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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밀린다왕의 질문과 대답 - 우유와 치즈(제호)의 비유

 
왕이 나선에게 다시 물었다.
“사람의 마음은 선도(善道)나 악도(惡道)를 향해 가게 되는데 몸은 이전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살아나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정신으로 바꾸어서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전의 몸과 마음도 아니고, 이전의 몸과 마음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나선은 왕에게 물었다.
“대왕이 어려서 젖을 먹었을 때와 지금 몸이 자라서 커졌을 때, 예전의 몸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렸을 때의 몸과는 다릅니다.”
“사람이 어머니의 뱃속에 처음에 정자로 있을 때와 점차 형태가 흐트러질 때는 이전의 정자와 같지 않습니다. 
살과 뼈가 단단해지면 이전의 정자와는 다릅니다. 
처음에 태어났을 때와 몇 살쯤 됐을 때는 옛날의 정자와는 다릅니다. 
사람이 글을 배울 때 옆에 있는 사람이 그 공부를 대신해줄 수 있습니까?”
“공부를 대신해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서 이를 왕에게 말하는데 왕이 이해하지를 않습니다.”
왕이 말했다.
“나선대사께서는 이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나는 예전 아주 어렸을 때와 어린아이에서부터 커졌을 때까지 옛날의 몸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을 뿐 커졌을 때나 어렸을 때나 한몸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양생된 생명입니다.”
나선이 왕에게 물었다.
“사람이 등불을 켤 때는 새벽이 올 때까지 켭니까?”
“사람이 등불을 켤 때는 새벽이 올 때까지 켭니다.”
“등불 가운데 있는 심지가 하룻밤 동안 계속되면 먼젓번의 심지의 불이 빛을 발합니까, 안합니까? 한밤중에 이르거나 아침이 밝을 때에 앞의 심지불이 빛을 발합니까?”
“앞의 심지불은 빛을 못 냅니다.”
“등불을 밤새도록 켜서 한밤중에 이르면 또 다른 불을 켭니까? 새벽이 올 때 다시 불을 켭니까?”
“안 켭니다. 한밤 내내 불을 계속해서 켜기 때문에 한 심지의 불이 새벽까지 갑니다.”
“사람의 정신이 반복해서 상속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가 가면 두 번째가 옵니다. 정신에서부터 늙음과 죽음에 이릅니다. 뒤에 정신은 나아가서 태어나는 것이 됩니다. 
반복해서 상속하는 이것은 이전의 정신이 아니며 또한 이전의 정신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죽은 이후 정신은 즉시 향해가는 바가 있어서 태어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우유의 즙으로 낙(酪)을 만듭니다. 
상비(上肥)를 취해서 제호(醍醐)를 만듭니다. 
낙과 소와 상비를 되돌려 유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를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정신이란 유즙과 같은 것입니다. 
유즙에서 낙을 만들고, 낙에서부터 상근이 되며, 상근에서부터 제호가 되는 것같이 사람도 정자에서부터 태어나기에 이르는 것이며, 태어나서부터 중년에 이르고, 중년에서부터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후에 정신은 다시 몸을 받아 태어납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서 몸을 받습니다. 
비유하자면 두 개의 심지가 서로 연이어서 타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사람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다음 생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 사람은 자신에게 은애(恩愛)가 없고, 탐욕이 없고, 여러 가지 악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비유하자면 농가에서 곡식을 심어서 수확을 많이 해서 대광주리에 담아 놓았는데 그 다음해에 씨 뿌려 경작하지 않으면 다시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곡식을 다시 얻을 수 없습니다.”
“도를 닦는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 
고락과 은애를 버리고 탐하는 것이 없게 되면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그 지혜가 보통 사람과 다릅니까?”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밝다는 것(明)과 지혜(智)는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밝다는 것과 지혜는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밝음과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여러 가지 일들을 다 알게 됩니까? 하나를 도모하면 다섯 가지를 이루게 됩니까?”
“여러 가지를 도모하면 이루는 것은 하나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한 땅에 곡식의 씨를 심으면 그 싹이 날 때에 마땅히 각각 그 종류의 싹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몸의 다섯 가지 일도 다 여러 가지 일을 써서 각각 이루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왕이 나선에게 다시 물었다.
“세간 사람들은 머리나 얼굴이나 신체의 사지는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명이 긴 사람과 명이 짧은 사람이 있으며, 몸에 병이 많은 사람과 병이 적은 사람이 있으며,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있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과 비천한 사람이 있으며, 단정한 사람과 추악한 사람이 있으며,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사람과 의심을 받는 사람이 있으며, 지혜가 밝은 사람과 어두운 사람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서로 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 나무들에서 과일이 열리는데 신맛이 나는 것도 있고, 쓴맛이 나는 것도 있으며, 매운맛이 나는 것도 있고, 단맛이 나는 것도 있습니다.”
나선이 왕에게 물었다.
“이들 나무들은 왜 서로 같지 않습니까?”
“그것이 같지 않은 것은 본래 묘목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하는 짓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명이 긴 사람도 있고, 명이 짧은 사람도 있고, 병이 많은 사람도 있고, 병이 적은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으며, 귀한 사람도 있고, 천한 사람도 있으며, 단정한 사람도 있고, 추악한 사람도 있으며, 그 말이 잘 먹혀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말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 사람도 있고, 지혜가 밝은 사람도 있고, 어두운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호귀나 빈궁이나 잘생긴 것이나 못생긴 것은 다 자신의 숙명이 지은 것으로 자신이 선악에 대해 행한 바에 따라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왕이 나선에게 다시 물었다.
“사람이 착한 일을 하려고 하면 마땅히 앞서 착한 일을 해야 합니까, 곧 뒤에 해야 합니까?”
“마땅히 앞서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뒤에 하는 것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목이 마를 때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려고 하면 갈증이 가십니까?”
“갈증이 가시지 않습니다. 앞서 우물을 파놓아야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착한 일도 앞서 해놓아야 합니다. 
배가 고플 때 사람으로 하여금 씨 뿌려 경작하게 하면 곡식이 곧 익어서 먹을 수 있습니까?”
“먹을 수 없습니다. 먼저 준비를 해 놓아야 합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먼저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착한 일을 하면 사람의 몸에 이롭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왕에게 원한이 있는데 그때를 당해서 전투에 필요한 것을 갖추려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원한이 있으면 미리 준비해야 마땅합니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먼저 스스로 생각해서 착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뒤에 하는 것은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대도(大道)를 버리고 사도(邪道)를 취하는 것을 하지 말며, 어리석은 사람을 모범으로 삼아서 착한 일을 안 하고 악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후에 주저앉아 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바른 길을 버리고 부정한 길을 취하면 죽음에 임해서 후회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왕이 나선에게 다시 물었다.
“대사와 같은 여러 사문들은 세간의 불과 지옥의 화열은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 말하기를 작은 돌을 세간의 불에 던져 저녁에 이르러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큰 돌을 취해서 지옥의 불 가운데 놓으면 즉시 불이 꺼진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또한 말하기를 사람이 악한 일을 하여 지옥에 가서 수천만 세가 지나도 그 사람은 불에 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또한 믿지 않습니다.”
나선이 물었다.
“물속에 있는 이무기나 교룡(蛟龍)이나 용이나 물고기나 자라가 모래를 먹고 산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실제로 모래로 밥을 삼습니다.”
“모래가 소화가 됩니까?”
“다 소화가 됩니다.”
“그 뱃속에 새끼를 배면 그 새끼도 소화가 됩니까?”
“소화되지 않습니다.”
“왜 소화가 안 됩니까?”
“본래의 복덕이 있기 때문에 소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이 수천만 세가 지나도 불에 타 죽지 않는 것은 그가 지은 악을 다 갚지 못했기 때문에 타 죽지 않는 것입니다.”
나선이 왕에게 물었다.
“사자나 호랑이나 이리는 다 육식을 하는데 먹은 뼈가 뱃속에 들어가면 그것들이 소화되어 없어집니까?”
“소화됩니다.”
“그 뱃속에 있는 새끼도 또한 소화됩니까?”
“소화되지 않습니다.”
“왜 소화되지 않습니까?”
“본래의 복덕이 있기 때문에 소화되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소나 말이나 큰 사슴이나 사슴은 풀을 먹고 삽니까?”
“풀을 먹고 삽니다.”
“그 풀들은 뱃속에서 소화가 됩니까?”
“다 소화가 됩니다.”
“그 뱃속에 새끼를 배면 그 새끼도 소화가 됩니까?”
“소화되지 않습니다.”
“왜 소화되지 않습니까?”
“본래의 복덕이 있기 때문에 소화되지 않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악한 일을 많이 한 것이 다 갚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에 타 죽지 않는 것입니다.”
나선이 왕에게 물었다.
“세간의 여인들은 음식이 다 맛있어서 자기의 뜻대로 음식을 먹는데 그 먹은 음식이 뱃속에서 소화가 됩니까?”
“소화가 됩니다.”
“뱃속에 아기를 배면 그 아기도 소화가 됩니까?”
“아기는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왜 소화가 되지 않습니까?”
“본래의 복덕이 있기 때문에 소화되지 않습니다.”
“지옥 가운데 있는 사람도 이와 같아서 수천만 세가 지나도 타 죽지 않는 것은 악한 일을 한 것들이 다 갚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옥 가운데서 태어나고, 지옥 가운데서 자라고, 지옥 가운데서 늙으며, 그 생이 다하면 지옥 가운데서 죽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왕이 나선에게 다시 물었다.
“대사와 같은 여러 사문들은 천하의 땅은 모두 물 위에 있고, 물은 바람의 위에 있고, 바람은 하늘 위에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를 믿지 않습니다.”
나선은 먼저 왕의 먹을 가는 물을 취해서 손가락으로 그것을 찍어 들면서 왕에게 물었다.
“바람이 물을 쥔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왕이 나선에게 다시 물었다.
“열반의 도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 없습니까?”
나선이 말했다.
“열반의 도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몸에 탐착해서 몸을 아끼고, 아깝게 여기며 여기에 머무르기 때문에 능히 득도하여 생로병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도를 배워서 몸의 안팎을 아끼거나 아깝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은애가 없게 되며, 은애가 없으면 탐욕이 없게 되며, 탐욕이 없으면 포태(胞胎)를 하지 않으며, 포태가 없으면 탄생이 없고, 탄생이 없으면 늙음이 없고, 늙음이 없으면 병이 없고, 병이 없으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없으면 걱정이 없고, 걱정이 없으면 울음이 없고, 울음이 없으면 고통이 없고, 드디어 열반의 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왕이 나선에게 다시 물었다.
“도를 배우는 모든 사람들은 다 열반의 도를 성취합니까?”
“누구나 다 열반의 도를 성취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바르게 열반의 도를 향해 가는 사람은 바른 일을 배워서 압니다. 
마땅히 봉행해야 할 것은 이를 봉행하고, 봉행하지 않아야 할 것은 이를 멀리 합니다.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이를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은 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이와 같이 하여 열반의 도를 성취합니다.”
“열반의 도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도 열반의 도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까?”
“그렇습니다. 열반의 도를 성취하지 못해도 열반의 도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은 압니다.”
“열반의 도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 열반의 도가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사람이 일찍이 손이나 발이 잘려 본 일이 없었는데도 그 아픔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 있습니까?”
“손이나 발이 잘려 본 일이 없었어도 그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 아픔을 알 수 있습니까?”
“손이나 발이 잘린 사람이 아파서 지르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열반의 도를 성취한 사람이 열반의 도는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라고 전하는 말을 듣고서 이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왕이 나선에게 다시 물었다.
“부처님을 뵌 일이 있습니까?”
“뵌 일이 없습니다.”
“나선대사와 같은 여러 스님들께서는 부처님을 뵌 일이 있습니까?”
“여러 스님들 역시 부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나선대사나 여러 스님들께서 부처님을 뵙지 못하였으니 부처님은 정녕 없으셨던 것 아닙니까?”
“대왕께서는 5백 개의 시냇물이 한 곳으로 모이는 곳을 보았습니까?”
“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왕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보셨습니까?”
“그분들도 다 보지 못하셨습니다.”
“대왕의 아버님이나 할아버지도 다 이 5백 개의 시냇물이 모이는 곳을 보지 못하셨으니 천하에 이 5백 개의 시냇물이 모이는 곳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나나 나의 아버님이나 할아버님이 보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이 물은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나나 여러 스님들이 부처님을 뵙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부처님은 실제로 계셨던 것입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부처님보다 더 훌륭한 이는 없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부처님보다 더 훌륭한 이는 없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부처님보다 더 훌륭한 이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만약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면 어찌 바다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다섯 개의 큰 강이 있습니다. 
5백 개의 작은 강물이 큰 강으로 흘러듭니다. 
큰 강 중의 하나는 강가강(항하강)이라 하고, 둘째는 신타(信他, Sindhu강)며, 셋째는 사타(私他, Sta강)며, 넷째는 박차(博叉, Vaksu강)이며, 다섯째는 시피이이(施披夷爾)입니다. 
이 다섯 개의 강물은 주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닷물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이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득도한 분들이 모두 말하기를 부처님보다 더 훌륭한 분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왕이 나선에게 다시 물었다.
“부처님보다 더 훌륭한 이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여 압니까?”
“글자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글자를 만든 사람의 이름은 ‘질(質, Tissa)’이라고 합니다.”
“대왕께서는 질이라는 분을 만나보셨습니까?”
“질이라는 분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질이라는 분을 만나보지 못하셨는데 그 분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옛날의 글자를 가지고 서로 전해가며 가르치므로 질이라는 분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같은 이유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과 계율을 보고 부처님을 뵌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도는 깊고 깊어서 사람을 상쾌하게 만듭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알게 된 이후에 서로 이를 모범으로 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보다 더 훌륭한 이는 없다고 아는 것입니다.”
“나선대사께서는 부처님 경전의 도를 보고 이를 행하신 지가 오래 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시설하신 가르침과 계율은 사람의 마음을 매우 상쾌하게 만드니 늙을 때까지 받들어 행할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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