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②
염지(鹽池)
《금사》 식화지(食貨志)에,
“임황 북쪽에 큰 소금 봇도랑이 있고 오고리 석루부에는 소금 못이 있는데, 모두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먹기에는 충분하다.” 하였다.
중국은 산간이나 육지에 간 곳마다 소금이 생산되는데, 우리나라만은 나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고 바닷물의 맛이 짜기 때문에 그대로 구우면 소금이 된다.
짠 것은 다섯 가지 맛 중의 하나다.
천지 사이에는 본래부터 짠 것이 있게 마련이므로 바다와의 거리가 먼 곳에는 그 기운이 새어 나와서 못도 되고 우물이 솟아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는 것이 도리어 당연하다.
귀산(龜山)의 소에,
“이절 지방에는 가난한 백성이 일년내내 소금을 먹어 보지 못하여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못하면 병이 난다.” 하였으니, 이곳에 소금 못이나 소금 우물이 모두 없다는 얘기다.
이런 것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육정육갑(六丁六甲)
점치는 사람들이 말하는 육정·육갑·육임의 근거는 삼합에서 나온 것이다.
《주역》의, ‘경갑선후’라든가 음률(律)의 ‘삼종삼려(三鍾三呂)’라든가 제전(祭典)의 ‘조랍(祖臘)’ 같은 것을 보아도 모두 증명이 된다.
대체로 건괘의 작용은 경과 갑이 가장 크고, 곤괘의 작용은 임과 을이 가장 크다.
그러므로 천지의 조화에 있어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퇴지(退之)의 시에, “딸은 정에 아내는 임에 대대로 전해가면서 혼인한다.”고 했다.
그것은 건과 곤 사이에서 물과 불이 작용하는데 정(丁)은 음에 속하는 불이며, 임(壬)은 양에 속하는 물이므로 서로 감응되는 것이다.
전하양사(全河兩徙)
후진은 개운 원년에 활주에서 황하가 터져서 변주·조주·복주·선주·운주 등 다섯 고을의 지역을 침범하고 양산을 돌아서 문수에 합류되었다.
이것이 황하 전체의 위치가 첫번째로 남쪽으로 변경된 것이요,
송 희령 10년에 황하가 단주에서 터져서 북쪽으로 통하는 길이 끊어지고 황하의 물길이 남쪽으로 변경되어 동쪽으로 양산 밑에서 모여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져서, 한 갈래는 남청하에 합류되어 회수로 들어가고
한 갈래는 북청하에 합류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남청하가 회수로 들어간 물길은 곧 지금 기(沂)와 사(泗)가 남쪽으로 흘러 서주와 하비를 경유하여 회수로 들어가는 길인데, 송과 원 이후로 아직까지 변경되지 않았다.
북쪽 수로는 장추(張秋)가 제방을 헐어낸 이후로 황하가 이쪽으로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고,
회수로 들어가는 물이 황하의 흐름을 받아 남쪽으로 굽이치다 북쪽으로 굽이치다 하였다.
여기서 바다까지의 거리가 수백 리나 되므로 국가의 힘을 기울였어도 마침내 하나로 통합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이 황하가 터져서 남쪽으로 위치가 변경된 경위다.
그 황하의 위치 변경이 일정하지 않았으니, 우공(禹貢)에는,
“여파가 유사로 들어갔다.” 했는데, 곤륜산 서북쪽에 사적이 있는 것을 보면 처음에 서쪽으로 흘러갈 때 북쪽의 사막이 동북방으로 가로질렀으니, 반드시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갔을 것이다.
구하의 옛 물길은 지금은 모두 메워져 버렸으니, 남쪽으로 위치가 변경된 것이나 회수로 들어간 것이나 그 상황이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안목이 크고 생각이 넓은 사람과 논의할 성질이다.
능라사(綾羅詞)
현재 평안도의 능라도는 성천부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성천부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부와 가까운 경내에 있었던 것이 자리가 옮겨져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나의 선조인 찬성공(贊成公)이 이곳 부사로 있을 때 우리말로 노래를 지은 것이 있는데,
가사가 매우 잘되었기에 나는 한시로 운을 붙여서 번역하여 보았다.
능라도라 십리 청산 (綾羅島十里靑山)
언제 이곳으로 옮겨왔느냐 (何歲何日離此間)
성천의 옛 모습을 (成都舊孱顔)
도로 찾아가야 하련마는 (此事端宜復索還)
두어라 조물이 하는 일이니 (且置哉造物相關)
그대로 두고 보리라 (一任所之等閒看)
이것을 현행하는 단가 가락에 맞추어 보니, 음절과 박자가 모두 들어맞았다.
그러니 능라사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이 마땅 하겠다
세차(歲差)
《서경》 기삼백(朞三百)의 항에 집주(集註 여러사람의 주석을 한곳에 모은 책)에는 세차에 대하여,
“하늘의 궤도는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느리고, 태양과 달은 안에서 돌기 때문에 빠르다.” 했는데,
이것은 1년의 추위와 더위는 태양의 궤도가 남과 북으로 달라지는 데에 관계되는 것이요,
하늘과 별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지 못한 듯하다.
그 차이가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혼중(昏中)으로 시험해 보아도 실제로 하늘은 하늘대로, 세성은 세성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거나 안에서 돌아간다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을 듯하다.
병영(幷營)
순(舜) 때 12개의 주를 창설하였다.
유주는 청주와 연주의 북쪽에 있고, 병주와 영주는 또 그 밖에 있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요동과 요서는 반드시 그 지역 안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은(殷)의 주(紂)가 통치한 지역은 청주·연주·서주에 불과하였는데 고죽(孤竹)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침공을 당한 것을 보면 그 부근에 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백이(伯夷)가 주(紂)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있었다.” 고
하는 그 동북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는 것이 우리나라가 아니고 어디겠는가?
기자가 조선에 봉함을 받았다 했는데, 이때 조선의 지역은 압록강 안팎을 점유하였고 요하 지역도 기자의 영토 안에 들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순 시대의 병주와 영주가 아니겠는가? 그런즉 우리나라의 문화는 기자 이전에 벌써 이를 개척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이는 이 땅을 봉해서 받은 것이 아니요, 단군의 왕조시대에 한동안 와서 머무른것에 불과하였다.
아마 처음에 단군이 해변에서 나라를 건설한 이래 그 인후하고 착한 기풍이 역대로 변하지 않고 전승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몸을 의지했다가 문왕이 늙은이를 잘 대우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서쪽으로 걸어서 주나라에 돌아간 것일 듯하다.
이것은 모두 역사의 기록에서 빠뜨린 것이므로 기록해 둔다.
일구(日晷)
《강목》 당 현종 개원 9년 항에, “태감(太監) 남궁열을 보내어 일구를 측정하기 위하여 남쪽인 교주에 가서 8척이 되는 표지판을 세웠다.
하지에 일구의 그림자는 남쪽으로 3촌 3분이 나타난다.
남과 북이 거리가 3천 6백 88리 90보인데, 일구의 차는 1척 5촌 3분이 된다.
곧 24리 31보 남짓한 거리에서 그 일구는 1분의 차가 생긴다.
교주에서 북으로 7백 95리에 가면 여기가 바로 하지에 태양이 똑바로 내려 비추어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남북으로 1만 9천 2백 리 남짓한 거리에서 표지판과 그림자가 꼭 같게 된다.
요 시대에 화중(和仲)이 가서 있던 북방의 유도라는 곳이 바로 여기인 듯하다.
1만 9천 2백리 남짓을 반으로 나누면 9천 6백리 남짓이 되는 셈이니,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데서 북으로 9천 6백 리 남짓이 되는 곳에 가면 곧 한대와 열대의 중간 위치로 가장 살기 좋은 땅이다.
획계(畫界)
사조제(謝肇制)는,
“우(禹)가 천하를 9주로 나누어 삼대 시대에 그대로 따랐고 진이 3개의 군으로 나누었으며
한이 13개의 부로 나누었다.” 하였다.
1부를 6개의 군으로 하였으며
진은 15개의 도로,
당은 10개의 도로,
송은 4개의 경(京)과 23개의 노(路)로,
원은 11개의 성(省)과 23개의 도로,
명은 2개의 경(京)과 14개의 성(省)으로 구획했다가 뒤에 안남성(安南省)을 폐기했으니,
실제로 13개 성이 있다.
이것은 경계 구획의 역사적 변천이다.
순이 벌써 12개의 주(州)를 창설하였으니, 병주와 영주 등은 반드시 요와 심 지역이 될 것이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동북지역이 점차로 개척됨에 따라 반드시 옛적의 명칭을 다시 살렸을 터인데, 이런 사실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원과 명 이후에는 연에 수도를 세웠는데 요와 금이 교대로 일어나서 원과 서로 겨루게 될 때 그 실력 면에서 중국이 저들과 대항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만일 수도가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더구나 저들을 어떻게 견제할 수 있었으랴?
수도를 중국과 이민족과의 가까운 지역에 설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동방에서 연을 가자면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산해관을 들어가는 길이 병목처럼 좁아졌었고 그 목만 넘어서면 곧 몽고 지역이다.
이 길목이 막히는 날에는 장에 든 새며 자루 안에 든 원숭이와 다름이 없을 터이니, 어떻게 서로 왕래할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이렇게 되어 동쪽은 동쪽대로 서쪽은 서쪽대로 양쪽으로 분리 될 경우에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국교 관계는 어떠한 방법을 취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흑룡강원(黑龍江源)
백두산에 서북으로 흐르는 물이 혼동강이고, 그것이 흑룡강으로 들어간다.
흑룡강은 멀리 국경 밖에서 흘러 내려오기 때문에 그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물은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왕기(王圻)의 《삼재도회》에,
“사막의 지역은 중국 서북에서 시작되어 동북쪽으로 비스듬히 뻗쳐나갔다.
이는 분명히 옛적에 황하가 흐르던 길이다.
사막 밖에 있는 여러 물이 합류되어 서쪽에서 동으로 쏟아지는데, 그 가장 멀리 흐르는 것은 아로찰리 지역에서 장청과 새남을 경유하여 북두 밖으로 나타나는데, 이것도 동쪽으로 쏟아지니, 그 물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흑룡강의 근원일 것이다.
또 《외이고》에는, “유주 북쪽 7백 리에 유관이 있고 그 아래에 유수가 있는데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하였다.
백두산 북쪽의 여러 물은 다 흑룡강으로 들어간다.
옹주에 유엽하가 있는데 그 물을 건너면 다리가 검게 물든다.
유수도 물수변(氵)에 썼으나 이것은 유엽(楡葉)의 물이 밴다는 뜻에서 생긴 명칭일 것이니, 역시 흑룡강의 상류일 것이다.
이 물이 바다와 가까워지는 지역은 옛날 실위족(室韋族)이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왈개·거한 등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거한을 곧 신류(申瀏)가 가서 토벌했던 곳이니, 그의 부장이었던 배시황(裵是榥)의 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대체로 곤륜산 동쪽의 물은 모두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니 따라서 그 산세도 알 수 있다.
대류사(大流沙)
우공(禹貢)에, “나머지 물은 유사로 들어간다.” 하였다.
황하의 한 갈래가 이를 서쪽으로 흐르게 한다는 뜻이다.
《삼재도회》에,
“대류사는 성수해의 서북 한해의 서남에 있다.
한해는 사막이라고도 하는데, 가로 뻗어나서 서쪽 끝까지에 이른다.” 하였다.
황하가 어느 시대 어느 해에 서쪽으로 흘러서 오늘날 사막과 같은 큰 모래 벌판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한해라는 것은 모두 모래 벌판이다.
큰 바람이 일면 다니는 사람들은 사람도 말도 모두 서로 놓치게 된다.
《송사(宋史)》에,
“모래 깊이가 30척이나 되어 곡물이 생산되지 않고 모래밭에서 등상(登相)이라는 풀이 난다.”고 한 것도 다 참고 자료가 된다.
철령위(鐵嶺衛)
《고려사》에,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는데 요동에서 철령까지에 70개소의 참(站)을 만들고 참에는 백 세대를 배치한다는 것이다.
요동도사가 군대를 거느리고 강계까지 왔다가 박의중(朴宜中)에 의하여 이 계획이 취소되었다.
당시의 조서에, ‘장주·정주 등은 본시 고려에 속한 땅이라…’ 했다.” 하였다.
장주·정주·화주는 곧 지금의 정평·영평 등 지방으로 철령 밑에 있다.
그들의 목적은 철령에서 서쪽 지역은 통틀어 자기네의 판도로 함께 집어넣으려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북방의 수 개 고을을 위하여 천여 리를 넘어와서 꼭 점령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철령 너머의 지방이 과거에 요동에 소속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최영전(崔瑩傳)에는,
“요동도사가 받은 황제의 명령에, ‘철령에서 북쪽·동쪽·서쪽은 본시대로 개원에 소속시키고 이를 관할 하는 군인으로 중국인·달단인·고려인은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키라.’ 했다.” 하였다.
여기서 북쪽이란 것은 장주·정주·화주 이외의 지역이요, 동쪽은 지금 영동지방의 여러 고을이요, 서쪽은 곧 절령 이북인 지금의 평안도 지역이다.
그렇다면 조서에서 어째서 수 개의 고을만을 지적했는가?
폐왕 신우전에는 ‘동쪽과 서쪽’이라 해놓고 또, “문주·고주·화주·성주에서 공험진까지는 우리의 땅이었다.” 하고,
먼저 이 지역을 잃게 된 유래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조서에서도 그렇게 말한 것이니, 사실은 동쪽과 서쪽이 포함된 것이다.
철령 아래에 있는 수 개의 고을뿐이라면 70개소의 참은 어디에다 설치할 것인가?
이것은 역사를 쓰는 사람이 내용을 소홀히 다룬 것이라 하겠다.
만일 박의중이 항변을 잘하지 않았다면 우리 영토의 절반을 잃어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공자가 “사신이여, 사신이여!”라고 한 말은 의중에게 합당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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