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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10장 영원한 자유인  ①

 

  1. 선로(宣老)스님

  송(宋)나라 때, 시인이며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곽공보(郭功甫)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을 잉태할 때 그의 어머니가 이태백의 꿈을 꾸었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이태백의 후신(後身)이라고 했는데,  뛰어난 천재였다고합니다.
  곽공보의 불교스승은 귀종 선(歸宗宣) 선사인데 임제종의 스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귀종 선 선사가 곽공보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앞으로 6년 동안 곽공보의 집에 와서 지냈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곽공보는스님께서 연세가 많긴 하지만 어째서 자기의 집에서 6년을 지내려 하시는지 알 수 없어 이상하게 생각 하였습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안방에서 잠을 자다가,  문득 부인이 큰 소리로  "아이쿠, 여기는 스님께서들어오실 곳이 아닙니다."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깨어났습니다.  부인이꿈에 큰스님께서  자기들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왔다고 하는 말을 듣고곽공보는 낮에 온 편지 생각이 나서  불을 켜고 부인에게 그 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사람을 절에 보내 알아보니 어젯밤에 스님께서 가만히앉아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편지 내용과 꼭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고나서 곽공보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편지를 보낸 것이나 꿈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귀종 선 선사가  곽공보의 집에 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달리 지을 수가 없어, 귀종 선 선사의 '선(宣)'자를 따고, 늙을 '노(老)'를 넣어 '선로(宣老)'라고 했습니다.
  생후 일 년 쯤 되어  아이가  말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구를 보든'너'라고 하며 제자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는데 스님의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어린애 취급을 할 수가 없어 무두다 큰스님으로 대접하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이의 엄마,아버지도 큰절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당시 임제종의 정맥(正脈)을 이은 유명한 백운 단(白雲端) 선사가 이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세살 되는 어린애를 안고 마중을 나갔더니이 아이가 선사를 보고 "아하, 조카 오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생의 항렬로 치면 백운 단 선사가 귀종 선 선사의 조카 상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니 "사숙님" 하고 어린아이에게 절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백운 단 선사 같은 큰스님이 넙죽 절을 하였던 것입니다. 백운 단 선사가  "우리가 이별한 지 몇 해나 됐는가?" 하고 물으니, 아이는 "4년 되지. 이 집에서 3년이요,  이 집에 오기 1년 전에 백련장에서서로 만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을 말하자 백운 단 선사는 아주 깊은 법담(法談)을 걸어 보았습니다. 법담을 거니 병에 담긴 물이 쏟아지듯 막힘이 없이 척척 받아 넘기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법담은 장황하여  다 이야기 못하지만 <전등록(傳燈錄)>같은 불교 선종 역사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귀종 선 선사의 전생담입니다.
  그후 6년이 지나자  식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는 "본래 네 집에 6년만있으려 하였으니 이제 난 간다" 하고는 가만히 앉아 입적 했습니다. 이처럼  자유자재하게 몸을 바꾸는 것을  격생불망(隔生不忘)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전생, 후생으로 생을 바꾸어도 절대로 전생의 일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원관(圓觀)스님

  중국의 역사책인 <당서(唐書)>에 나오는 것으로, '이원방원관(李源訪圓觀)'이라 하여 이원이라는 사람이  원관이라는 스님을 찾아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나라 안록산의 난리(755~763) 때  당 명황(唐明皇)의 신하중에 이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원은 그의 아들입니다. 이증은 당 명황이안록산의 난리로 촉나라 성도로 도망갈 때 서울인 장안(長安)을지키라는 왕명을 받고 안록산과 싸우다 순국했습니다.  뒤에 국란이 평정되고환도한 후,  나라에서 그 아들인 이원에게 벼슬을 주려 했으나 그는 도를 닦겠다고 하며 거절하고는 자기의 큰 집을 절로 만들고 혜림사(蕙林寺)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원관이라는 스님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고승전(高僧傳)>이나 <신승전(神僧傳)>에는 '원관'으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더러 '원택(圓澤)'이라고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보통 흔히볼수 있는 스님으로 마음 씀씀이가 퍽 좋았습니다. 
  한번은 원관스님과 이원 두 사람이  아미산(峨眉山)의 천축사 구경을갔습니다. 구경하는 도중에 어느 지방의 길가에서 한 여인을 보고 원관스님이 "내가 저 여자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태어난 지 사흘 후에 찾아오면 당신을 보고 웃을 테니 그러면 내가 확실한 줄 아시오.  그리고열두 해가 지난 뒤 천축사(天竺寺)로 찾아오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미산으로 가다가 이렇게 말하고 그는 길가에 앉아 죽어버렸습니다.  원관스님의 이야기가 너무 이상해서 이원이 스님의 말대로 수소문해서 여인의 집을 찾아가 보니  사흘 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이 아이를 보자 그 아이는 이원을 보고 웃는 것이었습니다.이원이 이로써 그 아이가 원관스님의 환생인 줄 확실히 알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사람들이 스님께서 가시면서 이번에 가면 안 온다고말씀하시고,  어느 곳의 누구 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모두 말씀하셨다고했습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뒤 팔월 추석날 이원은 전당(錢塘) 천축 사로 찾아갔습니다. 갈홍천(葛洪川)이라는 개울이 있는 곳에 이르자 달이 환히밝은데 저쪽을 보니 웬 조그만 아이가  소를 타고 노래를 하며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 오더니  "이 선생은 참으로 신용있는사람이오. 그러나 가까이는 오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을 어기지 않고 찾아왔으니 신용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세속 욕심이 꽉 차 마음이 탁하니 가까이 오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이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멈칫멈칫하며 서 있는데  아이는 저만큼 떨어져 소를 타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생돌 위 옛 주인이여
    달구경 풍월함은 말하지 마라.
    부끄럽다 정든사람이 먼 곳에서 찾아 오니
    이 몸은 비록 다르나 자성은 항상 같다.
    전생 내생 일이 아득하여 알 수 없는데
    인연을 말하고자 하니 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
    오나라 월나라 산천은 이미 다 보고
    도리어 배를 돌려 구당으로 간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가는 것을 보고 이원은 그제서야 그 스님이 도를 통한 큰스님인 줄 알고, 더 가까이 하여 법문을 듣고 공부하지 못한것을 후회하며 돌아가서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뒤에 나라에서 이원에게간이대부라는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이원은 이를 거절하고 팔십여 세까지 살았습니다.
  이것이 '이원방원관' 이야기의 내용으로, 이 이야기도 영겁불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전생의 일을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고 있으며 자유자재한 것입니다.
  노래 가운데 '삼생돌 위에 옛주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느냐하면 천태지의 선사의 스상인 혜사(慧思)스님을 말합니다. 혜사스님(515~577)은만년에 대소산(大蘇山)에서 남악형산(南嶽衡山)으로  처소를 옮기고 형산의 천주봉(天柱峰) 봉우리밑에 있는  복암사(福岩寺)라는  절에 주석(住錫)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전생에도 이 복암사에서 대중을 교육시켰는데  그 전생일이 그리워서 이곳으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대중을 거느리고 나가더니 아주 경치가 뛰어난 한 곳에 이르러  "이곳이 옛날 절터야.  지금은 오래되어 아무 자취도 없지만, 내가 전생에 토굴을 짓고공부하던 곳이야.  근처를 파 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키는 대로그 주변을 파 보니 과연 기왓장과 각종 기물이 나왔습니다. 또 큰 바위가 있는 곳에 이르러  "이곳은 내가 앉아서 공부하던 곳이야.  죽어 이바위 밑으로 떨어져  시체가 그대로 땅에 묻혔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또 땅을 파 보니 해골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혜사스님의 삼생담입니다.금생에는 복암사, 전생에는 토굴터, 그 전생은 바위 위이므로 삼생석인것입니다.
  혜사스님은  그 도력이나 신통이 자재한 유명한 스님으로, 그런 분이분명히 증거를 들어 확인한 것이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삼생의 해골이 나온 그 자리에 삼생탑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유명한남악 혜사스님의 삼생탑으로,  유명한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원관스님이 말한 삼생석 위의 옛주인이란 바로 혜사스님을 가리킨 것입니다. 곧 혜사스님이 돌아가셨다가 나중에 당나라에 태어나서원관이라는 스님으로 숨어 살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모든 생활이 범승(凡僧)과 같았지만 실제 생활은 자유자재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대자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3. 불도징(佛圖澄)스님

  신승(神僧) 불도 징(佛圖澄)은 인도 사람입니다.   도(道)를 통한 후중국으로 와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는데  그 가운데서 후조(後趙)의황제 석호(石虎)가 제일 신봉하며 지도를 받았습니다.   불도 징스님이349년 12월 8일에  석호에게 하직하고 입적하니  석호가 통곡하며 크게장사지냈습니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서 옹주(壅州)에서 스님들이 왔는데  '불도 징대사를 보았다'고 하기에 탑을 헐고 보니 정말 아무 것도 없고 큰 돌덩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석호가 그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습니다.
  "돌(石)은 나의 성인데  큰 스님이 나를 묻고 갔으니 나도 또한 오래살지 못하리라."
  그 뒤에 과연 황제 석호가 죽고 그 나라까지 망하였습니다.

        
    4. 지자(智者)스님

  수나라의 양제(瘍帝) 대업(大業) 원년(元年;605) 11월 24일,  천태산지자 대사(智者大師) 제삿날에, 양제가 그 신하 노정방(盧正方)을 보내어 천승재(千僧齋)를 올렸습니다. 사람 수를 엄밀히 조사하여 정돈하였는데 나중에 보시를 돌릴 때 보니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더 있는지는 모르나  확실히 한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다들 말하였습니다.
  "지자 대사가 몸을 변하여 재(齋)에 참여한 것이다."
  모두들 가서 지자탑의 문을 열고 보니 과연 빈 탑이었습니다. 그런데그 이튿날 다시 보니  지자 대사의 육신은 여전히 탑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5. 은봉(隱峰)스님

  당나라의 헌종(憲宗) 원화(元和) 12년(817년)  은봉(隱峰) 선사가 채주(蔡州)를 지나가는데, 그때 오(吳)의 원제(元濟)가 난리를 일으켜 관군과 채주에서 크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은봉 선사가 그것을 가련하게여겨서 육환장을 타고 몸을 공중에 날리니  양군이 보고 감복하여 싸움을 그쳤으며,  얼마 있지 않아서 오의 원제가 항복하였습니다. 은봉 선사는  이러한 신통을 부린것이 부끄러워  오대산으로 가서 금강굴(金剛窟) 앞에 거꾸로 서서 죽으니  옷자락까지 전부 몸을 따라 거꾸로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화장을 하려고 몸을 밀어도 쓰러지지 아니하여 모두들 더욱 탄복하였습니다. 선사의 여동생으로 출가하여 공부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달려와서는 스님을 보고 꾸짖어 말하였습니다.
  "몸이 생전에 돌아 다니며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을 속이더니 죽어서도 또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한다."
  이렇게 소리 지르며 손으로 미니 마침내 죽은 몸이 쓰러졌습니다.

    6. 혜숙(惠宿)스님

  혜숙(惠宿)은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 597~631) 때 스님으로 적선촌(赤善村)에 이십여 년 동안 숨어 살았습니다.  그 때 국선(國仙)인구담이 그 근처에 가서 사냥을 하니,  혜숙도 같이 놀기를 청하여 구담과 함께  사냥을 하였는데,  많은 짐승을 잡아  삶아서  잔치를 하였습니다.
  혜숙은 고기를 잘 먹다가 구담에게 문득 물었습니다.
  "더 좋은 고기가 있는데 드시렵니까?"
  그 말에 구담이 좋다고 하자, 혜숙이 한 옆에 가서 자기의 허벅지 살을 베어다 구담 앞에 놓는 것이었습니다. 구담이 깜짝놀라니 혜숙이 꾸짖었습니다.
  "내 본래 그대를 어진 사람으로 알았는데  이렇듯 살생함을 좋아하니어찌 어진 군자의 소행이라 할 수 있겠소?"
  말을 마치고 가버린 뒤에 그가 먹던 쟁반을 보니 담았던 고기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구담은 이 일을 매우 이상히 여겨 진평왕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그를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신이 가보니 혜숙은 술집에서 술이 많이 취하여 여자를 안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본 사신이 나쁜 놈이라고 만나지 않고 궁중으로 되돌아가는데  얼마 안가서 또 혜숙을 만났습니다.  혜숙의 말이 "신도 집에 가서 7일재(七日齋)를 지내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신이 놀라 왕에게 가서 전후사를 말하여 왕이 신도 집과 술집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니 다 사실이었습니다.
  수년 후 혜숙이 죽으니  마을 사람이 이현(耳峴) 동쪽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장사 지내는 바로 그 날 마침 이현 서쪽에서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길가에서 혜숙을 만나게 되어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이곳에 오래 살았으니 딴 곳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헤어진 후  조금 있다가 돌아보니  혜숙이 공중에서구름 타고 가는 것이 뚜렷이 보였습니다.  그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하여 급히 이현의 동쪽에 와서 보니 장사 지낸 사람들이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듣고 묘를 파헤쳐보니  묘 속에는 과연 아무 것도 없고 헌신 한 짝뿐이었습니다.

        
    7. 혜공(惠空)스님

  혜공(惠空)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 632~646) 때 사람인천진공(天眞公)의 집 종의 아들로서,  아명(兒名)은  우조(憂助)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이 생각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아도  그것을 다알아 맞추는 등의 신기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천진공은 그에게 예배하며 "지극한 성인이 내 집에 계신다"고 크게 존경하였습니다.
  그가 자라서스님이 되어서는 항상 술을 많이 먹고 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미친 사람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또 번번이 깊은 우물 속에 들어가서  여러 달 동안  나오지 않곤 하였습니다.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에 있었는데, 그 때에 원효(元曉)대사가  경전의 주해(註解)를 지으며 어렵고 의심이 나는 것은 혜공에게 물었습니다.
  하루는 원효와 같이 강에 가서 고기를 잡아 먹고  똥을 누는데 산 고기가 그대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혜공이 원효를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汝屎吾魚]"라고 하니,  그 뒤로절 이름을 오어사(吾魚寺)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하루는 구담 공이 많은 사람들과  산에 놀러 갔다가 길에 혜공스님이죽어서 그 시체가 썩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성중(城中)에 돌아와 보니 혜공스님은 여전히 술에 취해서 노래 부르고춤추며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 진언밀종(眞言密宗)의 고승 명랑(明朗)이 금강사(金剛寺)를 새로 짓고 낙성을 하는데,   당대의 유명한승려가 다 왔으나 오직 혜공스님만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명랑이향을 꽂고 마음으로 청하자,  혜공스님이 그것을 알고  "그렇게 간절히청하므로 할 수 없이 온다" 하며 그 곳에 왔습니다. 그 때에 비가 몹시왔으나 옷이 조금도 젖지 않았을 뿐더러 발에 흙도 묻지 않았습니다.
  혜공스님은 승조(僧肇) 법사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 자기가 전생에 지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자신이 전생에 승조 법사였다는 말입니다. 승조 법사도 깨달음을 얻어 자유자재한 분이었습니다. 혜공스님이 배운 바 없어도  이처럼 원효스님이 모르는 것을 물어볼 정도이며 또 신통이 자재하여 분신까지 하는 것을 보면,  스님의 말을 거짓말이라 하여 믿지 못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혜공스님은 죽을 때에 공중에 높이 떠서 죽었는데, 나중에 화장을 하니 사리(舍利)가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8. 법연(法演)스님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오조 법연(五祖法演) 선사는  오조산(五祖山)에 살았다고 해서 오조 법연 선사라고 불렸습니다. 이 스님 밑에 불감(佛鑑), 불안(佛眼), 불과(佛果)의 세 분 스님이 있었는데,  이 분들을 삼불(三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분 스님의 자손이 천하에 널리퍼져 그뒤로 불교는 선종 일색이 되었고, 또 선은 오조 법연 선사의 법손 일색이 되었습니다.
  그 오조 법연스님이 오조산에 처음 들어가면서  오조 홍인(弘忍)선사의 탑인 조탑(祖塔)에 예배를 하였습니다.  오조 홍인 선사가 돌아가신지 이미 오륙백년이 지났지만  육신이 그대로 탑에 모셔져 보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조탑에 예배를 드리면서 오조 법연 선사가 이렇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옛날 이렇게 온몸으로 갔다가
    오늘에 다시 오니 기억하는가
    무엇으로 증거 삼는고
    이로써 증거 삼노라
    
  이것은 오조 홍인 선사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곧 그전의 오조 홍인선사가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조 법연 선사가 되어 돌아왔는데 알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이것이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조 홍인 선사는  사조 도신(道信) 선사의 제자입니다. 도신 선사는나이가 많도록 제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에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은 사람(栽松道者)이 있었는데,  나이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노인이 도신 선사에게 와서 "스님께서 연세가 많은데 법(法)제자가 없으니 제가 스님의 제자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그래서 도신 선사가  "당신도 나이가 많아 나와 같이 죽을 터인데 제자가 되어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고 대답했더니,  그 노인은  "그럼 몸을바꾸어 오면 어떻겠습니까?"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 노인이 산 밑에 있는 마을의  주(周) 씨 집의 아들로 태어나 사조도신 선사를 찾아와서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오조 홍인 선사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조 홍인 선사는 재송 도자(栽松道者)의 후신이고,  오조 법연 선사는  오조 홍인 선사의 후신인 것입니다. 이 삼대(三代),  곧,  재송도자에서 도조 홍인 선사로 이어지는 삼대의 전생은모두 밝혀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겁불망하는 열반묘심을 성취한증거인 것입니다.
  열반묘심을 성취하면 정신적으로만 어떤 작용이 있다고 생각 하지만,그러나 육체적으로도  뛰어난 작용이 있어 분신도 하고 또 부사의(不思議) 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성상 불이(性相不二)'라하여 성과 상이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  '심신일여(心身一如)'라고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라 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열반묘심을 성취하면 육체적으로도 그만큼 자유자재한 활동이 자연히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신일여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면, 물질적인 것에 자유자재한 색자재(色自在)를 얻을 수 있고,  심리적인 것에자유자재한 심자재(心自在)를 얻을 수 있으며, 또 모든 법에 대한 자유인 법자재(法自在)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해 자재를 얻게 되면 여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진여위에서자유자재하게  분신(分身)도 하고  화신(化身)도 하여 중생을 제도하는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유자재, 영겁불망의 크고 작은 마음은 누구든 열심히 수도하여  자기 자성(自性)을 확철히 깨침으로써 성취하게 됩니다.  이런마음을 성취하면 자기 해탈  곧 색자재, 심자재, 법자재는 자연히 따라오게 마련인데, 이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이며 또 부사의 해탈경계(不思議 解脫境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9. 달마스님

  달마스님을 보기로 들어보겠습니다. 불교인이라면 거의 알고 있는 달마스님의 이야기가운데 '척리서귀'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짝 하나를 들고 서천(西天) 곧 인도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慧可)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시자 웅이산(熊耳山)에다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송운(宋雲)이라는 사람이 인도에 가서많은 경(經)을 수집하고 귀국하는 길에 총령(파밀고원)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어떤 스님 한분이신짝 하나를 메고 고개를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님, 어디로 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제 너희 나라와는 인연이 다하여 본국으로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효명제(孝明帝 ; 516~528)]은 죽었어.  가 보면 새 임금이 계실 테니 안부나 전하게"라고 말씀하시고는 고개를 넘어가셨습니다.
  송운이 돌아와 보니 과연 먼저 임금은 죽고 새 임금[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靜帝)]이 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달마스님을만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달마스님은 돌아가신 지가 여러해가 지났다고 했습니다.  송운은 너무 놀라 자기 혼자만 본 것이 아니라 수십 명이 함께 달마스님을 보았으니  절대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여 달마스님의 묘를 파 보기로 했습니다.무덤을 파보니 빈 관만 남아 있고  관 속에는 신 한짝만 놓여 있었습니다.
  달마스님의  '척리서귀'라는 말은  선종에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사후(死後)에도 이처럼 대자유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에 대한 조주스님의 법문이 있습니다.
  
    조주 남쪽 석교 북쪽
    관음원 속에 미륵이 있도다.
    조사가 신 한짝 남겨두었으나
    지금에까지 찾지 못하도다.
  
  '조주스님' 하면 천하만고에 다 아는 대조사로서, 달마스님과 연대가그리 떨어지지 않은 때에 사셨습니다.  그런 조주스님이 달마스님이 신한짝 버리고 간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이 게송 하나만 보아도,  달마스님이 신 한짝만 들고 간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런 것이 아니며  반드시 대자유가 따릅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기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10. 승가(僧伽)스님

  서기 708년  당나라의 중종(中宗)황제가  승가(僧伽) 대사를 국사(國師)로 모셨습니다.  대사의 속성은 하(何)씨인데, 어느 때는 몸을 크게도 나투고 어느 때는 작게도 나투고 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十一面觀世音菩薩)의 얼굴로도 나투고 하여 그 기이한 행동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710년 3월 2일에 돌아가시자 중종이 장안 근처의절에다 그육신을 모셔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도성 안을 덮어서 사람들이 코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중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대사가 본래 사주(泗州)  보광왕사(普光王寺)에 많이 계셨는데 죽은육신도 그리로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라고 신하들이 황제께 아뢰었습니다.
  그래서 중종은 향을 피우고 마음으로 축원하기를,
  "대사의 육신을 보광왕사로 모시겠습니다."하자, 잠깐 사이에 온 장안에 향기가 진동하였습니다.
  그해 오월 보광왕사에다 탑을 세우고 대사의 육신을 모시니, 뒤로 탑위에 자주 나타나서 일반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그 탑에 와서 소원성취를 빌게 되었고 그럴때마다 가서 탑 위에 모습을나타내곤 하였는데, 그 얼굴이 웃음을 띠우고 자비로우면 소원성취하고찡그리면 소원성취하지 못하는 등 신기한 일이 많아서 세상에서 부르기를 사주대성(泗洲大聖)이라 하였습니다.
  또 799년 7월에는 궁중에 나타나서  그 때에 천자로 있던 대종(代宗)에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대종이 크게 감격하여 그 화상(畵像)을 그려 궁중에 모셔놓고 항상 예배하였습니다.
  822년에는 큰 화재가 나서 대사의 탑이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대사의 육신은 조금도 상함이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869년, 나라 안에 큰 난리가 났을 때에, 도적들이 사주(泗洲)로 쳐들어오다가 대사가 탑 위에 몸을 나타내자 놀라서 다 물러갔습니다. 당시의종(懿宗)황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증성대사(證聖大師)라는 호를 올렸습니다.
  1119년 당나라의 서울에 대홍수가 났을 때였습니다.  대사가 또 궁중에 나타나므로 천자인 휘종(徽宗)황제가  향을 꽂고  예배 하였습니다.그러자 대사가 육환장을 흔들며 성(城) 위로 올라가니,  성 안의 온 백성들이 다 보고 기꺼워하는 가운데 큰 물이 곧 빠져버렸습니다.
  이상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을 몇 가지 보기를 든 것일뿐으로, 그밖에도 기이한 사적(事蹟)은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듯이 승가 대사가 사후에 보광왕사의 탑 위에  그 모습을 자주 나타낸 사실은 그 근방 사람들이 다 보게 됨으로써  천하가 잘 아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실이 확실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가리켜  '사주 사람들이대성을 보듯 한다(泗洲人見大聖)'는 관용구까지 생겨나게 된 것을 세상이 다 잘 아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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