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 10장 영원한 자유인 ②
11. 보화(普化)스님
보화(普化)스님은 반산 보적(盤山寶積) 선사의 제자로 항상 미친 사람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하였습니다. 그당시 그런 기행을 하는 스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오직 임제(臨濟)스님만이 심중을 알고 흉허물없이 잘 지냈습니다.
하루는 진주(鎭州)의 저자거리에 나와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나에게 장삼 한 벌을 해달라."하며 졸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화스님에게 장삼을 지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이것은 내가 입을 옷이 아니다."하며 받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더욱 이상히 여기며 미친 중이라고 수군댔습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그 소문을 듣고는 장삼 대신에 관(棺)을 하나 보내니, 보화스님이 웃으며
"임제가 내 마음을 안다."하고는 그 관을 짊어지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동문 밖에서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동문 밖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는데보화스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오늘 여기서 죽지 않겠다. 내일 서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욕을 하고는 흩어졌습니다. 다음 날 서문 밖에 또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 않고 내일 남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습니다.다음 날 남문 밖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않고 내일 북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미친 중이 거짓말만 하여 사람을 속인다고 삿대질을 하며 분위기가 살벌하였습니다. 다음 날 북문 밖에는 과연 보화스님이 관을 메고 나타났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화스님은 관 위에 묵묵히 앉아 있는데 마침 한 길손이 지나가므로 그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이 관 안에 들어가 눕거든 관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해달라."고 하고는, 그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며 관 뚜껑을 닫으므로 그 길손이못질을 하고 떠나갔습니다. 길손이 성중에 들어가 그 이야기를 하니 진주성 사람들이 놀래며 북문 밖으로 보화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못질한 관 뚜껑을 열고보니 그 속에 있어야 할 보화스님은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때 마침 공중에서 은은히 요령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요령 소리가 나는먼 하늘을 바라보며 수없이 절을 하며 보화스님의 법력을 알아보지 못한데에 대해 통탄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화스님이 보인 전신탈거(全身脫去)의 이적입니다.이 사실은 선종 어록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임제록에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12. 왕가(王嘉)
왕가는 후진(後秦) 때 숨어사는 사람으로 유명한 도안(道安)스님과친하였습니다. 도안스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어 왕가가 찾아가니 도안스님이 말하였습니다.
"나와 같이 가지않으려는가?"
왕가가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아직 빚이 좀 있어서 빚을 갚고 가겠습니다."
그 뒤에 요장이 장안(長安)을 빼앗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 안에 있었는데, 요장이 물었습니다.
"내가 곧 천하를 얻겠는가?"
"조금 얻겠다."
요장이 그말을 듣고 왕가를 죽여버렸으니 왕가가 말한 빚이란 바로이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요장의 아들 요흥(姚興)이 천하를 얻었는데 요흥의 자(字)가자략이었습니다. 그러니 '조금 얻겠다'란 말은 자략이가 요장을 죽이고천하를 얻는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왕가가 죽던 날, 어떤 사람이 농상(壟上)에서 왕가를 만나니, 왕가가 자기를 죽인 요장에게 편지를 보내자 요장은 그 편지를 받아보고 크게 놀래며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13. 동빈거사(洞賓居士)
동빈거사(洞賓居士) 여순양(呂純陽)은 당나라의 현종(玄宗) 천보(天寶 742~755) 때 하양(河陽)에서 났습니다. 그 무렵 신선도(神仙道)를닦아 크게 유명해진 종리권(鐘離權)이 동빈을 보고 "세상의 영화(榮華)는 잠깐 동안이니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도를 배우라"고 권하였습니다.
동빈은 그 말을 좇아 종리(鐘離)를 따라 공부 길을 떠났습니다. 한곳을 지나다가 종리는 큰 금덩어리를 하나 주어 가지고 대단히 기뻐하며 말하였습니다.
"자네가 도(道)를 닦으러 가니 하늘이 그것을 알고 도(道) 닦는 밑천을 하라고 주는 것이니 이것을 팔아서 모든 비용에 쓰자."
그러면서 동빈에게 그 금덩어리를 주자, 동빈은 크게 성내며 그 금덩어리를 집어던지며 말하였습니다.
"내 들으니 도(道)하는 사람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데 금덩어리 하나 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놈이 무슨 도(道) 닦는 놈이냐? 너는 도인(道人)이 아니라 분명코 도적놈이니 너 같은 놈은따라갈 수 없다."
그러고는 뿌리치고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리는 크게 웃으며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금덩어리를 자세히 보라."
동빈이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이 아니라 썩은 돌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종리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깊은 산골에 가서 움막을 짓고 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종리가 어디 갔다 온다 하며 더 깊은 골짜기에 가서 무슨 약을 캐어오라 하므로, 동빈은 지시한 곳에 가서보니 아주 잘지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이런 깊은 산골에 어찌 이런 집이 있는고' 하는 의아심이 나서 그 집 마당에 가서 보니, 방안에서 세상에 보기드문 예쁜 여자가 반기며 나오더니, "우리 남편이 먼 길을 떠난 지 오래 되어 대단히 적적하더니 마침 잘 오셨습니다" 하며 동빈의 손을 잡아 당기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동빈이 번개같이 발로 차며 꾸짖기를, "이 요망한 년 이것이 무슨 짓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집과 그 여자는간 곳 없이 사라지고 자기 스승인 종리가 "허허" 하고 손뼉치며 웃고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동빈은 또 다시 시험당한 줄 알았습니다.
종리가 하는 말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재물과 여자인데 네가그만큼 뜻이 굳으니 이제는 너의 집에 가서 부모를 아주 하직하고 참으로 공부 길을 떠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리와 같이 자기 고향에 가서 집으로 갔는데 대문이 잠겨 있고 아무리 소리쳐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을 넘어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자기의 부모,형제, 처자가 누군가에게 맞아 죽어 사지(四肢)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온 마당에 가득 널려 있었습니다. 종리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벌벌 떨며 동빈더러 '그 시체를 전부 주워 모으라' 하였습니다. 동빈은 처음부터 조금도 놀라는 빛이 없었습니다. 시체를 주워 모으면서얼굴을 조금도 찌프리지 않고 마치 나무 막대를 주워 모으듯 아주 태연하였습니다. 종리가 그것을 보고 또 한 번 크게 웃으니 모든 시체는 간곳 없고 집안에서 자기 가족들이 반기며 쫓아나왔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종리에게 시험당한 줄 알고 동빈은 크게 탄복하며 수없이 절하였습니다.
그 뒤로 동빈은 신선도를 닦아 세상에 으뜸가는 신선이 되어, 공중을날아다니는 것을비롯하여 기묘한 재주를 많이 가졌습니다. 그리하여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황룡산(黃龍山)에서 회기(晦機) 선사의 도력(道力)에 항복하고 그 밑에서크게 깨쳐 불법(佛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천여 년 동안 그 몸 그대로 돌아다니며 많은 불사(佛事)를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너무나 유명한 사실들입니다.
일례를 들면, 송나라의 휘종(徽宗) 선화(仙化) 원년(元年 1119)에 휘종(徽宗) 황제가 임영소(林靈素)라는 사람에게 속아서 그와 모든 것을의논하는데, 문득 동빈이 그 자리에 나타나서는 임가를 꾸짖고 황제에게 속지 말라고 타이른 것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14. 유안(劉晏)
유안(劉晏)은 당나라의 대종(代宗 763~779) 때의 유명한 재상인데,어릴 적부터 이인(異人) 만나기를 소원하여 많은 애를 써 왔습니다. 한번은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웬 이상한 사람들이 서너명이 술을 마시고놀다가 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말하자, 다른 한사람이 "왕십팔(王十八)이 있지 않는가!"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깊이 간직하였습니다.
그 후 자사(刺史)가 되어 남중(南中)으로 가서 형산현(衡山縣)을 지날 때 그 현청(縣廳)에서 쉬었습니다. 때는 봄철인데 좋은 채소들을 내어오는데, 하도 이상한 것들이 많기에 물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좋은 것들을 구하여 왔느냐?"
"여기 왕십팔(王十八)이라는 채소 가꾸는 사람이 있는데 솜씨가 참으로 묘합니다."
그 말에 문득 이전에 이름을 들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을 한번 가서만나보자' 하였습니다. 관인들이 그를 불러오려는 것을 말리고 자기가직접 가서 보았습니다.
왕십팔은 떨어진 의복에 그 모양이 대단히 흉하였는데, 유안을 보더니 겁을 내며 벌벌 떨면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그를 데리고가서 술을 권하니 겨우 조금만 먹었습니다. 무엇을 물어도 도무지 '모른다'고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더 기이하게 여겨 '같이 가자'하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못 이겨 같이 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배안에서 유안은 자기 가족에게 왕십팔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모두 예배하도록 하였습니다.
며칠을 가다가 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더니 계속하여 똥을 싸서배안의 사람들이 크게 곤란해하였습니다. 모두가 그를 원망하는데 유안만은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앓더니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유안은 크게 슬퍼하며 정성을 다하여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뒤에 유안이 벼슬이 바뀌어 딴 곳으로 갈 때 또 형산현에 들렀더니,군수가 나와 반겨 맞으며 그때에 데리고 갔던 왕십팔이 얼마 후 돌아와서 '도로 가라' 하기에 '그만 돌아왔다'고 말하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크게 놀라 '지금도 있는가?' 하고 확인한 뒤에 그 처소에가보니, 빈 집뿐이었습니다. 이웃 사람 말이 '어제 저녁에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울며 여러 번 절하고 나서 사람을 보내어 옛날에 그를 장사지낸 묘를 파보니 과연 의복뿐이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듣고 그 때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몇 해 뒤에 유안이 큰 병이 들어 정신을 잃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왕십팔이 찾아와서 유안에게 약 세 알을 먹이자 배 속에서 큰소리가 남과 동시에 유안이 일어나 앉는데 병이 씻은듯이 나았습니다.가족들로부터 왕십팔이 병을 낫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유안이 일어나울며 절하자, 왕십팔이 말하였습니다.
"옛정을 생각하여 와서 구하였는데 앞으로 삼십 년은 더 살 것이다.삼십 년 뒤에 만나자."
그러고는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아무리 붙들어도 소용없고 많은 보물을 주어도 "허허" 크게 웃기만하고는 받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그 후 유안은 재상(宰相)이 되어 천하의 정사를 잘 다스리다가 못된사람의 중상으로 대종(代宗) 황제의 미움을 받아 충주(忠州) 땅에 귀양을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왕십팔이 또 찾아와서는 웬 약을 주어 받아먹으니, 삼십 년 전에 먹은 약이 그대로 다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왕십팔은 그것을 물에 씻어 지니고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습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유안이 죽자, 이 신기한 사실이 세상에 널리 전하여졌습니다.
15. 법수(法秀)
법수(法秀)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가 현종(玄宗) 개원(開元) 26(738)년에 꿈에 이상한 스님을 만났는데 가사(袈裟) 오백벌만 지어 회향사(廻向寺)에 보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법수가 곧 가사를만들어 회향사를 찾아가려 하였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길에서 꿈에서 본 그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탁한 가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스님은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사는 다 되었으나 회향사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법수가 대답하자, 그 스님이
"따라오라."하기에, 며칠 동안 따라가다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아주 궁벽한 곳으로 가서 한 곳에 이르니 돌로 쌓은 단(壇)이 나왔습니다.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스님과 함께 오래도록 예배드리자, 어느 사이엔가 층암절벽 위에 있는 많은 기와 집들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과 같이 올라가 보니 그곳에 과연 회향사라는 현판이 보였습니다. 건물과 경치가 모두 인간 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던 훌륭한 것들이었으며,대중스님들도 많은데 다 성인들 같이 보였습니다. 그 스님은 가사를 전부 나누어주고 나서 한 빈방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이 당나라 임금이 불던 것이니 가져가 주라."하였습니다. 하룻밤도 더 못자게 해서, 이튿날 산을 내려와 쳐다보니절은 간 곳 없고 오직 바위만 보일 뿐이였습니다.
법수가 여러 차례 예배한 뒤에, 대궐로 가서 옥퉁소를 올리고 그 연유를 말하니, 현종 황제가 받아 불어보는데 정말로 많이 불던 사람같이소리가 잘 났습니다. 그래서 현종은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난 문장가인이태백(李太白)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자신은 옥퉁소를 불며 노래하고 양귀비를 시켜 춤추게하니 마치 인간을 떠난 신선놀음과 같았습니다. 이 소문이 천하에 퍼지자 기이하다고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6.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리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남에게 얻어먹고 다니는 거지 스님인데 살림살이라고는 큰 포대 하나 뿐이었습니다. 포대 하나만 들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뒷꼭지를 똑똑 치면서 돈 한닢 달라 하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었습니다. 또, 예를 들어, 생선 장수를 보면 생선 한 마리만 달라고 하여 한 입만 베어 먹고포대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무엇이든 눈에 뛰기만 하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차 가뭄이 계속될 것 같으면 흐린 날에도 삿갓을 쓰고 다니고, 장마가 계속될 것 같으면 맑은 날인데도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식으로 앞일을 예견하는 데 하나도 틀리지않았습니다.
포대화상이 돌아가신 때(916년)에는 명주(明州) 악림사(嶽林寺) 동쪽행랑 밑에서 법문을 하면서 앉은 채로 입적했습니다. 그 때 이런 게송을 남겼습니다.
미륵, 참 미륵이여
천만억 몸을 나투는구나.
때때로 사람에게 보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구나.
포대화상의 죽은 시체는 전신(全身)을 그대로 절 동당(東堂)에 모셔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 곳곳에서 포대화상이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17. 배도(杯渡)스님
배도(杯渡)스님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성도 이름도 알 수 없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큰 강을 만나면지고 다니던 걸망에서 조그마한 접시를 꺼내서 강물 위에 뛰우고는 그것을 타고 강을 건너곤 하여, 사람들이 '접시를 타고 건넌다'는 뜻의배도(杯渡)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접시를 타고 물을 건너는 스님이 접시가 없다고 강을 못 건널까닭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 장난입니다.
배도스님은 그렇게 하며 여러 곳을 다니며 중생을 교화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죽은 뒤에도 이것 저곳에서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18. 지공(誌公)
지공(誌公) 화상은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케한다 하여, 스님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자유롭게 다니는 지공 화상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옥졸이 잘못 지켜서 그런가 하고 옥에 가보면 스님은 옥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받고서 무제는 크게 놀랐습니다. 무제는 지공화상을궁중에 모셔놓고, 잔치를 베풀어 참회를 올리며,
"스님, 몰랐습니다. 옥에 모실 것이 아니고 대궐로 모시겠습니다. 궁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법문을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습니다.
지공 화상은 그 청을 받아들여 궁중에 머물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스님이 계시던 절에서도 예전과 똑같이 지공 화상이 제자들을 모아놓고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리가 없다 하며 가서 알아보니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양나라 무제는 크게 발심하여, 천자 자리에 있던 40여년 동안 불교를 더없이 융성시켰습니다.
지공스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무제가 물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내 탑이 무너질 그때까지…"
지공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무제가 몸소 종산(鐘山) 정림사(定林寺)에가서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전신(全身)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지공 화상이 구름 위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장사 지내러 온 수천, 수만의 대중이 그것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얼마나 환희심을 내었겠습니까?
그 일을 기념하여 개선사(開善寺)라는 절을 짓고 천하에서 으뜸가는탑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무제는 급한 생각에 목조탑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나무로 지은 그 탑이 다 만들어지자, 무제는 비로소 '아차! 잘못했구나. 지공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탑이 무너질 때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목조탑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탑을 헐고 새로이 석조탑을 짓기로 결심하고는, 사람들에게 시켜 그 목조탑을 헐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후경이 쳐들어와서 양 무제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양 무제가 어느 때인가 지공 화상께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목의 두 곳을 가리켰습니다.그 때에 무제는 '무슨 말씀인가, 목이 달아난다는 뜻인가?' 하고 의아해 하였습니다.
나중에 후경이 쳐들어오자 그제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공스님이 목을 두 번 가리킨 것은 바로 목 후(喉) 자, 목 경 자를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19. 사명대사
이러한 무애자재한 경계는 옛날 이야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가까운 보기로 사명대사의 비석을 들 수 있습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유명한 스님입니다. 스님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밀양의 무안입니다.나라에서는 그곳에 스님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그런데 이 비석에서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에 좋은 일이나 궃은 일이 생기려 하거나, 아니면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나려고하면, 이 비석에서 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물이 나오는데, 조금 흐르다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양이 나온다고 합니다. 많이 나올 때는대두(大斗) 일곱 말에서 여덟 말까지도 나왔는데, 그동안 동학혁명,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운동, 그리고 8?15해방, 6?25사변, 여순반란사건, 4?19의거, 5?16혁명 때 그 돌에서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5?16 때에는 다섯 말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그 때각 신문에서 이 사실을 많이 보도하였는데 특히 동아일보에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신문을 통해서 보고, 또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믿기는 어려워 직접 가보았습니다. 비석은 무안 지서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흙으로 대를 모아 놓고 여러 층층대를 올라가서큰 돌로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새까만 돌로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마치 방금 만든 비석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레 다시 지붕을 씌워 놓고비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습기 같은 것은 찾아 볼래야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비각 주변에는 비각을 지키는 집이 서너 채 있고 구연이라는 노스님이 계시는데, 표충사 주지스님을 오래 한 분이었습니다. 그 노장스님이말씀하기를, 비석에서 물이 나오는데 샘처럼 펑펑 쏟아지는 게 아니고글자 사이사이의 매끄러운 데에서만 마치 구슬 맺히듯 땀 나듯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 이 물은 비석 전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석 밑에는 물이 고이게 되어 있어서 그 양을 알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비석의 물빛은 보통 물빛과 같고, 또 물맛도 보통 물맛과 같다고 합니다. 내가갔을 때는 물이 나오는 날이 아니라서 그냥 사진을 몇 장찍고 내려 왔습니다. 가는 길이 무안 장날이었는데, 사람들을 잡고 사명대사 비석 이야기를 하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비석에서 땀이 난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했습니다. 물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글자에는 전혀 물이 흐르거나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사를 끝내고 표충사를 들러서 부산으로 왔는데 당시에 동아대학교총장으로 있던 분이 달려와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임이분명하다고 이야기 해 주었더니 "스님께서도 남의 말만 듣고 믿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삼십년 검사 생활을했다는데, 그렇다면 그 때에 증인들 말을 안 믿고 또 보지 않은 것은재판 안 하고 직접 본 것만 재판합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수백 명의 증인이 있으면 확실한 것입니다. 사면대사가 그 비석을 직접 만든것이 아니라도 그것은 사명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법당의 부처님도 부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과 관계가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절도 하고 기도도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사명대사는 사백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물을 흐르게 해서 나라의중대사를 예시하는 신기한 힘을 아직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명대사의 무애자재한 능력이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보기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의 무한한 능력을 개발한다면, 귀종 선 선사도 될수 있고 또 원효스님의 스승인 혜공스님도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큰 스님들처럼 자유자재한 해탈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본이 되는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영겁불망이니, 곧 영원토록 다시 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겁불망,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해탈의 경계입니다.
이때 대중들 가운데서 한 스님이 일어서며 말했다.
"스님의 너무도 넓고 박학다식한 법문에 저희들 무지몽매한 중생들
이 불같은 의심을 금할 수 없어서 몇 가지 여쭈어 보아야겠습니다."
"몇 가지 물어 보겠으면, 천천히, 날씨도 시원할 때, 그 때 며칠이
고 이야기해 보자. 이리 더운데, 대중이 모두 네 이야기 때문에, 그
래 네 이야기 들으며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냐, 쌍놈아."
"그러면 스님은 어떤 분인지, 이것 하나만은 꼭 여쭙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냐고! 내가 성철이지. 해인사 방장 성철, 나이는 칠십이
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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