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 부록 ②
제 3 화 전생의 직업에 집착하는 피아모드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아모드 샤르마는 1944년 10월 11일 모라다밧드에서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작은 도시인 비사우리에서 태어났다.아버지 라르 샤르마는 대학교수이다. 그가 두살 반쯤 되었을 때 어느날 부엌에 들어오더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혀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자기 음식은 만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였다. 왜냐고 어머니가 물으니까 모라다밧드에 부인이 있어서 그녀가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는것이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 그가 세살에서 다섯살 사이에 말한 것을,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피아모드는 전생에 모한 브라더즈 회사의 직원으로서 모라다밧드에서 비스켓과 소다수를 파는 큰 상점을 갖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들 넷그리고 딸 하나가 있었으며, 또 모한 브라더즈는 더욱 번창하고 있어서생활도 호화롭고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가정이 너무 검소한데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피아모드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마당에서 흙을 반죽해서 과자처럼 만들어 놓거나 벽돌을 쌓아서 집처럼 만드는 장난밖에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흙으로 만든 과자는 비스켓이고 벽돌집은 상점이었다. 때로는 흙으로 만든 비스켓과 물을 가져와서 부모에게 "자 어서 잡수셔요"라고 할 때도 있었다. 이 때의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차(茶)를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부모를 곤란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목욕과 카아드(요구르트와 비슷한 것으로 이유기에 먹는 음식)를아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목욕뿐만 아니라 물에 들어가는 것도 질색하며 싫어하였다. 강제로 목욕을 시키려고 하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카아드는 더운 지방인 인도사람의 중요한 영양원이어서 이것을 싫어하는 인도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카아드 거부증은 단순히 먹기 싫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병적인 공포라고 말할 수있었다. 또 그는 가끔씩 영어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하였다. 샤르마 교수의 가정에서는 힌두어를 쓸 뿐 영어를 쓰는 일은 없었다. 특히 그가자주 쓰는 말은 바스 터므[목욕조], 베이커리[제과점], 타운홀[공회당]- 그는 '도운 홀'이라고 발음했다. - 의 세 가지 말이었다.
피아모드가 네살 반이 되던 1949년 초여름에 그의 아버지는 동료인그라셔드 교수에게 무심코 아들의 이상한 언행을 이야기했었다. 그 얼마 뒤에 이 교수댁에 그의 친척이 다니러 왔고, 교수는 이 친척에게 피아모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사람이 피아모드가전생에 살았다는 모라다밧드에 살고 있다는 점이 교수의 입을 가볍게했는지도모른다. 교수의 친척은 우연히도 모한 브라더즈라고 불리는모라다밧드의 메헤라 가(家)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는 모라다밧드로 돌아오자 곧 메헤라 가를 찾아가서 비사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주인인모한 메헤라에게 들려주었다. 그 아이의 이야기는 모한의 남동생인 파아마년드의 경우라면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는 1943년 5월 9일 복막염으로 죽었는데, 평소에 좋아하던 카아드를 과식한 탓으로 만성 위장병이 악화되어서, 그 치료를 위하여 입욕요법(入浴療法)을 하던 중에죽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피아모드가 자기는 "카아드의 과식으로병이 되었고, 그리고 욕조 안에서 죽었다"고 하던 말과 꼭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린 피아모드가 자신도 결코 카아드를 먹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말라"고 충고한것이라든지, 목욕을 하지 않으려고 병적인 공포를 보인것 등도 전인격인 파아마넌드의 죽음의 상황과 견주어 보면 잘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라하여 그 해 여름 메헤라 가에서는 파아마넌드의 사촌형이 비사우리의 샤르마 가(家)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마침 피아모드는집에 없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곧 피아모드는 그의 아버지와 사촌형과 함께 모라다밧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들이 모라다밧드 역에 내렸을 때 피아모드는 마중나온 그의 사촌형을 알아보고서 인사하였다.
"아, 저카라므 챤드 형, 난 파아마넌드야!" 그는 처음으로 자기의 전생 이름이 파아마넌드라고 하였다. 이들은 곧 마차를 타고 1Km쯤 떨어진 모한 브라더즈의 비스켓 상점으로 갔다. 피아모드는 그 사이의 꾸불꾸불한 길을 잘 지시하였으며, 상점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회당을 지날때에 "도운 홀"이라고 하면서 가게에 가까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점 안으로 안내된 그는 두 가지 일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根다. 하나는 소다수를 만드는 복잡한 기계장치를 정확히 설명하였는데, 그를 시험할 목적으로 일부러 연결호스를 모두 풀어두었던 것이다. 또 그는 상점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주인이 앉도록 해 둔 '가데이'라는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망후에 상점을 개조하면서 없앤 것이다.이어서 그는 메헤라 가의 전생의 가족들을 알아보았고 각자의 이름도말하였다. 그는 방가운데 앉아서 전생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매우 즐거운 듯이 보였다. 스무살이 넘는 아들들이 그를 "피아모드"라고 부르면 "나를 피아모드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버지라고불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가끔씩 모라다밧드에 가서 메헤라 가의 가족들과 만날 때에는 언제나 파아마넌드에 적합하고 어울리게 행동하였다. 그가 열일곱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전생의 딸이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슬퍼하였다.
어린 시절의 피아모드는 지능이 우수한 아이로 여겨졌지만 차츰 다른동급생보다 뒤떨어지게 되었다. 진학도 뜻대로 되지 못했고 스물다섯살이 되던 1969년에는 주(州)의 임시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상점 경영에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당신의 인도에서는 시대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 4 화 전생의 어머니에게 환생을 예언한 프라카슈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스라로 통하는 연변에는 코시카란과 쳇다라는 두 도시가 겨우 10km 정도의 간격으로 차례로 나타난다. 인구 구천의 작은 도시 쳇다에서 1951년 8월 프라카슈는 태어났다. 그는 네살반쯤 되어서부터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코시카란 사람이고이름은 니르말이라 한다." 그러면서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강경하게 부모를 졸라대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가서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도 코시카란에 가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그가 너무도 강경하게 졸라대니까 어머니는 시동생 다르에게 그를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 한번 데리고 가주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르는 푸라카슈를 데리고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때 잘못해서 코시카란의 반대 방향인 마스라로가는 버스를 탔다. 그러자 프라카슈는 삼촌의 잘못을 곧 알아채고 울면서 길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서코시카란으로 갔다. 그날 프라카슈가 말한, 코시카란의 아버지의 상점은 '아버지'가 부재중이어서 닫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돌아왔다. 그 얼마 뒤에 프라카슈가 말한 그 상점의 주인인 보라나스의귀에 자신을 찾아온 쳇다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 들어갔다.
프라카슈는 이전보다 더 강경하게 자기를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우기며 또 니르말로서의 생애에 대하여도 상세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가 이 무렵에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코시카란의 사람으로 이름은 니르말이다. 아버지 이름은 보라나스이고 상점을 네 개 갖고 있다. 곡물가게, 옷가게, 잡화점 등이다.그리고 누이의 이름은 타라다." 그리고 그밖에도 몇 사람의 이름을 말하였다.
프라카슈의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니르말이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했고 프라카슈라고 부르면 대답을 안 하는 때도 가끔 있었다.또 그는 전생의 집은 좋은 벽돌집이었는데 지금 집은 흙벽집이라 옹색하다고도 했다. 또 지금의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고도 하였다.프라카슈는 긴 못을 하나갖고 있었는데, 코시카란에 있는 자기 금고의열쇠라는 것이었다.
다섯살이 되면서부터 그런 전생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상세하고구체적으로 되어갔지만, 아버지의 억압이 심했기 때문에, 실제로 눈에띄는 행동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1956년부터 5년 동안은 평화로운상태로 지나갔다.
그러다가 1961년 초여름이 되었을 때였다. 보라나스는 상업상의 볼일로 딸 메모를 데리고 쳇타 시에 왔다가 용무를 끝내고 코시카란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이들 쪽을 향해 오는한 소년이 있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잠시 후 그들 곁에다가와 보라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난 니르말이예요. 아버지는 코시카란에서 샤쓰를팔고 있는…."
보라나스의 표정이 싹 변했다. 분명히 그의 잡화점에서는 샤쓰를 팔고 있다. 그러나 그가 표정이 변한 것은 좀더 이상하고 기이한 이유가있기 때문이었다. 5년 전인 1956년에 쳇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찾아왔더라는 이야기를 상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10년 전의 이상한 광경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1950년 4월 보라나스의 아들 니르말은 열살 때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니르말은 헛소리를 하는 상태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다. 당신은 쟈트계급의 여자다.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마스라와 같은 방향에 있는 쳇다 마을 쪽을가리켰다. 니르말은 물론 쳇다라고 도시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히 쳇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서 몇 시간 뒤에 그는 죽었다.
지금 프라카슈가 '코시카란의 아버지'라고 했을 때에 보라나스는 바로 그 광경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는 그 광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곁에 있는 딸 메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너의 오빠다." 소년은 메모의 손을 잡았다. "비로마, 내 여동생!" 이라고 하며 프라카슈는 메모를향헤 니르말의 누이 타라와 형 자레이슈의 일도 물었다. 그러나 지금프라카슈의 말 중에서 메모의 이름만은 정확하지 않다. 비로마는 실은니르말의 또 다른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보라나스는 프라카슈와의 이 우연한 만남을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 뒤에 보라나스 제인 가(家)의 사람들이 바아슈나이 가(家)를 찾아왔다. 제인 가에서온 세 사람이 바아슈나이가에 도착하자 입구로 달려나온 프라카슈는 "아아, 타라 누님" 하면서 처음 보는 젊은 여성에게 달라붙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들이 응접실로 안내되자 프라카슈는 타라의 무릎에 올라앉아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하며 니르말의 어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내 어머니다." 그리고 열 대여섯살쯤 된 한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내 동생데베드라!" 사실 찾아온 세 사람은 니르말의 모친과 누이와 동생이었던것이다. 프라카슈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들떠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울며 졸라댔다. 결국에는 우는 프라카슈를 달래기 위해 할 수 없이 코시카란에 가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프라카슈는 그의 아버지 브리지랄 등과 함께 코시카란으로가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보라나스의 집까지는 약 1Km의 거리로 복잡하고 옆골목이 많은 길이지만 프라카슈는 일행의 앞에 서서 당당히보라나스의 집까지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전생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을만난 코시카란은 여러가지의 전생에 대한 지식을 나타내 보였다.
그 때까지 그가 말한 것은 모두 그대로 사실임이 판명됨은 물론이고그밖에도 그의 전생 지식은 정확했다. 니르말의 생존중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여동생 메모의 이름을 모르고 그 위의 여동생인 비르마와혼동해서 이름을 부른 것이나 제인 가의 개조한 대문 앞에 머물러 서서망설였던 것은 모두 니르말 생존 중의 지식을 그가 갖고 있다는 증거가된다. 그리고 지금은 가게를 하고 있지 않는 이웃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알아 보았고 그들의 가게에 자주 물건을 사러 갔다고도 말했다.또 그는 니르말이 죽을 때 있었던 방에 와서는 그가 죽은 방이라고 했고, 금고가 있는 방에 와서는 그 금고 속에 있는 니르말의 서랍을 지적했다. 금고 안에는 여러 개의 서랍이 있어서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서랍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 열쇠도 가지고 있었다. 프라카슈가 어렸을때 말한 못은 이 금고 서랍의 열쇠였던 것이다.
그 뒤 프라카슈는 스무살이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세일즈맨으로 일하였다. 이 때에도 한달에 한 두번은 코시코란에 다니고 있었다. 이전에기억했던 것을 아직까지 기억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제 5 화 목에 칼자국 흉터를 가진 샹카
라뷔 샹카는 1951년 7월 카나우지 시(市)에서 태어났다. 그는 테어나면서부터 목에 흉터가 길게 나 있었는데 마치 칼로 입은 큰 상처가 아문 것 같아보였다. 이 아이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세살 때부터자기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이발사 제게스와르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는부모에게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할때는 언제나 "전생에 그 장난감을 갖고 있었어. 그러니 그걸 갖고싶다"고 하면서 사 달라고 졸랐다. 그가 전생에 가지고 있었다는 장난감은 용수철이 달린 공, 크리슈나왕(王)의 장난감 상(像), 목제 코끼리, 장난감 권총 등이었다.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던 그는 죽을 때의 상황에 대해 살해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전생에 그는 목이 잘려 살해된 뒤에 매장되었다. 살해되기 전에 구우바스를 먹고 있었으며 강가로 끌려가서 살해되었다는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살인범의이름까지 말했다. 목 주위에 있는모반(母斑)은 전생에 목이 잘리울 때 생긴 상처 자국이라고 말했다.
샹카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난 1955년 초여름, 그의 나이 네살이 되기 조금 전에, 프라셔드가 샹카가 지금 살고 있는 구프타가(家)를 찾아왔다. 샹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샹카의 아버지구프타는 샹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프라셔드의부탁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프라셔드는 얼마 후 샹카의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겨우 샹카와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1955년 7월 30일의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오다 말고 프라셔드 씨에게서 약간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잠시 후 그에게 다가와서 무릎에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 난 치팟테이의 학교에서 책을 잘 읽었지. 내 나무접시는 찬장 속에 들어있고…." 샹카는 첫 대면인 프라셔드씨를 자기의 아버지로 알아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치팟테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 나무접시가 찬장 안에 있다는 것 등의 새로운 전생 지식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프라셔드 씨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그것이자기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프라셔드의 죽은 아들믄나의 생애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믄나의 살해사건은 1951년 1월 19일 샹카가 태어나기 6개월전의 일이었다. 믄나의 시체는 잘려진 머리와 함께 옷만 발견되었다. 믄나는 밖에서 놀다가 유괴되어 살해된 것으로 보여졌고, 두 사람의 용의자가 나타났지만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들은 근방에 사는 사람으로 한 사람은 프라셔드의 친척인 이발사이고, 또 한 사람은 세탁부였다. 샹카가 전생기억에서 말한 살인범도 이 두 사람이었다. 그라셔드씨가 샹카를 만나서 직접 들은 구체적 살해 상황은 프라셔드를 만족하게 했다. 그 뒤에 그는 처음의 용의자에 대한 재 수사를 청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샹카는 프라셔드와 만난 뒤에 어머니를 따라서 사원의 재에 갔다가 거기에서 범인의 한 사람인 세탁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샹카는즉시에 그를 알아보면서 공포를 나타내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로 구프타는 샹카에 대해 더욱 엄중해졌으며, 나중에는 샹카를 집에 두지 않고 다른 먼 곳에 맡겨버렸다. 집에 두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생기억은 살인사건을 포함하고 있으니만큼 실제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샹카는 한때는 범인들에게복수할 것을 다짐했지만 성장하면서 차츰 그런 감정이 엷어졌고 1969년이후로는 범인들에 대한 감정이 모두 없어졌다고 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