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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除夜小參.

 
1년 3백60일이 하루하루 지나 오늘 밤으로 끝나는데, 
열명이면 열명, 모두가
참선을 하면서도 참선도 알지 못하고,
도를 배우면서도 도 또한 알지 못하는구나.

다만 여기 부지부식이라는 네 글자야말로 바로 
과거현재미래 모든 부처님들의 골수이며,
 불교의 모든 가르침 일대장교의 근원이니
영리한 놈은 거론하고 갖다 붙이는 것을 듣기만 해도 
마치 용이 물을 얻은 듯, 호랑이가 산에 의지한 듯하여
천상이나 인간에나 종횡으로 걸림이 없을 것이다.

비록 이와 같다 할지라도 점검해보면, 여전히 이쪽의 소식이니, 
만약 저쪽에서 다시 저쪽에서의 한 소식을 말한다면,
비록 서쪽 천축국의 28대 조사님과 중국땅 6대 조사님부터 천하의 모든 옛 선지식들이라할지라도 감히 보장컨대 아직 투철하지 못했다고 하리라.

산승이 이렇게 말해주는데 
갑자기 어떤 놈이 분한 마음에 입을 삐죽이며 뛰어나와 말하기를
“고봉아 고봉아, 너가 무슨 장점이 있다고 이렇게 큰 소리를 치느냐?”하면
그저 그를 향해 말하되, 
“내년에 새로운 가지가 다시 있더라도
어지러운 봄바람 끝내 멈추지 않으리라.” 하리라.


26. 示衆

 
온 종일 옷을 입고 있지만 이제껏 실 한올 걸친 적이 없으며, 온 종일 밥을 먹고 있지만 이제껏 쌀 한톨 씹은 적이 없다. 이미 이와 같다면 일러 보아라! 지금 몸에 걸친 것과 매일 입으로 먹은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밝히거나 밝히지 못하거나 또는 철저히 꿰뚫거나 철저히 꿰뚫지 못하거나를 막론하고 한 치의 실과 한 방울의 물이라도 소가 되어 밭을 갈아 그것을 보상해야 할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한 조각 흰구름이 골짜기 입구에 가로놓이니 얼마나 많은 새들이 둥지로 돌아가다 길을 잃고 해매일꼬?
 
만일 이 일을 논하자면 마치 담장 곁에서 개를 다그치다 다그치고 다그쳐 막다른 좁은 골목에까지 다그치기에 이르면 몸을 뒤친 그 놈에게 한 번 물리게 됨은 피할 수 없는 것과도 같은데, 지금 그 놈에게 물린 이가 있는가? (주장자를 한 번 내려치고 말하기를) 아야, 아야!
 
도를 배움에 처음과 같이 마음을 변치 말고 천만의 마구니와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더욱 정신을 또렷히 하여 모름지기 허공의 골수를 두드려 꺼내고 금강신장의 뒤통수에서 못을 뽑아내야 한다.
 
만일 이 일의 공부하는 순간을 논하자면 마치 철선鐵船을 만들어 바다로 들어가 여의보주를 취하려는 것과 같으니, 만들어지거나 만들어지지 못함은 신경쓰지 말고 다만 맹팔랑 처럼 만들어 가다가 갑자기 어느 날 만들어서 바다로 들어가 보주를 구해서 손에 넣어 가지고 와서는 노승에게 바치더라도 그것을 한 방망이에 때려 부숴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어찌 보고 듣지 못했는가? 있음으로써 이익을 삼고 없음으로써 활용을 삼기 때문이다.
 
만일 실답게 참구하고 실답게 깨닫는 것을 논하자면 마치 여든 먹은 늙은이가 역풍이 부는 가운데 역류하는 물 속에서 바닥이 없는 한 척의 철선鐵船을 끄는 것과 같으니, 올라가는지 올라가지 않는지 혹은 철저히 꿰뚫는지 철저히 꿰뚫지 못하는지는 신경쓰지 말고 아무쪼록 마음 마음에 간단間斷이 없고 생각 생각에 어그러짐이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평생의 기량을 다하여 엿보아 나가다가, 발을 디딜 수 없는 자리에서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때를 엿보기에 이르면 갑자기 물이 돌아 흐르고 바람이 회오리 칠 것이니 곧 이것이 집에 도착한 소식이다. 지금 집에 이르른 자가 있느냐? (주장자를 한 번 내려치며 말하기를) 10만 8천이로다.
 
만일 이 일을 논하자면 오랜 겁 동안 훈습하고 수행하며 공덕 쌓음에 의지하지 않고 또한 현명한지 어리석은지 예리한지 아둔한지 오랫동안 익혔는지 초기의 근기인지는 불문하고, 다만 맹팔랑이란 놈 처럼 위태로움이나 죽음이나 얻음이나 잃음은 돌아보지 않고 커다란 분한 뜻을 내어 큰 의정疑情을 일으키고 선재동자가 승영바라문에게 참예한 듯이 큰 불구덩이 가운데 몸을 던져 들어간 것과 같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바로 이러한 때에 사람과 법이 함께 잊혀지고 마음의 기능이 툭 끊어지면 왼쪽으로 가건 오른쪽으로 가건 척척 들어맞게 되리니 동산의 ‘마삼근’이 아니면 분명 운문의 ‘간시궐’이겠지만, 만약 그래도 어슬렁어슬렁하고 갈팡질팡한다면 고봉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설령 달마의 뱃속에서 한 바퀴 돌아 나왔다 하더라도 여전히 말라빠진 하나의 별똥일 것이다.


27. 答直翁居士書

 
보내온 편지에 질문한 것은 모두 학인들이 공부하면서 의혹스러운 것을 분별하여 거론한 것이므로 응당 그것들을 해결하여 늦게 배우는 이와 초발심의 근기들로 하여금 나아가는데 걸림이 없도록 해 주겠다. 「평상심이 도입니까, 무심이 도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이 평상심이니 무심이니 하는 말이 얼만큼의 사람들을 이루어 주었으며 얼만큼의 사람들을 그르쳐 주었던가?
 
( 하고는) 만일 이 속에서 알아차린다면 곧 이 일은 닦거나 다스리는 행위에 의지하지 않음이 마치 몸이 팔을 쓰는 것과 같고 팔이 주먹을 쓰는 것과 같이 지극히 자연스레 이뤄지며 지극히 힘이 들지 않음을 알 것이므로 다만 믿고자 하여 믿어진다면 곧 옳게 될 것인데 어찌 눈을 부릅뜨고 눈썹을 세우며 모양을 만들어 놓고 한 글자만 간看하랴? 설혹 그렇지 않다면 옛사람이 이르기를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혔다」 하였으니 어찌 한 겹뿐이겠는가? 다시 백천만 겹이 있는 줄을 모름지기 알아야 할 것이다. 진실로 분한 마음을 내어 정진하지 않고 한 토막의 죽은 공부를 하면 어찌 목석과 다름이 있겠는가. 무릇 공부를 하여 구경의 경지에 이르면 반드시 자연스럽게 무심삼매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앞의 무심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달마는 「마음을 장벽과 같이 하라」 하였으며, 공자는 석달 동안 고기맛을 잊었으며, 안회는 온종일 멍청한 듯 하였으며, 가도는 推를 취할까 敲를 버릴까 고심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이 곧 무심의 종류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드는 주체와 들려지는 대상 및 의심하는 주체와 의심되는 대상이 동시에 잊어지고 동시에 없어지며 없음이 없다는 것마저 없어지리니, 향암스님이 들었던 소리와 영운스님이 보았던 색과 현사스님이 돌부리를 걷어찬 발가라과 장경스님이 말아올린 발은 모두 이 무심으로부터 연유하여 깨닫지 않은 것이 없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설령 털끝만치라도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생기거나 티끌만티라도 정진하려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곧 속이려는 마음이 아직 쉬어지지 못하였으며 주관과 객관이 잊어지지 않은 것이니, 이 한 가지 병통은 모두 도를 장애하는 단서이다. 만일 참으로 공한 이치에 계합하여 깨달아 친히 옛사람들의 경지에 이르려면 모름지기 참되고 올바르게 무심삼매에 이르러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무심은 그대에게 깨우쳐 준 것이 매우 분명하지만 내가 다시 게송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리다.
이것을 얻지 못하면 어찌 저것을 얻겠는가.
이미 저것을 얻고 나면 도리어 이것을 잊어버리네.
그러나 비록 그러하더라도 다시 이것이다 저것이다 모조리 거짓인줄 알아야 한다. 정확하고도 참된 것은, 적! 돌! 아지랑이와 허공에 피는 꽃이로다.


28. 通仰山老和尙疑嗣書

 
지난 날의 허물을 제가 일찍이 스님 앞에서 자세히 드러냈었는데 오늘 거듭 의심하시니 처음부터 끄집어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15세에 출가하여 16세에 승려가 되었으며 18세에 불경을 익히고 20세에 옷을 갈아입고 정자사에 들어가 3년을 죽음의 기한으로 세우고 참선을 배우며 단교화상에게 청하였더니 「태어날 때는 어디서 왔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참구하라 하였으나 생각의 두 갈래로 나뉘어 마음이 하나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 일찌기 그가 공부하는 자리에 대해 말한 것을 분명하게 밝혀 얻지 못하고 그럭저럭 집안에서 1년 여를 지냈더니 매일같이 마치 길 잃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때 3년의 기한이 임박하였기에 바야흐로 고민에 빠져 있던 중에 뜻밖에 태주의 정형을 뵈니 말하기를 「설암화상이 늘 그대의 공부에 대하여 물으시는데 왜 가서 한 번 문답하지 않는가?」 하거늘 이에 반가이 향을 가지고 북간탑에 가서 법을 물으려고 문안하고 막 향을 꽂으려는데 한 바탕의 호된 주먹으로 쫓아내고는 곧 문을 닫아버리니 그 길로 눈물을 떨구며 승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다시 올라가니 비로소 가까이 뵙게 되었기에 곧 이전에 공부한 자리를 물으시거늘 제가 낱낱이 말씀드리니 당장에 예전부터 쌓여왔던 병을 제거해 주고 ‘무無’자 화두를 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마음을 열고 발심하여 공부를 한 바탕 해봄에 마치 어둠에서 등불을 얻은 듯하였고 거꾸로 매달렸다가 구제된 것과 같았으니, 이로부터 비로소 공부하는 자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날마다 올라와 한 번씩 물어보게 하시며, 공부하는 차례를 알아야 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길을 가면서 날마다 그 경로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기에 오늘도 그럭저럭하고 내일도 그럭저럭해서는 안된다 하셨습니다. 매일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곧 「오늘의 공부는 어떠한가?」라고 물었는데, 하는 말에 단서가 있음을 보게 되자 그 뒤로는 마침내 공부하는 자리를 묻지 않으시고 문에 들어서자마자 곧 묻기를 「누가 너의 그 송장을 끌어주어서 왔는가?」 하시고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곧 호된 주먹으로 쳐서 내쫓았습니다. 매일 단지 그렇게만 묻고 그렇게 때리시니 정히 다그침을 당함에 사소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노스님께서 남명사의 요청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떠나며 분부하시기를 「내가 가서 사원에 들어가면 사람을 시켜 너를 데려 가겠다」 하셨으나 후에 결국에는 소식이 끊어졌기에 곧 상주의 택형과 더불어 벗하여 같이 가려고 왕가교의 속가 부친이 계신 곳에 이르러 행장을 정돈하다가 예기치 않게도 속가의 부친께서 저희들이 나이가 어리고 또한 길을 떠나보지 않았다 하여 짐과 도첩을 모조리 거두어버렸습니다. 때는 2월 초라 제방에서 방부가 모두 끝났으므로 행장을 꾸려 경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으며, 2월 중순에 사찰로 돌아 왔습니다.
 
다음 달 16일 밤 꿈에 불현듯 단교화상께서 방장실에서 일러 주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가 기억났었는데, 그로부터 의정疑情이 몰록 피어나서 일념이 이루어지더니 곧장 동서도 분별되지 않고 침식도 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6일째 되던 날 진시辰時에서 사시巳時 사이에 행랑 아래를 거닐다가 대중스님들이 승당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도 몰래 대열에 섞여 삼탑각에 올라서 경전을 외우다가 머리를 들어 홀연히 오조 법연화상의 진찬眞贊 말미의 두 구절에서 ‘백년 3만6천 일을 반복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라고 한 것을 보고는 일전에 노화상께서 물으시던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라는 화두를 활짝 깨치니 곧장 혼이 날아가고 쓸개가 없어진 듯 졸도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었으니, 어찌 120근 되는 짐을 내려 놓은 것만 같을 뿐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신유년 3월 22일로 달마대사의 기일이었습니다. 그 해는 마침 24세였기에 3년의 기한을 채우고서 곧 남명사에 나아가 인가를 구하려 하였으나 여름결제가 임박하여 갈 수가 없었으며 모든 고향 사람들도 또한 못가게 하였습니다.
 
곧장 여름철 해제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남명에 이르러 한 바탕 허물을 여쭈었습니다. 방장실에서는 비록 자주자주 단련을 입어서 공안을 분명히 밝혀내었고 또한 다른 사람의 속임을 입지 않았으나 입을 열게 되면 마음속이 또 혼동됨을 느껴서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것이 마치 남에게 빚을 진 것과 같았습니다. 그곳에 있으며 평생 동안 시봉하려 하였는데 생각지않게 동행했던 택형과 다른 산으로 가게 되어 갑자기 자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을축년에 이르러 노화상께서 도량에 계시면서 방부를 받을 때 또 의지하여 따르다가 뫼시고서 천녕사로 가는 중간에 힐문하여 물으시기를 「요즈음 시끄럽고 번거로울 때도 주재가 되느냐?」 하므로 답하여 이르기를 「주재가 됩니다」 하였더니 「꿈속에서도 주재가 되느냐?」 하시기에 답하여 이르기를 「주재가 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잠을 잘 때 꿈도 없고 생각도 없으며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으면 너의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 하시거늘, 여기에 이르러 곧 어떠한 말로도 대답할 수가 없었으며 어떠한 이치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께서 도리어 당부하여 이르기를 「오늘 이후로는 네가 부처를 배우거나 법을 배우려고 하지도 말고 옛것을 궁구하거나 지금 것을 궁구하려고도 하지 말라. 단지 배 주리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잠깐 잠을 자다가 깨어나면 도리어 정신을 가다듬어 ‘나의 이 깨어나는 주인공은 결국은 어느 곳에서 안신임명安身立命 하는가?’를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비록 이 말씀을 믿게 되어 준수하였으나 자질이 더디고 아둔하여 더욱 밝히기 어려움을 어찌하겠습니까? 마침내 용수로 떠나며 스스로 맹서하기를 「일생을 내던져 한낱 바보천치가 되더라도 결정코 한 소식을 아주 분명하게 보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5년이 지나서 어느 날 암자에서 쉬고 있던 중에 잠을 자다 깨어서 바로 이 일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같이 자던 도반이 목침을 밀어 땅에 떨어뜨리는 소리에 별안간 의심 덩어리를 깨트리니 마치 그물속에 갇혔다가 뛰어 나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전에 의심했던 바 부처님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알아들을 수 없는 공안들과 고금의 차별된 인연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흡사 사주에서 대성인을 뵈온 듯하고 멀리 떠났던 길손이 고향에 돌아온 듯 원래 예전의 그 사람이요 예전에 밟고 다니던 곳이 고쳐지지 않았던 것과 같았습니다. 이로부터 나라는 안정되고 천하는 태평하니 한 생각도 함이 없게 되어 시방세계를 좌정시키고 단정시켰습니다. 위와 같이 말씀드린 것은 모두 진실에 입각한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존귀하고 자비로운 스님께서 자세히 살펴주시옵소서.
 


29. 室中三關..

밝은 해가 허공에 당도함에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조각구름에 가리게 되었는가?
사람마다 하나씩 그림자가 있어서 한 치 걸음도 떨어지지 않거늘 무엇 때문에 밟혀지지 않는가?
온 대지가 하나의 불구덩이이니 무슨 삼매를 얻어야 불에 타지 않을까?

<禪要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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