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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부록-한번이상 사는가 ①

 

  
  제 1 장 서문
  
  나는 신문기자와 TV 방송기자로  여러 해 일하는 동안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취재해 보았다.  그중 대부분은 지나간 일들에 근거를 둔 탐정이야기들이다. 예를 들면 반역죄라는 누명을 쓰게 되어 자살을 한 중국의 공주 이야기라든지 또는 절세미인과 결혼한 후 역사의 기록문서에서그 이름이 삭제된 이단자  '파라오'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중어떤 것은 농담삼아 조작된 것이거나  또는 사기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것이다.  어떤 것은, 자신이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며 '무명(無名)'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기독교 종파를 창설한 스코틀랜드 여인의 이야기처럼, 망상에 불과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내가 일찌기 취재했던 이야기들 가운데서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탐정이야기가 갖추어야 할 모든 이상스럽고  괴이한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아주 우연하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취재하게 되었다.이 책의 저자인 아이버슨 씨는 BBC TV 방송 프로그램에 넣을 수 있느냐고 문의하여 왔다.  그것은 좀 특수한 프로그램이었다. 왜냐하면, 아이버슨 씨가 내게 설명했던 것처럼, 그 때 카디프시에는 최면요법사인 브록샴이라는 유명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의 환자들이  수백명이나최면상태에서 전생을 기억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및 고고학에 흥미가 있었으므로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침착하게, 비판적으로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을 갖춘 다음 이 주장을 조사해보는 것이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전생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를 기억했다는 것이 정말일까?"
  나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의 가정부인인 머피 여사가 최면상태에서 19세기 영국인 소녀로서의 전생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기억해낸 것을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알고 있었다. 그 밖에도 최면에 든 사람이 자신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과,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역사의 어느 한 기간에 대하여 아주 자세히기억하고 있는 사실에 관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전생을 조사하려고나는 카디프 시에 갔다. 나의 조사는 사실은 인간의 마음 그 자체에 대한 조사였다.  요크 지방에 한번도 가보지못한 여인이 유태인 대학살 당시 젊은 유태여인으로서  요크 지방에 살았던 경험을,  겁에 질려서, 아주 자세하고 조금도 꾸밈없이 말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일생 동안 바다라고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사람에게서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소형 구축함 속에서  프랑스 연안지대를 봉쇄하다가 한쪽 다리를 잃은 해전 경험 등을 듣는다는 것은 실로 두려운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프리 아이버슨과 나는최선을 다해 이들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조사해 보았다.  우리는 그들이 전생에 살았다는 곳을 가보았고,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모조리 검토해봤다.  우리는 역사학자,고고학자, 기록보관인 및 심리학자들을 찾아가 이야기해 보았다.  우리는 조사해 보고, 연구해 보고, 의문해 보고 의논해 보았다.
  '브록샴 테이프'에 실린  세부적인 전생기억은  과연 틀림 없는 것인가?  최면상태에서 피술자들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세밀한 전생기억은 도대체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얻은 것인가? 이러한 전생이 고의적으로 꾸민 것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을진대 그러한 사실에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억력인가?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잠재의식으로부터 마음 표면으로 흘러나온, 숨겨졌던 기억들이가?
  그러면 이러한 조사 결과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답변은 독자 자신이 해야겠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논쟁할여지가 없는 한 가지 결론에는 다달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한없이 복잡다단하고 신비스럽고 매혹적인그러한 '어떤것'이라는 것이다.

  
  제 2 장 인생을 일곱 번 이상 산 에반스
  
  나는 브록샴 씨가 모은 전생기억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테이프에 관해서 연구를 시작했다.  곧 여섯 번의 전생을 기억해 낸 삼십대의 직장여성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기혼여성으로서, 금생을 더하면 무려 일곱 번이나 태어난 셈인 이 여인은  여섯 번의 자기의 과거 신분들을 밝힐 수 있었다.
  나는 우선  이 여인의 전생담이 실린 테이프를 경청해 보았다.  내가첫번째로 경청한 세 개의 테이프에 실린 전생담들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시대의 역사와 관계가 있었으므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테이프에 실린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어떤지 조사해 보았더니많은 이야기들이 사실임이 계속 드러났다. 나는 역사책을 읽어 본 후에야 그리고 역사학자들을 찾아가 면담을 해본 후에야, 이 여인이 녹음테이프에 진술한 세부 사항들이 사실임을 믿을 수 있었다.
  그녀의 문제의 전생들 가운데 한 번을 3세기 경에 영국의 '에보라쿰'곧 '요크 시'에서 보냈는데,  당시 영국은 로마가 집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기 1190년 경의 유태인 대학살 당시 그녀는 또 다시 '요크시'에서 살았다. 그리고 15세기 경에 불란서의 '브르스 시'에서 대부호인 꿰르 씨의 하녀로서도 살았다.
  이 여인에게는 앞의 세 번의 놀라운 전생 외에도  세 번의 전생이 더있다.  곧 16세기 스페인의 케더린 공주의 시녀로서 스페인에서 살았던전생과, 17세기 초 영국에서 앤 여왕 재위시에 런던에서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가던 가난한 소녀로서의 전생과, 20세기 초 미국 메릴랜드 주의 수녀원에서 수녀 노릇을 했던 전생 등이 있다.
  그녀의 전생들은 서로 겹치지 않았다.  전생들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가장 짧은 것이 15년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수녀였던 전생과 1939년태어난 금생과의 간격이 15년인 것이다.
  이 전생 목록이 그녀의 전생 전부를 포괄한 목록은 아니다.  다만 여섯 번의 최면에 들어 여섯 번의 전생을 기억해 내어 경험한 뒤에 더 기억해 보는 것이 싫증이 나고 무서워서,  더 이상 최면상태에 들기를 거절했을 뿐이다.
  내가 그녀와 만나 이야기한 것은  그녀가 최면 상태에서 전생을 기억한 지 만 5년이 지난 뒤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최면에들어서 전생을 기억해 볼 수 있겠느냐고 청했다. 나는 이번만은 녹음기는 물론 촬영기도 가지고 참석하고 싶었다.   그녀는 나의 요청을 받고며칠 동안 생각하더니 전화로 승낙을 알려왔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내세웠다. 자기가 최면 상태에 있는 것을 촬영해도 좋으나 자기의 이름만은 밝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자기 처가 일곱 번의 인생을 가진 사실에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남편의 이러한 요구가 타당하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본명 대신 '제인 에반스'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로 했다.
  '제인 에반스'여사가 최면 상태에서 기억해낸 여섯 번의 전생들과 거기에 딸린 날자들은 다음과 같다.

  1. 로마제국 통치하의 영국에서 살았던  통치자 가정교사의 아내로서의 전생(서기 286년 경)
  2. 영국 '요크 시'에서 유태인  여성으로서 산 전생 (서기 1190년 사망)
  3. 불란서 '부르스 시'에서  꿰르 씨의 하녀로서의 전생(서기 1451년사망)
  4. 스페인 케더린 공주의 시녀로서 산 전생(케더린 공주는 1451년 부터 1536년까지 살았음)
  5. 앤 여왕 재워시에 런던에서 바느질 품팔이 소녀로 산 전생 (앤 여왕은 서기 1665년부터 1714년까지 살았음)
  6. 미국의 메릴랜드 주 수녀로서의 전생(1920년 무렵에 사망)
  7. 금생의 '제인 에반스'(1939년 탄생)       

  
  제 3 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1. 요크 시에서의 유태인의 아내
  
  제인 에반스는 최면 상태에 들어서 레베카라는 이름의 유태여인이 되었다. 레베카는 요크대성당의 외부를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기 1189년 유태인인 레베카는 과일과 채소를 사느라고 인근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남편의 이름은 죠셉으로 돈많은 고리대금업자이며, 나이가 사십대인 이들 부부에게는 열여덟살 난 아들 죠셉과 열한살난 딸 레이첼이 있었다. 레베카의 가족은 커다란 돌집에 살고 있었는데대부분의 유태인 부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거주하는 요크 시의 북쪽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의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그러한 것에 대한 확실한사실을 알 수 없다.  다만 유태인 공동체에 속했다는 소수의 유태인 이름이 전해질 뿐이다.
  레베카는 할아버지가 지중해에 위치한 사이프러스 섬  출신이고 나머지 가족들은 영국에서 출생했지만 영국인은 아니었으며  사회에서 버림받은 계급이었다고 자기의 혈통을 설명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있었지만,  당시 체스터, 링컨, 런던 등지에서 유태인을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불안한 나날이 시작되었다.   레베카는 플란타지니트 왕가출신인 헨리 왕과 유태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유태인들은 법정에서 재판 받을 때 헨리 왕으로부터  보호를 받았고 왕은 그 보답으로 돈을 지불받았다.   그러나 레베카는 왕이 서거한 해에일어난 사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유태인을 이단자로 몰아 위협하는기독교인들에 관한 레베카의 진술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초래한 사건을 사실상 설명하고 있다.   반회교 감정은 물론 반유태인 감정이 한창고조 되고 있던 그 무렵의 불란서와 영국에서는  군중들이 이단자로 몰린 유태인을 향해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살인과폭동이 뒤따르게 되었고 유태인은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레베카는 남편인 죠셉에게서 돈을 빌려간  메베리제와의 재판이후 몹시 두려움을 느꼈다. 문 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밤에 돈을받으러 갈 때에는 유태인이란 표지를 위해 달게 되어 있는노란 뱃지를떼고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베카가 말한 메베리제라는 사람이다.  레베카는 당시 연대기 편자가 '유태인 학살의 주모자'라고 기록한 메레비제라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다.  '메레비제'와'메베리제'는 서로 거의 비슷한 이름이다. 이 사람은 후일 유태인 학살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벌금을 물고 유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진다.  메레비제라고 불리는 요크 시의 이 미미한 귀족은  유태인에게 많은 빚을지고 있었으므로, 그 돈을 갚지 않으려고 그들을 살해함으로써 빚을 청산하려 했다는 것이다. 위급한 상태가 계속 되자 레베카의 가족들은 성을 빠져나와 성당에 피난처를 마련하여,  성당 밑바닥에 있는 지하실로내려갔다고 한다. 레베카의 가족들이 숨은 곳은 요크성 성문 밖에 위치한 조그만 성당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서 레베카는 딸 레이첼을빼앗겼다. 그리고 레베카 역시 성당 안의 지하실에서 살해당했다.
  레베카의 말을 담은 테이프를 욕크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도브슨 박사가 들었는데,  그는 '1190년의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한 사람이다. 도브슨 교수는 레베카가 사용한 언어는 중세영어라기보다는 12세기에 쓰던 영어라고 밝혔다.  또 레베카의 얘기는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한다고 했다.   도브슨교수는 레베카가  성에서 성당으로 도망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 성당이어느 성당인지 찾아내고자 했다. (그 도시에는  약 40개가 넘는 성당이있었는데 지금도 약 반수 가량이 형태가 조금씩 달라진 채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브슨 교수는 성모마리아 성당이 레베카가최후를 맞았던 곳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는데,  그 성당은 레베카가 말한것처럼 성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틀린 점이 있다면 대성당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성당도 지하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1975년 9월, 성모마리아 성당을 수리하던 한일꾼이 이 성당에서  예배실처럼 보이는 지하실을 발견했다. 일꾼은 석굴과 둥근 천정 등을 보았다고 말했다.  또 이 건물이 로마풍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그것은 서기 1190년 이전에 유행했던 양식이라고 한다.
  레베카는 말하던 도중에  군중들이 이단자라고 유태인을 몰아 세우며위협을 하던 광경을 생생하게 떠올리듯, 두렵다는 말을 반복했다. 유태인들은 자기의 자식이 남의 손에 살해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스스로 죽이기도 했다고 레베카는 말했다. 이는 '자비살인'이라고 표현되고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요크대학살 당시 일어났던 일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일이었다.    

  
 
  
  2. 로마시대 가정교사의 아내 
  
  요크 시는, 제인 에반스 여사가 전생에 유태인으로 태어나 살았던 곳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로마인의 아내로서 살았던 장소로 바뀐다. 브록샴 씨의 최면에 의해 12세기 경의 레베카는 리보니아가 되었다.(곧 요크 시는 제인 에반스 여사가 유태인으로서 산 곳인 동시에 로마인의 아내로서 산 곳이기도 하다.)
  리보니아는  서기 286년 경 영국에서 일어났던 음모와 반란사건에 대하여 자신이 본 대로 솔직하게 묘사했다. 서기 3세기경의 이 인생은 제인 에반스가 살았다고 말하는 여섯 번의  전생들 가운데 최초의 전생이며 녹음한 전생 기록 가운데 마지막의 것이다. 그녀는 리보니아의 전생까지를 기억한 후 더 이상 최면에 드는 것을  거절하며 몸이 몹시 피곤하다고 말했다.
  리보니아는  타이터스의 아내로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많았다.  타이터스는 콘스탄티우스라고 불리우는 저명한 로마인의 아들에게 라틴어와 희랍어,  그리고 시를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콘스탄티우스의 가족은 에보라쿰이라는 요크 시 외곽의 저택에 살고 있었다.
  리보니아는 냉대받고 탄압받는  유태인 그룹에 속했던 12세기경의 레베카와 비교해 볼 때,  훨씬 교양있는 그녀는 더 많은 이름과 사실들을열거해가며  영국 역사의 격동기 동안에 살았던  자신의 전생을 기억했다. 그녀가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때는 거의 정확했으나 이야기 가운데숨길 수 없는 큰 흠이 있었다.  역사책에는 로마의 황제로 커다란 치적을 남긴 콘스탄티우스가 언급되지만, 어디에도 그가 서기 286년에 로마집정하의 영국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리보니아는그가 영국의 총독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그릇되게 말했다면 그녀의 전생기억은 전부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리보니아는역사적으로 있었을 법한 일에 대하여  불가사의하게도  많이 알고 있었다.  또 이상하게도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리보니아의 설명은 역사책에기술된 것과는 꽤 달랐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설명이 틀렸다고 논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리보니아의 말을 엄밀하게 추적해 보았더니 그 유명했던 여러 인물들이 행방불명이었던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책에 공백으로 비어 있는 시기를메꾸어 놓은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웠다.
  리보니아는 콘스탄티우스의 부인이 헬레나이며, 자신의 남편타이터스가 가르치는 소년, 곧,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이름이 콘스탄틴이라고 말했다.  리보니아의 말처럼 콘스탄티우스의 부인은 헬레나였으며, 그 아들은 콘스탄틴이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콘스탄틴 대체(大帝)로 알려지고 콘스탄티노를 시를 이루었으며 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던그 유명한 황제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책의 어디에도 콘스탄티우스의 가족들이 서기286년에 영국의 총독으로서 리보니아가 말한 에보라쿰에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영국사의 대가인 리드대학교의 브라이언 교수는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는 리보니아가 진술한 대로  콘스탄티우스가 영국에 총독으로 갔을 가능성을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 283년, 콘스탄티우스가 달마티아의 총독으로 알려졌을 당시부터, 서기 290년, 다시 기록에 의해 나타날 때까지의 행방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의 일생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기 286년 경에그가 어디 있었는가 하는 것과,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콘스탄틴 대제의 자서전 작가조차도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의 출생 연도는 서기 272년부터280년 사이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는데,  오늘날 역사가들은 서기 272년을 합당한 것이라 보고 있다. 콘스탄틴이 서기 272년에 태어났다면, 에보라쿰의 정원에서 리보니아의 남편에게서  무기를 쓰는 방법을 배우고있었던 당시의 나이를 열네살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리보니아의 전생기억을, 공백으로 남겨져 있는 역사상의 시기를 토대로 꾸며낸 단순한 허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녀는콘스탄티우스가 역사상으로 행방불명이었던 기간에 대한 자신의 진술과완전히 부합되는, 실증이 가능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들면,  콘스탄티우스의 저택에서 연회가 있을 때면 쓰여지곤 했던 육류와 과일들이며 은잔에 담긴 사이프러스산 포도주 등  그 시대에 애용됐던 연회용 준비물의 이름들을 자세하게 열거할 때,  오늘날의 사학도들은 논박할 여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리보니아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로마로 돌아오라는 황제의 칙명을 가지고 온 알렉터스라는 사람과 그 후의 정변에 대해서도 말했다. 서기 286년에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가족들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역사에 기록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알렉터스가 이 무렵 영국에 체류하면서 권력을 잡으려고 계획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알렉터스는 해군대장 카라시우스와 함께 영국 내의 로마인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하였다.   카라시우스는 당시 게소리아쿰에 있는 로마함대의 책임자였는데,그들은 로마인 정권의 전복에 성공하여 몇 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의 얼굴이 오늘날 자주 독립을 기념하는  영국 주화의표면에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리보니아는 서기 286년에 있었던불명료한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카라시우스와 알렉터스가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다스린 9년 동안과  그 다음또 다시 9년이 지나기까지, 다른 사람 아닌 콘스탄티우스가 로마로부터돌아와 다시 영국을 정복하기까지, 리보니아와 헬레나의 가족들은 숨어살았다.
  콘스탄티우스는  알렉터스의 세력들을  몰아낸 후  10년이 지난 서기306년에 에보라쿰에서 죽었는데 헬레나가 아닌,  정략결혼한 황제의 딸데오도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과 딸 셋 등  모두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은 뒤에 영국에 주둔한 로마군에의해 황제로 추앙받아 후일 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사람은  헬레나의 아들인 콘스탄틴이었다.
  리보니아는 남편 타이터스와 함께 숨어 사는 기간 동안 앨바너스라는사람을 통해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또 콘스탄티우스와 헤어진 헬레나와 아들 콘스탄틴도 앨바너스에게 소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리보니아의 남편인 타이터스는 가장 열렬한 기독교 귀의자였다.  학살을 영국에서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 콘스탄티우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보니아와 남편 타이터스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리보니아가 말하는 앨바너스는  오늘날 성자 앨반으로 알려진 사람인듯하다. 현재, 리보니아가 숨어 살다가 앨바너스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베룰람 시는  '성 앨반스 시'로 명명되어 불리고 있다. 또한 성자 앨반이 베룰람에서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앨바너스가 곧 성자 앨반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기독교가 헬레나의 가족과 하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헬레나와 아들 콘스탄틴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경위는 역사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들은고금을 통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독교인이다.  헬레나는 대단히 믿음이 깊은 기독교인이라 후일 성자로 추앙되어 '성(聖) 헬레나'로 추존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에서 이교도의 신을 몰아내고  기독교를 국교로삼은 최초의 황제라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콘스탄틴은 그의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후 최초의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그는 모든 부하들의 방패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도안을 그려 넣었으며,  그 자신도 똑같은 방패를 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도안에는 창살을 포개어 만든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이름 가운데  첫번째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도안은 로마의 국기에 그대로 보이게 된다.  현재의 사가들은 콘스탄틴이 종교 고문이었던 스페인 대주교 오씨우스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오씨우스는 리보니아의 이야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리보니아의 남편이 죽는 날 방에 "그를신부로 만들기 위해 베룰람에 온 사람이 바로 오씨우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오씨우스는 영국 출신이 아니라고도 했다. 리보니아의 전생기억을 들은 역사가들은 그녀의 말이 대체로 믿을 만하며 역사적으로밝혀진 사실들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3. 프랑스에서의 하녀
  
  세번째 이야기에서 제인 에반스는 프랑스 르와르 계곡에 있는 브르스시에서 자신이 살았다고 기억했다.  그녀는 브르스시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 도시에 있는 집과,  그녀가 살았다는 집의 정원과 건축양식, 긴 복도들이 있는 벽과 실내를 장식한 그림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정확하게 진술했다.   제인 에반스는 프랑스의 대부호였던꿰르 씨의 저택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고, 꿰르 씨에 대한 책이 영어로 발간된 일도 없었다.
  전생기억에서 그녀는 꿰르의 하녀인 십대 소녀 아리종이 된다.  꿰르는 당시 프랑스 왕 샤를르 7세의 재정담당 고문으로  굉장한 부자였다.그의 인생 절정기에는 프랑스에서 왕을 제의 한다면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상당히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왕의정부(情婦)를 독살했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했던 것이다. 아리종은 여기에 얽힌 이야기들을했다.
  꿰르는 왕과 귀족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 주었다. 그가 살인을 했다는무고로 사실심리를 받지만, 판결문의 요지는 "왕이 그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것과 꿰르의 채권자로서의 권리가 모두 무효화된다는 것"이었다.
  꿰르의 재산 그리고 왕궁 인물들과의 관계, 왕의 정부 아녜스에 대한꿰르의 애정 등  아리종이 말한 것이 사실이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한 사람들은 웨일즈 지방의 가정부인인 에반스 여사가 중세기 불란서 역사에 관하여  전문가도 놀랄 만큼의사실을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생기억들이 모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녀의 말이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었다. 꿰르가 체포됨으로써 그녀는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비교적 과묵하고 순진한 처녀였다.   아마도 꿰르가 들려주었음직한당시의 궁중생활에 대해서도 아리종은 언급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진술한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아리종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다가 꿰르의 하녀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꿰르는 알렉산드리아, 베이루트,  카이로 등의 항구도시들과 통상 거래를 했는데 그의 이름과 선박은 아랍권의 여러나라에 알려져 있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아랍권의 이교도들과 무역할 수 있는 특허를 얻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꿰르는 주로 그의 고향인 브르스에서 살았다. 브르스에는 그의 집이 서너 채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쏘오세라는 이름의아름다운 저택도 지었다.
  아리종은 꿰르가 많은 저택을 소유했으나 브르스에 살았다고 하며 장날마다 리옹에 가서 그의 옷감들을 팔았다고도 한다. 사실 꿰르는 리옹에서 열리는 장을 부활시킨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주인 꿰르가 왕의 정부(情婦) 아녜스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한 사실도 말했다.  꿰르는 아녜스에게 다이아몬드를 주며 그것이 불란서에서 최초로 가공한 다이아몬드라고 말했다고 아리종은 진술했다. 어떤 역사가는 꿰르가 프랑스에서  다이아몬드를 일정한 모양으로 자르게한 최초의 사람이며,   아녜스가 프랑스에서 다이아몬드를 몸에 치장한최초의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녜스가 꿰르를 찾아간 것은  왕에게 필요한 돈을 빌리기위해서였다고 아리종은 말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샤를르 7세가 군인들 봉급을성을 증축하는 데 다 써버리고 그의 정부를 시켜 꿰르에게 돈을 빌어오게 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꿰르와 아녜스는 아주 가까운사이였으므로 아녜스가 꿰르를 방문했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연인관계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녀는 분명히 꿰르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궁중에서 그의 편이 되어주는 동조자였다. 아녜스가 죽은 뒤에 발견된 유언장에는 꿰르가 유언집행자로 지명되어 있다.
  또 아리종은 주인인 꿰르가 금 세공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대해 프랑스 역사가들에게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가 모피와가죽제품을 취급하는 상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금 세공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금세공인의 아들이었다는 설이유력하다. 꿰르는 값비싼 금속과 보석들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으며,젊은 나이에 브르스시의 조폐국장이 되었을 정도로 이러한 것들에 통달했었기 때문이다.
  아리종은 샤를르 7세의 다리가 길쭉하고 가늘어서  학의 다리와 같으며 바르와 왕가의 특징인 긴 코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샤를르 왕은 그러한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지금 전해지는 그의 초상을 보면 코가 아주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왕이 몸에 달라붙는 의복을 입었을 경우 다리가 너무 가늘어서 아주 우스워보였으며,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그의 다리를 학의 다리와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리종은샤를르 7세가 어떻게 해서든  프랑스를 구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또,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를레앙의 처녀 쟌 다크를 영국인에게 넘겨준 장본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샤를르 7세가 쟌 다크를 영국인에게넘겨 주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역사가들에게 논쟁거리로남아 있다.1431년 쟌 다크가 화형당할 당시 왕은 그녀를 구해내려 하거나, 그녀의몸값을 치르고 적에게서 그녀를 되찾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론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왕에게로 돌렸다.
  아리종은 아녜스가 죽자  주인 꿰르가  몹시 상심하고 있으며 그녀는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꿰르의 반대파에서는 그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아리종이 몹시 상심하였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여기서도 맞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여지껏 아녜스가 독살당한 것인지의 여부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딸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그러나 15세기 연대기 편자들은,  아리종처럼, 루이 황태자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있다. 그러나 아리종이 꿰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한 것은 사실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꿰르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궁정에 펴졌고 그가  그녀의 죽음에 관여琴다는  허위증언이 왕에게제출되었기 때문이다. 1451년 아리종의 주인 꿰르는 샤를르 7세의 정부인 아녜스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인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꿰르의 몰락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리종은 말하고 있다.  사를르 7세는 꿰르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 그를 파산시켜버렸다.  그런 와중에서 꿰르는 군대가 들이닥쳐 아리종이 다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아리종이 도망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종은 도망가지 않았다.  그 후 아리종은  꿰르가 준 물약을 마시고 자살을 했다.꿰르도 물약을 마셨는가 하고 브록샴이 묻자,  아리종은 그렇지 않다고대답했다. 
  꿰르는 아리종을 음독케 하고  왜 자신은 음독하지 않았을까? 꿰르가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보면 그의 무정한 행동에 대해서도 합당한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기독교적인 프랑스에서는 이단자에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 꿰르가 보호하지 않았다면 아랍인들은 살기가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다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약물을 먹여 그나마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한것은 꿰르의 배려였을 것이다.
  꿰르는, 결국, 지하 감옥에 투옥되고 그의 재산과 소유물은 몰수당했다.  그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고소는 중도에 취하되었고 다른 죄목들은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공판정에 올랐다. 꿰르는 변호사도증인도 부를 수 없는 가운데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한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 목숨을 보존했다.  그러나 모든 관공서의 출입이 금지되고 재산을 압수당했으며 출옥을 할 수도 없었다.
  체포된 지 삼년이 지나 꿰르는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국토를 가로질러 도주했지만,  로오느 강 가까이의 국경에서 잡혀 수녀원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꿰르는 자기를 따르는 약간의 추종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때 편지를 받은 그의 추종자 가운데는 과거에 선장이었던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이십여 명의 무장을 한사람이 한밤중에 그를 구출해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로오느 강을 건너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후 꿰르는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그는 교황의 도움으로 터어키를 토벌하는 십자군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이 원정에 나가 소아시아의 해안에서 싸우다가 1456년 부상을입고 예순살의 나이로 전사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아리종의 이야기는 참으로 인상깊은 전생담이다. 그녀의 폭넓은 지식은 15세기 당시 프랑스의 많은 분야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의복 형태와 복장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15세기 화가들에 대한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또 브르스에 있는 꿰르의 저택 안팎을 묘사해 줄 수 있었고,  꿰르가 소유했던 물건들과 그가 수집한 물건들에 정통했다.
  역사가인 미레 씨는 그의 저서에서 "꿰르의 집과 인생은 신비로 가득차 있다"고 적고 있다.   아리종의 이야기 역시 그를 더 신비롭게 하는것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종이 15세기 프랑스인인 꿰르에대하여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희귀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종은 초상화와 그림들이 걸려 있는 긴 복도끝의 방에  귀한 황금사과가 있다고 말했다. 터어키의 군주가 꿰르에게 황금사과를 주었다는것이다.  르와르 계곡에 사는 역사가나 박물관장 가운데도 이 황금사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꿰르의 집 현관 입구에 돌로 조각한 밀감나무가 있었다. 이 밀감나무는 그가 중동지역과 교역 관계를 가녔던 것을 상징하는 뜻으로 조각한 것이다.그리고 15세기 프랑스 사람들은 밀감을 황금사과라고 불렀다.  아리종이 말한  황금사과에대해서 사람들은 아무런 해명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역사학교수인 베일리 교수는 황금사과의 정체를 찾아 내었다. 그는 공문서 보관소에서 [꿰르로부터 왕실 재무성이 압수한 물품의 목록]을 뒤져 보다가 황금석류나무 열매라는 품목을 발견한 것이다.
  석류나무 열매는 크기와 모양이 사과와 아주 비슷하다. 아마도 그 황금열매는 그 후 누가 녹여서 썼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어쨌든 꿰르가황금사과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이 황금사과의 발견은 요크 시에서 '성모마리아 성당'의 지하실 발견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지하실이 발견됨으로써 유태인 레베카가 학살당했다는 전생기억이  거짓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구체적인 반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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