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경어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란 곧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의 성품은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고요하여 한 물건도 없고 한 법도 받는 바 없으며, 닦아서 증득(證得)할 것도 없다. 신령스럽게 밝아 만덕(萬德)을 구족(具足, 다 갖춤)했으며, 묘용(妙用)이 항하(恒河,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아서 수행과 증득을 요하지 아니한다. 다만 중생이 미혹하여 생사에 빠져 오랜 겁이 지나도록 탐진치애(貪瞋痴愛)와 망상집착에 사로잡혀 오염이 깊은 까닭에 부득이 수행과 증득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도 이른바 수행이란 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不祥之物]이라서 부득이한 경우에나 쓴다고 한 것이다.
이제 타칠(打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이미 3주 반이 지나갔는데 이제 3주 반이 남아 있다. 남은 3주 반은 몸과 마음이 보다 순숙(純熟)하여 공부하기가 전에 비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처럼의 인연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 남은 3주 반 내에, 물이 말라서 돌이 드러나듯[水落石出] 마음자리를 밝혀냄으로써[發明心地], 이처럼 얻기 어려운 기연(機緣, 계기가 되는 인연)을 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여 일 동안 여러분은 하루같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애써 공부했으나 그 결과는 다음의 네 가지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① 공부길[路頭]에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화두가 잘 들리지 않고 흐리멍텅하게 대중을 따라 꾸벅거리며 졸고 있으니, 망상이 분분하게 일지 않으면 혼침에 떨어져 흔들리는 것이다.
② 화두가 제대로 들려서 좀 잡히는 것이 있으나, 다만 죽도록 문 두드리개[敲門瓦子, 문을 두드리는 데 쓰는 물건] 하나를 붙들고 있을 따름이다.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마음 속으로) 염하고만 있으니, 이러한 화두는 염화두(念話頭, 실다운 의심이 없이 생각으로 이어가는 화두)가 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의정이 일어나서 깨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화두가 아니라) 화미(話尾) 위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며 생멸법(生滅法, 오래 갈 수 없는 것)이어서 결국 일념무생(一念無生)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잠시 해 보는 것은 상관없겠지만, 만약 구경(究竟)의 실다운 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깨달음을 어찌 기약하겠는가? 요즈음 선종에서 인물이 나지 않는 이유도 이처럼 화미에 마음을 쓰는 잘못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③ 어떤 이는 화두를 제대로 볼 줄 알아서 현전하는 일념무생을 비추거나, 혹은 염불하는 것이 곧 마음인 줄 알아서 이 일념이 일어나는 곳을 따라 들어가 곧장 한 생각도 없는 마음의 경계[無念心相]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차츰 적정(寂靜)을 체험하니 거친 망상[粗妄]이 이미 쉬어져 가뿐함[輕安]을 얻게 되고 이내 갖가지 경계가 나타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몸이 어디 앉아 있는지도 모르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몸이 가볍게 둥실둥실 날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환희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두려운 경계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공포심을 일으키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음욕심(婬慾心)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이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나, 요는 이것이 모두 마(魔)이므로 집착하면 바로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④ 어떤 이는 업장(業障)이 비교적 가벼워 공부길이 분명히 이해되고[理路明白] 공부가 제대로 되어 이미 정도[正軌]를 걷고 있다. 아주 맑고 상쾌하며[淸淸爽爽] 망상이 다 쉬어진 것 같고 몸과 마음이 자재하며 어떤 경계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경지에 이르면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어 앞으로 나아가기에 꼭 좋다. 다만 마른 나무나 바위 같은 경지에서 또 다시 많은 길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혼침에 빠져 머물러 버리며, 어떤 이는 약간의 알음알이를 얻어 시문(詩文)이나 지으면서 스스로 만족하며 아만(我慢)을 드높인다.
이상의 네 가지 경계가 다 병(病)이니,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이를 대치(對治)하는 약을 주겠다.
① 화두가 아직 잘 들리지 않고 망상과 혼침이 많은 사람은,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할 때의 그 ‘누구인가[誰]?’를 보라[看]. 망상과 혼침이 적어질 때까지 보다가 ‘누구인가’가 사라지지 아니할 때, 곧 그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보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되면 무생(無生)이니, 능히 일념무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참으로 화두를 본다[看話頭]고 하는 것이다.
②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말에 집착하여 화미(話尾)에 마음을 쓰며 생멸법으로 구경(究竟)을 삼는 이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들도 위에서 설명한 뜻에 비추어 공부하라. 곧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 일념무생을 보도록 하라.
③ 무념을 관하여 이미 적정(寂靜)과 경안(輕安)을 얻어 어떤 관문에 도달한 이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들은 다만 본래 참구하던 화두만을 비추되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고 마군(魔軍)이 오면 마군을 베어, 한결같이 문제로 삼지 않기만 하면, 자연히 일이 없고 온갖 삿된 길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④ 망념이 이미 다하여 상쾌하고 몸과 마음이 자재한 이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들은 마땅히 옛사람이 설한 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할 때처럼, 하나[一]로부터 지극한 곳[至極處]을 향해 힘써 나아가서 곧장 높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내려가서 두 손을 놓고 거침없이 나아가라.
이상에서 말한 것은 모두 말법(末法) 시대의 근기가 둔한 사람[鈍根人]들을 위해서 설한 방법이지만, 그 실은 종문의 상상일승(上上一乘)의 법문이다.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강설하신 법회)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신 뜻으로써 (가섭 존자에게) 경전 밖에 따로 전하시고[敎外別傳], 역대 조사(祖師)들이 오직 일심(一心)을 전하시어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심[直指人心 見性成佛]이 모두 계급(階級, 이런 저런 중간 단계)에 떨어지지 않고, 수행과 증득을 요하지 않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일언반구(一言半句)에 바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고 한 법도 가히 닦을 것이 없음을 알아버려서 곧 허망한 인연을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여여한 부처이니[不起妄緣 卽如如佛], 여기에 무슨 많은 군말이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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