종이 눈을 잃고 죽은 줄을 모른다면 안시성 전투가 속히 결말이 난 원인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라와 당나라가 연맹하게 된 배경이요, 당나라 고종과 그 신하들이 모든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요,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손을 맞잡게 된 동기였음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위에 든 것은 그 한두 예일 뿐이고, 이 밖에도 이와 같은 일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사의 황무지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한두 사람의 힘으로 단시일에 완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넷째, 각종 명사의 해석에 대하여 말하겠다.

우리나라는 고대 페니키아인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가져다 알파벳을 만든 것처럼 한자를 가져다가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그 초창기에는 한자의 음을 딴 것도 있고 혹은 그 뜻을 딴 것도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사람의 이름으로는, '소지, 일명 비처'라 함은 '빛'의 뜻이 소지가 되고 음이 비처로 된 것이요, '소나, 일명 금천'이라 함은 뜻이 금천, 음이 소나로 된 것이요, '거칠부, 일명 황종'이라 함은 '거칠위'의 음이 거칠부, 뜻이 황종으로 된 것이요, '개소문, 일명 개금'은 '신'의 음이 소문, 뜻이 금으로 된 것이요, '이사부, 일명 태종'은 '잇위'의 음이 이사부, 뜻이 태종(훈몽자회에 '笞'를 '잇'으로 읽음)으로 된 것이다.

지명으로는 '밀성, 추화라고도 함'은 '밀무'의 음이 밀성, 뜻이 추화로 된 것이요, '웅산, 공목달이라고도 함'은 '곰대'의 뜻이 웅산, 음이 공목달로 된 것이요, '계립령, 일명 마목령'이라 함은 '저름'의 음이 계립, 뜻이 마목으로 된 것이요, '모성, 막성이라고도 함'은 '어미'의 뜻이 모, 음이 막으로 된 것이요, '흑양, 금물노라고도 함'은 '거물라'의 '거물'의 뜻이 흑, 음이 금물로 된 것이요, 양과 노는 다 '하'의 음을 취한 것이다.

관명으로는 '각간을 혹은 발한이라 함'은 '불'의 뜻이 각, 음이 발로 된 것이고, 간과 한은 다 '한'의 음을 취한 것이나, 불한은 군왕을 일컬음이요, '누살을 혹 도사라 함'은 '라'의 뜻이 도, 음이 누로 된 것이고, '살'의 뜻이 사, 음이 사로 된 것이니, '라살'은 지방장관을 일컬음이요, '말한', '불한', '신한'은 삼신에서 근원한 것인데, 뜻으로는 천일, 지일, 태일이 되고, 음으로는 마한, 변한, 진한이 된 것이요, '도가', '개가', '크가', '소가', '말가'는 다 대신의 칭호인데, '도, 개, 크, 소, 말' 등은 뜻으로, '가'는 음으로 저가, 구가, 대가, 우가, 마가로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질구레한 고증이 무슨 역사상의 큰 일이 되는가? 이것은 자질구레해 보이지만 지지의 잘못도 이로써 바로잡을 수 있고, 사료의 의혹도 이로써 보충할 수 있으며 고대의 문학에서부터 모든 생활 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해모수와 유화왕후가 만난 압록강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지금의 압록강이라고 하면 당시 부여의 수도인 합이빈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곳이라면 달리 또 압록이 없어서 그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첫 걸음으로 광개토호태왕의 비에서 지금의 압록강을 아리수라고 했음을 보고 압록이라는 이름이 '아리'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두 번째로 요사에서 '요흥종이 압자하를 혼돈강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것을 보고 '압자가 곧 아리인즉, 혼돈강 즉 송화강이 고대의 북압록강인가?'하는 가설을 얻었고, 다음에 동사강목고이에서 삼국유사의 '요하 일명 압록'과 주희의 '여진이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하였다'고 한 것을 들어 '세 압록이 있다'고 했음을 보고 송화강이 고대에 한 압록강이었음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가 만난 압록강이 곧 송화강임을 확실히 했다.

마한전에서 '비리'를 건륭제의 삼한정류에서는 만주의 패륵과 같은 관명이라고 했으나, 나는 생각하기를 삼한의 비리는 삼국지리지 백제의 부리이니, 비리나 부리는 다 '울'의 취음이요, 도회의 뜻이다. 마한의 비리와 백제의 부리를 참조하면, 마한의 벽비리는 백제의 파부리요, 여래비리는 이릉부리요, 모로비리는 모량부리요, 감해비리는 고막부리요, 초산도비리는 미동부리요, 고랍비리는 고막부리이니, 비록 이 음과 저 뜻이 이역이 있기는 하나 그 대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이 관중과 싸우던 때에 중국 산서성이나 영평부에 비이의 계를 두었으니, 비이는 비리 곧 '울'의 번역이다. 이로써 조선 고대의 '울'이 곧 산해관 서쪽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질구레한 고증이 역사상의 큰 일이 아닌 것 같지만 도리어 역사상의 큰 일을 발견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훈몽자회, 처용가, 훈민정음 등에서 옛말을 연구하고, 삼국유사에 씌어있는 향가에서 이두문의 용법을 연구하면 역사상 수많은 발견이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일찍이 이에 주목한 바 있었는데, 해외에 나간 뒤로부터는 한 권의 책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10년 동안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또한 얻어볼 수 없었다.

다섯째, 위서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 말하겠다.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조선 태종의 분서와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만든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서 천부경, 삼일신고 등이 처음 출현했을 때 누구의 반박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것 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구별에 애쓸 필요가 없지만, 우리와 이웃해 있는 중국과 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류가 빈번했음에 따라 우리 역사에 참고될 책이 적지 않으나, 위서가 많기로는 중국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말아야 할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용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렇지만 그 가짜에도 구별이 있다. 하나는 가짜 중의 가짜이니, 예를 들면 죽서기년은 진본이 없어지고 위작이 나왔음을 앞에서 이미 말했거니와, 옛날 사학가들이 늘 고기의 '단군은 요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섰다'고 한 글에 의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 임금의 연대에 비교하고자 하며, 요 임금의 연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에 의존한다.

그러나 주소(주공과 소공)의 공화(왕이 달아나고 주공과 소공이 의논하여 정치를 행한 14년) 이전의 연대는 중국 역사가의 대표라 할 만한 사마천도 알지 못하여 그의 사기연표에 쓰지 못했거늘, 하물며 그보다도 더 오래된 요 임금의 연대이겠는가. 그러므로 속강목은 다만 가짜 죽서기년에 의거하여 적은 연대이니, 이제 속강목에 의거하여 고대의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연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공안국의 상서전에 '구려 한맥'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고구려와 삼한이 중국의 주무왕과 교류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 공자세가에 "안국이 지금의 황제의 박사가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으니, '지금의 황제'는 무제이다. 무제를 '지금의 황제'라고 한 것은 사마천이 무제가 죽어서 무제라는 시호를 받은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고, 안국을 일찍 죽었다고 한 것은 사마천이 생전에 안국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공안국은 사마천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은 무제보다 먼저 죽었음이 명백한데, 상서전에는 무제의 아들인 소제 시대에 창설한 금성군이란 이름이 있으니, 공안국이 그가 죽은 뒤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 만한 점쟁이라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상서대전이 위서임이 또한 분명하고 거기 기록된 구려·한맥 등도 당연히 신빙성이 없는 것임이 밝혀질 것이다.

다음은 진짜 중의 가짜인데,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면,

첫째는 본서의 위증이니,

초학집, 유학집 등은 전겸익이 저술한 실제로 있는 것이지만, 그 글 가운데 씌어 있는 우리나라에 관한 일은 대개 전겸익의 위조이고, 실제로 없는 것이 많으니, 이런 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 역사에 그것을 반박할 확실한 증거들이 있지만, 만약 우리 역사의 반박할 자료가 없어지고 그들의 거짓 기록만 전해진 것이 있다면 다만 가설로 부인하는 것만으로는 안 될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할까? 옛날에 장유가 사기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 것을 바로잡는데, 첫째로 상서에 "나는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한 말을 들어 기자가 이미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으니, 무왕의 봉작을 받았을 리가 없다고 했고, 둘째로 "기자가 조선으로 몸을 피하였다"고 한 것을 들어 반고는 사마천보다 성실하고 정밀한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기자의 봉작설을 빼버리고 봉작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는 인증이다.

삼국 이후 고려 말엽 이전(몽고 침입 이전)에 우리나라 형세가 강성하여 중국에 대하여 전쟁으로 맞설 때도 그들에게 보낸 국서에서 우리를 낮추어 쓴 말이 많이 있었거니와, 그들은 다른 나라가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내조라고 썼음은 중국인의 병적인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는 근세 청나라가 처음 서양과 교류할 때 영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가 와서 통상한 사실을 모두 "해당 나라가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쳤다"고 썼음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니, 그들의 기록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또한 중국인이 만든 열조시집, 양조평양록 등 시화 가운데 조선 사람의 시를 실을 때 대담하게 한 구절 한 줄을 고쳤음을 볼 수 있으니, 우리의 역사를 적을 때에도 글귀를 고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몽고의 위력이 우리나라를 뒤흔들 때, 우리의 악부와 사책을 가져다가 황도, 제경, 해동천자 등의 글귀를 모두 고친 사실이 고려사에 보였으니, 그 고친 기록을 바로잡지 못한 삼국사기, 고려사 등도 중국과 관계된 문제는 실제의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사증이다.

얼마 전에 김택영의 역사집략과 장지연의 대한강역고에서, 일본의 신공여주 18년에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과, 수인주 2년에 임나부를 설치했다는 것을 모두 일본서기에서 그대로 가져다가 적고 그 박식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신공 18년은 신라 내해왕 4년(서기 199년)이요, 내해왕 당시에는 신라가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별로 없었을 터인데, 이제 내해왕이 아리나례를 가리키며 맹세했다는 것이 무슨 말이며, 수인주는 백제와 교류하기 이전의 일본의 임금이니, 백제의 봉직도 받지 않은 때인데, 수인주 2년에 임나국 사람에게 붉은 비단 2백 필을 주었다는 것은 어떻게 된 말인가?

이 두 가지 의문에 답하기 전에 그 두 사건의 기사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것이 이증이다. 이렇게 고인의 위증을 인으로, 사로, 또 이로 증명하여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둘째는 후세 사람의 위증이니,

원서에는 본래 거짓이 없었는데 후세 사람이 문구를 보태어 위증한 것이다. 마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 하여, 그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남사, 북사 등에 보인 조선에 관한 사실을 가져다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안사고 등으로 하여금 곡필을 잡아 고치고 보태고 바꾸고 억지로 주를 달아서, 사군(낙랑, 임둔, 진번, 현토)의 연혁이 가짜가 진짜로 되고, 역대 두 나라의 국서가 더욱 본래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증거는 본편 제2장 지리연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가짜 가운데 진짜니, 예컨대 관자와 같은 것은 관중의 저작이 아니고 중국 육국 시대의 저작인 위서이나 조선과 제나라의 전쟁은 도리어 그 실상을 전한 것이니, 위서이면서도 진서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다섯째, 만주, 몽고, 토이기 여러 종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이다.

김부식은 김춘추, 최치원 이래의 중화주의의 결정체니,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에 "고주몽은 고신씨(고대 중국 5제의 한 사람)의 후예다", "김수로는 금천씨(황제의 아들 소호)의 후예다", "진한은 중국 진나라 사람이 동쪽으로 온 것이다"라 하여, 언어나 혈통이나 골격이나 종교나 풍속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중국인을 동족으로 보아, 진실을 말살하는 데 편견을 더한 잘못된 붓을 놀린 이후로 그 편벽된 견해를 간파한 이가 없었으므로, 우리 부여의 계통이 분명치 못하여 마침내는 조선사의 위치를 캄캄한 구석에 둔 지가 오래되었다.

언젠가 필자가 사기 흉노전을 보니, 삼성의 귀족이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이 있음이 고려나 백제와 같으며, 5월의 제천이 마한과 같고, 무기일을 숭상함이 고려와 같으며, 왕공을 한이라 함이 삼국의 간과 같고, 벼슬 이름 끝 글자에 '치'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의 '지'와 한지의 '지'와 같으며, '후'를 '알씨'라 함이 곧 '아씨'의 번역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겼다.

인축을 회계하는 곳을 담림 혹은 대림이라 함이 '살임'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휴도는 소도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 대휴도를 둔 휴도국이 있고, 각처에 또 작은 휴도가 있어서 더욱 삼한의 소도와 다름이 없었다.

이에 조선과 흉노가 3천 년 전에는 한 방 안의 형제였다는 가설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다가, 그 뒤에 건륭제가 명하여 편찬한 만주원류고와 요, 금, 원 세 왕조의 역사책의 국어해를 가지고 비교해 보았다. 비록 그 가운데 부여의 대신 칭호인 '가'를 음으로 풀이하여 조선말의 김가, 이가 하는 '가'와 같은 뜻이라 하지 않고 뜻으로 주석하여 '가'의 잘못이라 했으며, 금사의 '발극렬'을 음으로 맞는 신라의 '불구래'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지 않고 청나라의 패륵과 같은 부류라고 한 것 등의 잘못이 없지 않으나  주몽이 만주어 '주림물' 즉 삼림의 뜻이라 하고, 삼한의 벼슬 이름의 끝자 '지'가 곧 동몽고의 '중'을 만나 동몽고 말의 동·서·남·북을 물으니 '연나·준나·우진나·회차'라고 하여, 고려사의 "도부를 순나라 하고, 서부를 연나라 하고, 남부를 관나라 하고, 북부를 절나라 하고"라고 한 것과 같음을 알았다.

또 그 뒤 일본인 조거용장이 조사하여 발표한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 종족의 현재 사용하는 말로 같은 것이 수십 종(이에 내가 기억하는 바는 오직 귀자를 '아기'라 하고, 건장을 '메주'라 하는 한두 가지뿐임)이 있음을 추론하게 되었고, 중국 24사의 선비·흉노·몽고 등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그 종교와 풍속의 같고 다름을 참조하고, 서양사로써 흉노의 후손이 토이기·흉아리 등지로 이주해 간 사실을 검토하여, 조선·만주·몽고·토이기 네 종족은 같은 혈족이라는 또 하나의 추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추론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의 고어뿐 아니라 만주어·몽고어 등도 연구하여 고대의 지명, 벼슬 이름의 뜻을 깨닫는 동시에, 이주하고 교류한 자취며, 싸우고 빼앗은 자리며, 풍속의 같고 다른 차이며, 문명과 야만의 높고 낮은 원인을 구명하고, 그 밖에 수많은 사적의 탐구와 잘못된 문헌의 교정 등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자료의 수집과 그 선택 등의 수고로움에 대하여 나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이다. 조선·중국·일본 등 동양 문헌에 대한 대규모 도서관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충분히 만족할 만한 도서관은 없으나, 그러나 동양으로는 제일이고 또 지금에 와서는 조선의 소유가 그 외부의 보고가 되었으며, 또 서적의 구독과 각종 자료의 수집이 우리같이 유랑생활 중에 있는 한학자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요, 게다가 새로운 사학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으나, 지금까지 동양학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오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자가 백조고길이라 하지만, 그가 저술한 신라사를 보면, 배열·정리의 새로운 형식도 볼 수 없고 한두 가지 발견도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편협한 천성이 조선을 헐뜯기에만 급급하여 공평성을 잃은 탓인가? 조선 사람으로서 어찌 조선 사학이 일본인으로부터 개척되기를 바라겠는가마는, 보물을 남김없이 가져다가 어둠 속에 썩게 함을 개탄하고 아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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