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오성(五星)
제곡(帝嚳)이 별들의 위치를 밝혔고, 요는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하여 해·달·별들의 차서를 정리하였고, 순이 이를 받아서 일곱 가지의 정책을 마련하였다.
일곱 가지 정책이란 곧 다섯 별과 해·달이니,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 이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
그러나 《춘추》에서,
“별이 떨어졌다.”든가,
“별의 꼬리가 뻗쳤다.”는 사실만 적고 다섯 별에 대한 기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만일 그렇다면 순(舜)이 마련하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매우 의심스럽다.
상위고(象緯考)에,
“주가 은을 대신할 때 다섯 별이 방성에 모였고, 제 환공이 패자가 되려 할 때 다섯 별이 기성에 모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어느 자료에 의한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춘추》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다.
최호(崔浩)는 소급하여 추산한 결과, 한 나라 원년에 다섯 별이 정성에 모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지금 고찰하면 빨리 가다 느리게 가기도 하고 옆으로 가다 거꾸로 가기도 하며 또 가로 가고 세로 가는 것이 일정하지 아니하니, 시대에 따라 운행에 이변이 생기는 것인데 어떻게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지금 칠정력이 해마다 일정하지 않은 것을 보아도 그 운행이 일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는 사람과 같이 얘기할 일이다.
지금 천문을 보고 예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감씨와 석씨를 조종으로 삼고 있다.
감씨와 석씨는 모두 전국 시대 사람이다.
감씨는 이름이 덕으로 제나라 사람이요, 석씨는 이름이 신으로 위 나라 사람인데, 모두 《천문성점》 8권을 지었다.
아마 이 학문이 주 나라 말기부터 행한 듯하다.
24. 장령흑룡(長嶺黑龍)
바둑을 두는 법에,
“내가 살고 나서 남의 말을 잡아야 한다.” 고 하였다.
그렇지 않고서 남의 말도 잡지 못하고 내가 사는 것도 보장이 안 된다면 온 판을 지고 말 것이다.
중국은 장성 밖에 있는 땅이 구주보다 크며, 기후와 풍토가 전연 다르고 지리적 사정도 같지 아니하다.
중국에서는 한 번도 끝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저들은 기회를 이용하여 침략해 들어올 때 거침없이 들이민다.
속담에
“지키는 사람 열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는 격이다.
이것은 내가 먼저 충분히 살 수 있어야만 남을 잡기도 쉬운 것으로 방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오의 북쪽과 낭고의 밖에까지 나가서 칼을 휘두르며 공을 세우는 일이 있었지만, 동북 지역은 산악이 중첩되어 있어 개벽한 이래로 외부의 군대가 들어가 보지 못했다.
원 세조가 국경을 가장 멀리 개척하여 서쪽으로 4년 동안 원정한 결과 인도지역까지 들어갔었으나 동진 지방에 대하여는 공갈만 하였고, 감히 해를 입히지 못하였다.
장건(張騫)과 정화(鄭和)는 서역지방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장령과 흑룡강 사이에는 아무도 그 지역을 엿본 사람이 없었으니, 그 실정을 알 만하다.
중세 이전에는 주민도 적고 산물도 궁핍하여 발전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으나 유주·병주·영주의 3개 구역이 차츰 도시로 발전되어 옛날 12개 주(州)의 형태를 도로 찾았다.
그 땅이 북경에서 수천 리에 불과하니, 옛날 삭주에 비하면 더욱 가깝다.
이것은 정말
“내가 살 수 있는 사람이 남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를 담당한 사람은 이를 참고해야 할 일이다.
25. 천하수세(天下水勢)
천하의 물이 황하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옛적에 황하가 구하로 들어갔는데 태산의 겉을 돌아서 동해로 들어갔다.
공자가 노 나라에서 출생하였으나, 이곳의 지형으로 볼 때 따로 매달려 있으면서 울타리가 허술하여 곧장 내리밀기만 하고 막힌 곳이 철저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스승으로서는 높이 존경을 받았으나 지위가 낮았고 고생을 면치 못했다.
지금에는 물이 옆으로 터져서 회수로 들어간다.
염계(濂溪 주돈이)·고정(考亭 주희)은 모두 동남 지방에서 출생하여 성인의 후계가 되었고 찬란한 문화가 오회(吳會 오와 회계를 합친 지명)지방에 집중되었다.
산이 높으면 나무가 높고 물이 넓으면 고기가 크므로 인물이 양성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중국의 모든 산은 다 농촉(隴蜀 지금 섬서성)과 사천성의 지역에서 나왔는데, 용문산·적석산도 모두 황하를 걸치고 남으로 뻗어 내려갔다.
우(禹)가 산세를 따라 물을 정리한 것만 보아도 이것은 분명히 황하를 터 동으로 흐르게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따로 설명이 있었으므로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
황하는 본시 농촉의 후면과 곤륜산 동쪽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뻗어 돌아서 중국으로 들어와 가지고 회수로 들어가고, 양자강과 한수는 농촉에서 나와 남으로 뻗어 가다가 동으로 흘러 회수에서 합류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두 물이 중간은 넓고 출발점과 끝은 합쳐졌으니, 중국이 어떻게 통일이 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양자강의 근원이 매우 길어서 황하의 근원과 가깝다고 한다.
곤륜산이 북으로 삭방(朔方 중국 판도의 북쪽 지역) 이외로 뻗어 나갔는데 북쪽 지역에서의 상태는 그 끝 부분을 알 도리가 없다.
그 남으로 내려온 가닥이 동남으로 달려 내려와서 백두산이 되고 백두산에서 북으로 흐르는 물이 혼동강인데 북에서 흑룡강과 합류되어 다시 동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흑룡강의 크기는 황하와 거의 같으니 아마 삭방 이북에 있는 모든 산에서 나오는 물이 모두 이리로 모여드는 것일 것이다.
현지는 보지 못했으나 본 것이나 다름없다.
흑룡강은 지금의 영고탑과 오라에서 천 리도 되지 않으며 옛적 실위씨(室韋氏)의 터전인데, 사람들이 거칠고 사납고 비속하여 문명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 경박(鏡泊 영고탑 서남방에 있는 큰 호수) 지방은 벌써 완안씨(完顔氏)가 왕국을 일으킨 구역이다.
하늘의 운수가 변한다면 후일에 흑룡강이나 액라 지방에서 나온 인물이 중국을 차지할 시기가 있을는지도 모르며, 이렇게 지극히 나쁜 운수를 만났다가 앞으로 매우 좋은 운수가 돌아올는지도 모른다.
26. 국중인재(國中人才)
우리나라는 패수(浿水 여기서는 압록강을 이름)와 대수(帶水 여기서는 한강을 이름) 이북의 면적이 사방 천 리가 되지 못하므로 여기에서 함경도까지 넣어가지고 평균을 낸다면 가까스로 그 면적은 될 것이며, 패수와 대수 이하는 강원도 지역까지 합해도 사방 천 리에 불과하다.
지금에 와서 개성 이서는 기풍이 좋지 못하다 하여 그 사람들을 배격하고 등용하지 아니하며 함경도도 문화가 발달되지 못하고 인재도 거의 없다.
그러한 상태는 고려 시대부터 벌써 그러하였다.
《여지기》를 보아도 그쪽에서는 유명한 인물이 전혀 나지 않았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관서 지방은 옛날 성인(기자를 말함)이 처음으로 개척한 지역이요 고구려가 그대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수없이 대를 이어서 쏟아져 나왔다.
이때에 삼남(三南) 지방은 미개지로 버려두다시피 했던 것인데, 우리 왕조가 건국하면서부터 양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생각으로는, 고려가 태봉을 이어받았고 태봉은 그 근원이 신라에서 출발하였다.
신라의 문무왕이 당 나라를 끼고 삼국을 통일한 뒤에 그 세력이 서북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여 요동이남의 지역이 다시 숙신의 여러 종족들에게 점령되었다.
궁예왕이 흑금으로 망명하여 황무지를 개척하여 도읍을 세운 곳이 바로 지금의 철원이다.
고려 태조가 옛날 영토를 수복하려 하였으나 압록강 밖까지에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요동 전부가 요에 흡수되었다.
또 왕씨가 무력으로 나라를 차지하였으므로 문화면에서는 극히 부족하였으며 일시적으로 유능한 인물이 있었으나 힘이 세고 용맹이 있을 뿐 거칠고 비속하여 후세에 전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팔조(八條 기자가 조선에서 실시했다는 8개의 법조항.)의 남긴 교화는 모두 없어지고 말았고 중세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문화가 약간 열렸다.
호남은 마한이며, 곧 옛 성인의 후손이다.
옛날 수도는 벌써 북상투 종족인 위만에게 함몰되었으나 한 줄기 은 나라의 문화가 남부 지역에서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
장량(張良)이 한 나라의 왕업을 복구하려 할 때에 창해밖에 와서 힘을 빌렸으니 우리 한이란 명칭은 사실상 진의 난리를 피해 온 한 나라의 백성들에게서 생긴 것이다.
진에서 피난해 온 사람들에게 동쪽 지방을 떼어서 빌려 주었으니, 진 나라에서 멀리 망명한 자들에 의하여 진한이 형성된 것이다.
진은 본시 기산에 있던 주나라의 옛땅이었으니, 주 나라의 한 가닥 문화가 큰 고개의 동쪽에서 없어지지 않았고 명맥을 유지 계승한 것은 곧 신라이다.
그러므로 예절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
경주의 농지 구획 같은 것은 결코 미개민족으로서는 창안할 수 없는 것으로 진의 농지 구획법과 일치하다.
혹자는 농지 구획선을 결렬해놓은 것을 파괴했다고 보는데, 이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삼남(三南)에 문풍(文風)이 약간 성하고 관서(關西)에 무무(貿貿)한 것은 위만으로부터이다.
위만이 우리 동방으로 와서 맨 먼저 북상투를 따르도록 하였으니, 그 교화가 어떻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습속이 이미 오래되어 아무리 몇 세대를 지나도 종래 크게 변혁되지 못하여 고려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유행되었다.
또한, 지금 나라에서 무력이 거의 양서 지방에서 나오는 것도 다 북상투를 틀어 오던 습속에서이니, 이는 우리 동방 풍속의 시말이다.
만일 서북 사람들의 풍습을 빨리 변혁하려 한다면 양도의 감사에게 달려 있다.
즉, 감사 선발을 이조에 맡길 것이 아니라 임금이 직접 유신 중에서 상당한 명망이 있는 이를 선발하되 10년을 그 과만 기간으로 하여 반드시 성적이 있기를 기해야 하며, 또 큰 도시권에 드는 각처 10여 고을에도 감사로 하여금 조정에 있는 유신 중에 명망이 있는 이를 재량껏 선택하여 목·수(牧守)를 삼되 자주 이동시키지 말고 그 성과와 과오에 의하여 상벌이 따르게 한다면 어찌 기성(기자)의 유풍을 만회시키지 못하겠는가?
삼국 즈음에 대해서는 논할 나위가 없지만, 왕씨(王氏 고려) 이후까지에도 이 점에 대해 요량한 바가 없었으니, 그저 개탄스럴 뿐이다.
27. 중토남북(中土南北)
왕동궤(王同軌)는 말하기를,
“천하의 대세가 진·한 이전에는 북쪽이 가장 성했고, 수·당 이후로는 남쪽이 가장 성하였다.”고 하였다.
주 대의 주(州)가 아홉인데, 그 일곱이 북쪽에 있었고
한 대에 부(部)가 열인데, 그 아홉이 북쪽에 있었다.
원시(元始 한 평제의 연호) 연간에 천하의 인구가 모두 1천 2백여 만 호인데 남쪽은 겨우 4분의 1이었고, 예속과 문화가 찬란하였으며 식량과 물자가 풍부한 곳이 모두 북쪽이었다.
그 시대에는 대체로 연운·하황을 중요한 지역이라 하였다.
당 대에는 도가 열이었는데 남과 북이 각각 다섯이었고,
송대에는 노(路)가 스물셋이었는데 북쪽이 열셋이었으며, 희령과 원풍 연간 전성시기에 천하의 총호구가 1천 6백 50만 호였는데 북쪽이 겨우 50만이었으니 또한 겨우 4분의 1에 해당된다.
추로(鄒魯 공자와 맹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의 많은 학자들이 염(濂)·민(閩)으로 옮겨갔으며 청주와 제(齊)에 있던 문화가 마침내 오·초(吳楚) 지방에 가서 있게 되었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운수가 좋고 나빠지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물자의 축적이 북이 남만 못한 때문이다.
그곳이 이때까지는 개척되지 못하고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었는데, 진과 당 이후에 오랑캐의 세력이 강성하여 문화인들이 남쪽으로 건너감으로부터 풍속이 크게 변화되었다.
그 풍부한 물자를 가지고 교육을 실시하였으니 그 사정이 어찌 그렇게 되지 아니하랴?
공자는,
“생활을 풍부하게 하고 그 다음에 교육을 실시한다.” 하였다.
기한을 면치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예절을 차리겠는가?
“생명을 내놓고서라도 옳은 길을 지킨다.”는 것은 훌륭한 학자만이 할 수 있지, 평범한 사람이고 보면 곤궁할 경우에 뜻을 변치 않은 이가 없다.
현재 시골 사람의 생활을 보면 노력하여 재산을 축적하거나 또는 벼슬살이로 재산을 마련한 사람이면 제법 예절을 차리고 체면을 세우며 행세를 하여 차츰 집안의 운수가 일지만 그렇지 못하면 안자와 백기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패망의 길을 걸으며, 변수(卞隨)와 백이의 자손일지라도 저절로 탐욕을 억제하지 못한다.
이것이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천하에서 나오는 세금 중에서 강남 지방이 10분의 9를 차지하며 집집마다 시서(詩書)를 외고 사람마다 의관을 갖추었다.
우수한 창의력과 총명한 지혜로 정교한 기계를 만들어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 모두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사정은 또 이와 달라서, 숭상하는 것이란 오직 문벌 하나만을 중시하고 재산이 있는 것을 천시한다.
사람은 자기의 긍지를 지닐 줄 모르고 풍속은 무리한 상태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서울과 가까이 사는 사람은 좀 넉넉하고 멀어질수록 더욱 형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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