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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살생제천(殺生祭天)


교제에는 천신이 오고, 묘제에는 인귀(人鬼)가 흠향하며,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

사람은 살아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제물을 성대히 차려 놓는 것은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섬기는 뜻이다. 
천신이란 이치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치가 무슨 음식을 필요로 하겠으며 
또 어찌 생뢰(牲牢 집단성원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종묘와 사직에 제물로 바치는 소, 양, 돼지등 산 짐승)와 서직(黍稷 기장과 피를 아울러이르는 말)을 내려와서 흠향할 리가 있겠는가? 
이는 사람의 도리로 하늘을 대우하는 것이니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산 귀신이나 나무귀신이란 기운이 엉기어서 생긴 허깨비에 불과한 것인데 여기에도 음식을 차려 놓고 기도를 드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체 귀신은 사람이 받들어 주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의 도리로 받드는 것이다.
 대범 기운이란 하늘에서 생긴 것이고 형태란 땅에서 갖추어진 것이며, 귀신도 땅의 산물인 이상 반드시 어떤 형태를 드러내기 때문에 음식이 아니고는 의탁할 곳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저 허깨비가 사람처럼 음식을 먹고 배를 불려야만 되는 것이 아닌데, 하늘의 높음으로써 어찌 짐승을 잡아서 차린 혈육을 먹으러 오겠는가?
 더구나, 태를 쪼개고 어린 생명을 죽이면 기린이 오지 않는다는 것인데, 어린 소를 잡아서 제물로 쓰는 것 같은 일이야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그만두려 한다.


19. 흥경(興京)

흥경은 지금 청 나라가 일어난 땅이다. 
우리 역사에서 말하는 파저강야인이 바로 그것인데, 두 갈래 물 중간에 놓여 있다. 
북쪽에 있는 것은 요하로 들어가고 남쪽에 있는 것은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파저강이다.
흥경은 창성에서 1백여 리의 거리이고, 만포까지는 4백 리이다. 
그 사이에 만차령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강과 고개 사이가 60~70리쯤 되며, 이곳은 방목장이다. 
의주에서 솔고(率古)로 가는 다른 길을 경유하면 만차령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다.
만포와 강계가 중요한 땅이기는 하나 적유령의 잔도가 험난하고 거리가 머니 곧장 휘몰아쳐 갈 지역은 아니다. 
다만 창성·삭주·의주가 염려스럽기는 하나 창성에서 시경을 거쳐 가면 운산에 갈 수 있고, 삭주에서 대삭주를 지나면 귀성에 갈 수 있고, 의주에서 용천을 지나면 철산에 이르게 되므로 이 세 군데의 노선이 가장 요해처(要害處 아군에게는 유리하고 적군에게 불리한곳)이다. 
병자년 난리에 의주에서 곧장 본토로 쳐들어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재 시경·대삭주·귀성·철산에는 모두 옛적의 성터가 있다고 한다.


20. 동국지도(東國地圖)

내가 지도 한 첩을 얻었는데, 서북으로 위치한 저쪽 나라와 우리나라와의 경계가 상세히 기재되었으니 직접 답사하고 눈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근대 사람의 식견이나 역량으로는 이렇게 작성할 수가 없다. 
옛적에 윤영(尹鍈)이란 사람은 윤씨 집안의 서자로 이 충무공의 외손이며, 이완평(이원익)의 서녀를 아내로 삼았다. 
그는 완평의 총애를 특별히 받았고 본실에서 난 아우도
 “형의 문장은 나보다 낫다.” 하였으며, 
《항부도기》 1첩을 제작했으니, 이는 조간(趙簡)의 사실에서 나온 명칭인데, 그 자손들이 잃어버리고 전해지지 않지만, 이 지도는 아마 그가 남긴 것인 듯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영고탑은 숙신의 옛터이다. 
한·당 이전에는 동북 지방에 강대한 나라나 큰 부족이 없고 우리나라만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에는 요동과 요서의 태반이 모두 우리의 소유였고 백두산 안팎의 여러 부족들이 많이 우리에게 소속되었는데, 여진·만만의 부족이 경박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마침내는 송을 대신하여 중국을 차지하였으니, 이것이 금 나라이다. 
그러다가 원 나라 사람에게 쫓김을 당하여 그 잔당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서북쪽에 흩어져 살면서 야인이란 명칭을 가지고 우리의 변경을 침략해 왔다. 
북쪽에 사는 것은 이탕개(尼湯介)였고, 서쪽에 사는 것은 이만주(李滿住)였으며, 또 그들은 생여진·숙여진의 구별이 있었다.
만력 이후에 여진의 동산 1파가 건주위에서 차츰 커져 모련위·좌위·우위 등의 부족들을 모조리 통합하게 되어 우리의 폐사군이 가장 큰 폐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 지역을 비워 폐지하게 된 것이다.
 청 세조 이후에 심양을 성경, 요양을 동경, 건주를 흥경이라 하고, 영고탑 서쪽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연경에 들어가 중국의 주인이 된 뒤에 건주는 그들의 선대 무덤이 있는 곳이고 노성은 그들의 종족이 주거하는 지방이므로 그 배치제도를 성경과 같이 하였다.
 요하 동쪽에 장군 셋을 배치했는데 하나는 봉천 등지를 진압하면서 심양에 주둔하고, 하나는 영고탑 지방을 진압하면서 선창에 주둔하고, 하나는 흑룡강 지방을 진압하면서 애호에 주둔하여, 각기 만주 지역을 통솔하는 고산대사원(固山大四員)이다. 
 강희 말기에 흑룡강 북쪽의 몽고를 가장 염려하여 다시 백도눌 장군(白度訥將軍) 한 명을 더 배치하였다 한다. 
몽고의 48개 부족 가운데서 동북 지방에 거주한 족속이 가장 강성하여 대비달자는 흑릉강 북쪽에 있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흑룡강에서부터 장성 밖에까지 북쪽이나 서쪽이 모두 몽고의 영토이며, 그 넓이는 중국의 몇 갑절이나 된다. 
서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서·남·북의 황제라고 부른다. 
 황태극과 청태극은 중국 서남쪽에 있으며, 액라사라는 것은 곧 대비이고, 객이객이라는 것은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
 대체 우리나라의 지형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으며 중앙은 빨고 아래쪽은 파리하다.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 같다. 
그리고 대마도와 제주도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하였다고 하니, 곧 감여가(堪輿家)의 정론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 방위를 정한다면 온성이 자방, 해남이 오방, 풍천이 유방, 강릉이 묘방이 된다. 
근세에 소위 지도라는 것을 보면, 대개는 종이 넓이에 따라 위치를 배정하고 위치에 따라서 그림을 작성했기 때문에 길이와 넓이가 서로 어긋나고 좁고 넓은 데도 제대로 맞지 않는다. 
두만강이 온성으로 들어오는 곳만 보아도 동쪽으로 흐르다가는 다시 북쪽으로 흘러서 미전보에 와서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서 서수라로 들어가고, 압록강은 삼수와 갑산 및 폐사군을 지나는데, 여러 번 굽이쳐 강계와 위원을 스쳐 서남쪽으로 향하다가 창성을 지나서야 비로소 남쪽으로 곧장 빠져 내려 통군정의 서쪽을 싸고 돌아서 대총강으로 들어간다.
나의 친구 정여일(鄭汝逸)이 세밀히 연구하고 정력을 기울여 백리척을 만들어 정밀한 측량을 거쳐서 지도 8권을 작성하였는데 멀고 가까운 거리와 높고 낮은 지형까지가 모두 실형으로 묘사되었으니 정말 진귀한 보물이며 이 지도와도 대체로 들어맞는다. 
그는
 “저쪽 지역의 산천이나 평탄하고 험한 실태까지도 눈으로 본 것처럼 알 수 있다.” 했는데, 나도 이제 그 지도를 얻어 간직하여 뒤에 공을 세울 사람을 기대하는 바이다.



21. 호로항구(葫蘆項口)


수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이밀(李密)이 양현감(楊玄感)에게, 
“천자가 멀리 요동 밖에 출정하는데 이곳은 유주에서도 천 리나 되며 남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북쪽에는 강한 오랑캐가 있으며, 중간 한길은 매우 험난하다. 
공이 휘몰아 계로 들어가서 긴요한 목을 지키면, 고려가 그 소문을 듣고 반드시 그 뒤를 밟을 것이다.” 하였다. 
이밀은 산동에 오랫동안 있어서 연과 계 지방을 평소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니, 이것은 그 구원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강목》에는, 남해니 북호니 하는 말을 빼버렸으니, 아마도 주자가 이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지금 의주에서 산해관까지가 모두 1천 3백 28리인데, 광녕에서부터 서쪽은 호로항구처럼 생겼는데 남쪽은 바다요, 북쪽은 목책이요, 책밖은 모두 몽고의 땅이다. 
이러한 길을 5백여 리쯤 가야만 산해관을 들어가게 된다.
금 나라는 영고탑 동쪽에서 일어났으니, 《고려사》에서 말한 ‘동여진’이다. 
서쪽으로 2천여 리를 달려 호로항구를 거쳐 관문을 들어갔고 또 남쪽으로 가서 변경에 수로를 정했다가 그들이 망할 때 송이 남쪽에서 공격해 오고 원은 북쪽에서 쳐들어왔다. 
원은 바로 몽고이다. 
그러니 이 호로항구라는 곳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었겠는가? 
그 무리들은 모두 순절하여 씨도 남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에 경박에 거주한 포선만노(浦鮮萬奴)가 그 험준한 지대를 의거하여 제라 칭하고 국호를 동진이라 하였다. 
동진이란 동쪽 여진이라는 뜻이다. 
이때 원의 병력으로도 그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여러 번 우리 국경을 침범하고 공갈과 위협을 일삼아 왔으나 또한 원이 무서워서 우리나라 안에까지는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였고 우리는 항상 구원을 요청하여 그 힘을 입어 왔다. 
그러니 영고탑 동쪽만 하더라도 수천 리의 지역이 되기 때문에 충분히 큰 나라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해대씨(渤海大氏) 이후에는 언제나 장령의 동·서 지역을 다 통합하였으니, 장령은 곧 백두산맥으로 국경 밖에서 들어온 것이다. 
청 나라가 처음 일어난 곳이 장령 서쪽이었으니, 우리나라 초기에 파저라고 하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서쪽 국경인 이산에서 4백 리에 불과 하지만 지대가 험준하여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두송(杜松)·유정(劉綎)의 군대가 한 사람도 살아오지 못하였고 우리 장군 강홍립(姜弘立)도 심하에서 포로가 되었다. 
더구나 장령을 넘어서 오라와 영고탑을 어떻게 들어가겠는가? 
 지금 그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주인 노릇을 하니, 연경은 북쪽에 가깝고 흥경과의 거리도 멀지 않다. 
그러므로 금 나라에 비해 왕래하는데 도로의 거리가 가까워서 편리한 점은 있으나 만일 형세가 불리하여 달아나게 될 경우에 그들이 호로항구를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고는 예측할 수 없다. 
 중세 이후에는 중국 국방상의 문제는 언제나 목책 밖에 있는 몽고에 중점을 두어 왔다. 
그들은 지혜나 역량이 그 목을 지키면서 이쪽을 견제하기에 충분하였다.
금 나라의 잘못된 전철은 다시 밟지 아니해야 할 것이니, 옛 소굴로 다시 들어간다든가, 
 또는 동진과 같은 예가 다시 일어날 때는 모두 우리의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요즘에 들은즉, 압록강 저쪽에서 인삼을 캐는 사람들이 폐사군으로 마구 들어와 나무를 쪼개어 배를 만들 어 물을 거슬러 온다하니, 그 지역이 험난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 지역에는 오곡이 생산되지 않고 사냥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 결코 부귀를 누리고 그 자리에 앉아서 편안히 지낼 곳은 못 된다.
수십 년 전에 황제는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어 압록강을 따라 올라가며 백두산에 오르는 길을 탐색하게 하였는데 그 조칙에, 
“저쪽으로 가다가 안 되거든 이쪽 길로 가라.”고 하였으므로, 극등은 마침내 우리 영토로 해서 올라갔다 한다.



22. 강화정주(江華貞州)


지금의 강화부는 곧 고려시대의 혈구군으로서 바다섬 안에 있으며, 소속된 현으로는 진강과 하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합하여 하나의 부로 된바, 그 주위가 3백 리이다. 
고종 19년에 몽고의 난을 당하자 당시의 권신인 최우(崔瑀)가 왕을 협박하여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했다. 
그때 유승단(兪昇旦)은,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원칙이다. 
예로써 그들을 섬기고 신으로써 그들을 교제한다면 그들인들 무슨 명목으로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지금 섬 안에 쫓겨 들어가서 오랜 세월을 끈다면 국경의 백성들은 모조리 희생을 당하고 노약자들은 다 포로가 되고 말 터이니, 결코 영구한 계책이 아니다.” 하였으나,
 우는 듣지 않았다. 
도리어 왕이 먼저 승천부(昇天府)에 들어가 바다 안에 수도를 정하고 그곳에서 28년을 지내더니 몽고가 군대를 풀어서 안팎의 성을 모두 철수하게 하자, 원종 원년에 다시 송도로 환도하였으니, 이는 몽고의 압력에 의한 것이다.
비록 천부금탕(天府金湯)이라 할지라도 일시적 계책에 불과하며 만일 세월이 오래 간다면 결코 지킬 곳이 못 된다. 
유승단의 옳은 말은 다시 평론 할 여지가 없다.
당시에 우복야(右僕射) 박송비(朴松庇)도, 
“혈구는 흉산이다.” 하였으니, 그것은 여기에 있다가는 마침내 당하고 만다는 뜻이다. 
그러나 송경은 바로 평지로서 적을 받을 곳이며 성을 지킬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우(瑀)의 계획대로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일찍이 보니, 대흥산성은 천마산·성거산 중간에 있는데, 사면이 철벽이요, 동문으로 통하는 길만이 교통에 이용될 수 있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조운이 불편하다 하여 이곳을 포기 했던것이다. 
만일 조운이 편리한 위치라면 또 적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으랴? 
 이는 성조의 한양 도읍과 장단점이 동일하다. 
평화시에는 부은(富殷)함을 누리고 비상시에는 산꼭대기나 바다 가운데로 피하여 고식지계(姑息之計)만을 할 뿐이니, 아무리 관중·제갈량과 같은 재능이 있다 해도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속담에, ‘승천(昇天)’·‘갑관(甲串)’이라는 말이 있다. 
 이 두 곳은 모두 강화로 가는 길목이니, 이 속담은 ‘쓸데없는 맹랑한 짓’이라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아마 고려 때부터 이런 농담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병력이 약하고 졸렬하여 춘추시대의 한 작은 나라에 불과하므로 비록 맹자라 할지라도 등 나라를 위하여 아무런 계획도 내지 못했던 것과 같으며, 비록 일시에 슬기로운 꾀가 있는 장수로하여금 형세를 타서 편의한 성과를 얻게 한다하더라도 그 후환에 대해 어찌할 것인가? 유승단의 계책은 익숙한 계책이었다. 
 이제현(李齊賢)은, 
 “고종이 옛적에 승단에게 글을 배워서 조심성 있게 그의 지위를 보존하여 오다가 승단이 죽고난 다음에 권신에게 견제를 당하여 큰 나라를 대항하려는 어림없는 시도를 해 보았으나 마침내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끝내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단독 결정을 내려 마침내 태자인 전을 시켜 표문을 받들고 몽고에 가게 했으며, 국내의 재산을 통틀어서 예물에 충당시켰다.
 원 세조가 직접 송 나라를 공격할 때 2년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먼저 그의 신하를 보내어 촉산을 넘어 섬주까지 따라가게 했다. 
세조가 세자에게 ‘단신으로 와서 조회하라.’ 하므로 양초의 교외에 이르렀을 때 세자가 길가에서 인사를 드렸다. 
 마침 원 헌종이 죽고 임금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이 있어서 사정이 매우 위급할 때였으므로 그는 세자를 보고 놀라고 반가워하며, ‘고려는 당 태종이 멀리 가서 토벌하였는데도 굴복하지 않았던 나라인데, 이제 스스로 나에게 돌아와 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하였다. 
 마침 또 본국에서 고종이 죽자 원 나라에서는 곧 세자를 왕으로 삼고 호송하여 본국에 나아가게 하였다. 
그러다가 충렬왕이 원 나라 공주에게 장가들면서부터는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무슨 말이든지 모두 들어 주었고, 행성의 여러 사람들도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나라가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유승단의 지혜가 남겨준 영향이었다.”고 했다. 
 저 강도(江都)란 하나의 작은 섬이니, 실력이 모자란다면 여기에 들어와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산적이나 해적들의 걱정거리가 되기는 마찬가지다. 
누선이 동쪽으로 들어왔을 때 우거(右渠)는 목숨을 바쳤고, 홍두적(紅頭賊)이 들어왔을 때에는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쫓김을 당했다. 
이 밖에도 드나드는 선박들이 모두 뜻밖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니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강화보다는 자연도가 낫다.”고 하는데, 그것은 섬이 작아서 지키기가 쉽다는 뜻이다. 
 그러나 끝내 영구한 계책은 못 된다.
승천부란 곧 지금의 풍덕부이니, 옛날의 정주이다. 
지리지에 보면,
“풍덕은 정주인데, 승천부라고도 한다. 
그 옛터가 승천포의 옛 성에서 북쪽으로 2리 밖에 있고, 따로 옛 정주가 그 옛터의 서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바다에 묻혀서 당시에 임금이 머물던 곳이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으며, 옛 정주의 터가 언제 바다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 
 지리지는 정인지(鄭麟趾)가 만든 것인데, 거기에 이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묻힌 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듯하며, 지금 물속에 아직도 주춧돌 따위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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