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일경지경(日徑地徑)
양마락(陽瑪諾)의 《천문략》에,
“태양은 땅보다 1백 65배 남짓하다.” 하였고, 뒤의 사람은,
“5배 남짓하다.” 하였다.
차이가 너무 큰 것으로 보아 반드시 하나는 잘못된 듯하다.
가령 후자가,
“땅의 지름이 3만 리다.” 한 것이 정확하다면 태양의 지름은 15만 리 남짓하다.
그런데 두 학설이 모두 땅과의 거리를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거리를 모르고서 어떻게 크기를 측정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이에 대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
62. 인면박(人面雹)
인조 병인년에 창성에 우박이 떨어졌는데 사람의 얼굴처럼 생겨 코와 눈이 모두 갖추어졌다.
그리고나서 정묘년 난리가 있었고, 을해년에 또 이런 일이 있었는데 다음 해에 병자년 난리가 있었다 한다.
64. 비양도(飛颺島)
지금 제주의 비양도는 서산(瑞山)이라고도 한다.
주(州)의 서북쪽에 있는데 높이가 백여 장, 주위가 40여 리에 달한다.
처음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속에 땅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고 흔들린 지 7일 만에 바다 가운데에 솟아올랐다.
풀이나 나무도 없고 바라보면 석류황 덩어리와 같다.
탐라도에, “봉우리가 넷이 있었는데 흙이나 돌이 모두 붉고 수포석(水泡石)처럼 생겨 어떤 것은 우뚝 서서 사람처럼 보인다.
산 둘레에는 대가 울창하나 산꼭대기에는 초목이 없다.
여기서 나는 대는 화살감으로 아주 좋다.” 하였으니, 이러한 이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통고(通考)》에 보면, “어느 주(州)에는 큰 산봉우리가 산마루를 넘어와서 떨어져 부숴졌다 하고, 또 어느 땅에는 여와(女媧)의 무덤이 있었는데 별안간에 없어졌다가 여러 날을 지난 후에 다시 물 속에서 떠올랐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그와 비슷한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무엇이 있어서 이것을 옮겨 놓은 것이니 옮겨 놓은 것은 힘이다.
힘 속에는 반드시 어떤 의식이 작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도깨비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도깨비는 바람과 힘이 뭉친 것이니, 바람은 못 들어가는 곳이 없기 때문에 큰 것을 작게도 만들 수 있으며 큰 물체를 창틈으로도 끌어낼 수 있다.
또 풍수의 말을 들으면 관이 무덤 속에서 굴러가기도 하며, 흙구멍으로 시체를 훔쳐가기도 한다고 한다.
또 요술쟁이가 큰 용을 가느다란 바늘로 만들기도 한다 하니 세상에는 확실히 이러한 이치가 있다.
1백 길 되는 산을 옮겨 놓은 것은 전혀 이상할 것 없다.
65. 제주(濟州)
제주는 옛날에는 탐라국이었다.
육지에서 9백 70여 리에 위치하며 주위는 4백여 리가 된다.
산꼭대기는 오목하게 생겨 봉우리마다 모두 그러하다.
날씨가 활짝 개었을 때 올라가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하늘 가에 산이 보인다.
남방에서 온 중국 상인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송강부의 금산이라 한다.
춘분과 추분에는 남극노인성이 보인다.
산세가 험준한 것이 다른 산과 다르다.
제주는 앞쪽에서 북으로 향해 있고 대정과 정의는 산 뒤에 있는데 정의는 서쪽이요, 대정은 동쪽이다.
서복과 한종이 바다에 들어갔다는 것이 꾸며댄 말이긴 하나 그의 말이,
“지부산에 올라가서 신산을 바라본다.” 하였으니, 지부산은 동해가에 있는 것으로 시황이 직접 올라가 본 곳이다.
올라가면 바라보인다는 곳이 아마 이 산을 가리킨 듯하다.
송강의 금산은 서남쪽에 있으니 저쪽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반드시 동북이 될 것이다.
섬 안에 또 영주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상하다.
66. 고려주군(高麗州郡)
고려 성종 13년에 개주를 개성부로 고치고 6개의 적현과 7개의 기현을 관장하게 하였고 또 10개의 도를 확정하였다.
모두 1백 91개의 현과 6백 52개의 주로, 주와 현이 모두 8백 43개이다.
이때는 여진과 말갈이 아직 통합되지 않았는데도 우리나라의 8도에 비해 그 관청의 수가 갑절이 넘었으니 백성의 피해가 크지 않을 수 있었으랴?
67. 일일칠조(一日七潮)
《직방외기》에 보면,
“구라파의 니구백아해(尼歐白亞海)에는 밀물이 하루에 일곱 번씩 들어온다.
옛날 아리사다(阿利斯多)라는 명사는 물리학을 연구했는데, 이 밀물의 이치만은 알 도리가 없어서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
그리하여 그 지방 속담에 ‘아리사다가 이 밀물을 잡으려 했는데 반대로 이 밀물이 아리사다를 잡았다’고 하였다.” 하였다.
윤유장(尹幼章)이 이 사실을 나에게 묻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하 밀물 시간의 차이는 달에 의하여 발생하고 힘이 크고 작은 것은 태양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이 땅 위에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니. 남회인(南懷仁)의 《곤여도》 설에서도 증명된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에 밀물이 일곱 번이나 생길 수가 있는가?
밀물은 물이 대기에 의하여 솟아오르는 것이다.
중국의 동해를 보더라도 적도의 수원에서 북으로 갈석까지 수만 리가 넘는데도 하루에 두 번씩 밀려오는 것을 보면 이는 대기의 힘에 의한 것이요 물의 힘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힘이 밤낮으로 왼쪽으로 돌아가는데, 모든 적도 이북에 있는 것은 물이 북쪽으로 올라가니 이는 대기 때문이다.
만일 과연 하루에 일곱 번씩 온다고 하면 그 진원지가 가까워야 할 터인데 그 진원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기가 남북 사이에서 여러 번 나왔다 들어갔다 할 수 있겠는가?
이는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서 이치 밖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사태는 모두 도깨비의 장난이다.
우리나라에서 수십 년 전에 남해에서 밀물이 물러났다가는 다시 올라와서 하루에 세 번이나 밀물이 들어 해안에 넘치고 어족들이 많이 죽었다.
이때에 보고가 올라왔었는데, 이것은 일시적인 물의 이변으로서 물귀신의 장난이요 정상적인 이치로는 규명될 수 없다.
서양의 문제도 반드시 일시적으로 우연히 발생한 이변이었을 것인데, 아리사다라는 사람은 그의 학술이 모자랐을 뿐이다.”
《여지비고》는 《일통지》에서 뽑아서 만든 책이다.
거기에 이르기를,
“경주의 바다 밀물은 크고 작은 것이 장경성(長庚星)에 의하여 발생하며 달이 만월인가 아닌가 와는 관계없이 반 달 동안은 동으로 흐르고 반 달은 서로 흐른다.” 하였는데, 이 말은 정말 이상하다.
큰 바다의 물이 어째서 하늘과 반대 방향인 동쪽으로 흐를 수가 있겠는가?
장경은 금성으로 태양이 진 뒤에 서쪽에서 나타나는 것이니, 해가 뜨기 전에는 계명이다.
이 별은 언제나 태양과 붙어서 돌기 때문에 태양과 나란히 다닐 때는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장경이라 함은 서쪽에서 나타나는 2백 40일 뿐이니 그 나머지의 날에는 어떻게 되는가?
또 금성은 5백 50여 일에 하늘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니 어찌 반 달을 주기로 하여 변경될 수가 있겠으며. 동으로 흐르며 서로 흐르는 데에 대한 근거가 없다.
반 달 사이에 물이 어디로 갔다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믿을 가치가 없음이 분명하다.
또 다시 생각해 보면, 바람과 불 기운이 땅속에 흘러다니다가 간혹 내뿜고 용솟음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여기저기서 증명할 수 있으니, 촉의 화정과 일본의 열전 같은 것이 있고, 서양에서는 화산에 돌이 터져나가서 백리 밖에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물도 대기에 따라서 흐르기 때문에 바다 가운데서 대기가 용솟음 칠 때에는 밀물이 반드시 이렇게 될 것이다.
68. 시헌력(時憲曆)
지금 음양가들이 길흉을 점칠 때 아직도 독일 사람 탕약망(湯若望)의 시헌력을 쓰지 않고 굳이 대통력을 사용한다.
저 곽 태사(郭太史)의 수시력이 원 세조 때에 나온 것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이나, 역가에서는 소·장(消長)법을 쓰지 않은 것을 결점으로 생각한다.
대통력이란 명 태조 때에 원통이 만든 것인데 수시력을 만든 때와 그 사이가 백 년이 못 되었고 순치 때 이르러는 탕약망이 또 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시헌력은 하늘이 운행하는 도수는 계산하지 않고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만들었으니 이것은 인간의 역서요 하늘의 역서가 아니니 달과 날을 가져 운명을 감정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음양가들은 모두 대통력을 따른다.
그러나 대통력에도 틀린 것이 없을 수 없음은 어찌할 것인가?
예부터 역법이 오래되면 반드시 고쳐 왔는데 시헌력이 나오고 나서는 아무도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고 다만 대통력이라는 기성 역법에만 의거하여 1년을 24기로 평균하게 나누어 추정하고 있으니, 만일 오래되어 달과 날의 운행에 차이가 생길 적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체 운명을 추정한다는 것이 본래 믿을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이니 그 근본을 추구해 보았자 도대체 어디서부터 숫자를 시작할 것인가?
대신 최석정(崔錫鼎)이 역관에게 명하여 시헌력 가운데서 24기의 시간의 장단과 분수를 표시하게 했는데, 이것은 절기의 변천이 본래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겨울과 여름의 날수를 생각해 보아도 서로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69. 여국(女國)
옛날부터 서쪽에 여국이 있다고 한다.
《직방외기》에 보면, 다만
“달단의 서쪽에 옛날의 여국이 있었다.
그 나라 풍속에는 봄철에 남자 한 사람만이 그곳에 오는 것을 허용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죽여 버렸는데 지금은 다른 나라에 병합하고 그 명칭만 남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장 근사하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만 하면 죽여 버렸다고 하니, 그럼, 봄철에 들어오는 남자는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빌려오는 것일 터인즉 이는 한때의 습속일 것이다.
《한서》 지리지에 보면, 중국 12주 가운데서 대체로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주가 많다.
예주·청주·연주·병주의 4주는 남자 2에 여자 3,
양주는 남자 2에 여자 5,
형주는 남자 1에 여자 2,
유주는 남자 1에 여자 3의 비율이나
옹주는 남자 3에 여자 2,
기주는 남자 5에 여자 3의 비율로서,
대체로 옹주는 남자가 가장 많고 유주는 여자가 가장 많다.
그러나 유주는 요동의 요소이다.
그 산은 의무려(醫巫閭)이고 그 소산물은 고기와 소금이다.
지금 들으면 그 지역에는 여자가 적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몰래 여자들을 그곳에 팔아넘기곤 한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순(舜)이 기주·연주·청주·서주·형주·양주·예주·양주·옹주·유주·병주·영주의 12개 주를 설치하였는데,
우공(禹貢)에 와서 유주·병주·영주를 폐지하고 9주로 만들었고, 주관에 이르러는 서주·양주·여주를 폐지하고 유주와 병주를 첨가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많고 적은 문제도 그 가운데 있을 것인데, 그 여국은 북호의 서쪽으로서 아세아와 구라파 중앙에 끼여 있을 것이니, 생각건대 본래 여자가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풍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남녀의 정욕은 선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며, 이미 생식의 길을 열어 놓았으니 마침내는 막을 수 없었을 것인데, 옛적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졌다는 말이 믿을 만하다.
우리나라도 그 지역의 유주와 가까워서 본시 여자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충렬왕 때 대부경(大府卿) 박유(朴楡)가 상소하기를,
“우리나라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계급이 높고 낮은 구별이 없이 아내를 한 명으로 제한하였고 아들이 없는 사람도 감히 첩을 두지 못하는데, 외국인으로서 입국하여 사는 자들에게는 제한 없이 아내를 얻게 하므로 신은 인물이 모두 북쪽으로 넘어갈까 염려되니, 관리들에게는 첩을 두도록 하되 그 계급에 따라서 그 수를 조정하여 일반 사람에게도 아내와 첩을 한 명씩 두게 하고 첩들이 낳은 자식도 나라에 벼슬할 수 있기를 적자와 다름없이 한다면 배우자를 잃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요, 사람도 흘러나가지 아니하여 인구가 날로 늘어날 것이다.”고 하자,
여자들이 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당시에 한 대신이 그 아내가 무서워 그 건의를 무시해 버렸다고 한다.
대부가 처첩을 두는 것은 법에서 금하지 않은 것인데 아마도 그때 왕이 원 나라 공주에게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듯하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서선(徐選)이 법을 세운 후부터 개가(改嫁 다시 결혼함)한 여자의 자손에 대하여 앞길을 막아 버렸다.
그러므로 양반집에서 과부가 되면 모두 죽을 때까지 수절하였고 천한 사람들도 이 풍속을 따라 개가하지 아니하였는데, 남자는 첩을 많이 두어도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거의 사리에 맞는 듯하다.
또 듣건대, 경상도와 전라도 해변 지역에는 남편 없는 여자로서 나그네가 요구하면 쉽사리 얻을 수 있다 하여, 제주도에는 한 사람이 아내를 셋 내지 다섯까지 두는 사람이 있다 하니, 이것도 물이 가까운 곳에서는 여자가 많다는 증거이다.
70. 풍기유전(風氣流傳)
풍속과 습관의 전통은 그 지방 유풍만이 아니라 왔다 갔다 하며 옮겨 거주하는 곳에 따라 그 습관이 형성된다.
우리나라의 영남 지방은 진 나라 백성이 처음으로 창설한 곳이다.
진 나라는 본래 문왕과 무왕이 터전이므로 지금 영남은 진 나라의 풍속과 매우 비슷하다.
소 동파의 원경루기에서도 증명이 된다.
이 밖에 경주의 원전은 분명히 상앙(商鞅)이 농지의 구획선을 개척한 제도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식해서 이것을 모른다.
개성의 삿갓과 타래머리는 은 나라 백성이 낙양에 주거할 때의 풍속인데 기자를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 온 듯하다.
최근으로 말하면 북방 사람들이 제주도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제주도 사람들이 거칠고 사나운데다가 그 사투리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개성의 향교 지기로서 성균관에 나와 있는 자의 곡소리까지도 변하지 않았으니, 마치 제주산 망아지와 내륙산 망아지가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발해가 망하고 나서 그 백성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글안이(거란이) 망했을 때도 그 백성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이것을 글안장이라 하므로 서쪽 사람들은 대체로 건장하고 힘쓰기를 좋아하여 옛날 풍속이 없어지지 않았다.
충렬왕 때에 원 나라에서 만자군 1만 4천 명을 보내어 해주·염주·백주의 3개 주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만자군은 남만 지방의 해귀족(海鬼族)이다.
지금 무과 시험에서 굳센 활을 당기어 먼 데까지 쏘는데 거의 황해도에서 독차지하여 서울 사람으로서는 상대하지 못하니 아마 그들의 후손인 듯하다.
임진왜란에 유정이 우리나라의 군사를 많이 데리고 갔었고 그 뒤에 백사(白沙) 이상(李相 이항복)이 그 군사들을 만났는데, 남쪽 북쪽에서 여러 번 전투에 참가하여 어려운 고비를 많이 겪었던 그들은,
“달자(㺚子 말하기를,)는 상대하기 쉽고 해귀족은 약간 힘들지만, 왜놈처럼 강한 것은 없다.”고 하였으니,
왜인들은 그처럼 강한데다가 새부리총이라는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지금 해변의 여러 고을에는 왜인들로서 돌아가지 않고 거주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 명칭을 향화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혼인도 하지 않고 따로 부락을 형성하여 그 수가 점점 많아졌다.
조정에서는 이를 예조에 맡겨 아전들로 하여금 그 세금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비록 그곳에 정착해 있으나 속으로는 풍속을 달리하고 있으므로 내가 알기에는, 만일 외적이 들어올 때에는 그들은 반드시 기회를 보아 배반할 것이 뻔하니, 하루속히 단안을 내려야 할 것이다.
즉 안정된 시기에 그들을 우리 국적에 편입시켜 일상생활에 일반 백성들과 같이 혜택을 누리게 한다면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그들은 모두 강한 군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당면한 급무이다.
71. 비류수(沸流水)
우리 역사에도 비류수가 어느 지역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상고하건대,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로 나와 고구려 임금 궁과 비류수에서 크게 싸워 연이어 격파하고 마침내 환도에 올라갔다고 했다.
환도는 압록강 서쪽에 있은즉 비류수가 우리나라 경내에 있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다.
대체로 그때에 요동 지방은 고구려에 소속되어 있었다.
화령(和寧)
모든 나라의 칭호는 흔히 그 근본을 따랐으니, 잊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나라가 국가를 건설하고 조선과 화령 두 가지 칭호를 가지고 중국에 요청하였는데 현재의 칭호 즉, 조선으로 정해진 것은 명 나라 황제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화령이란 무엇인가?
국경 밖에도 이 명칭이 있었으나 이것은 요청할 바가 아니었다.
고려 식화지(食貨志)에 보면 신우 9년에 우리 태조가 국경을 안정케 하는 건의를 올렸는데,
“동북 일대의 주·군은 땅이 좁고 메마르지만 화령만은 도내에서 땅이 넓고 비옥하다.” 하였고, 공양왕 3년에 화령판관(和寧判官)이란 말이 있었으며,
또 동쪽 지역에 화주가 있었는데 공민왕 18년에 승격시켜 화령부로 만들었으니, 화령부는 곧 지금의 영흥땅으로 선원전(璿源殿)이 있다.
이곳은 태조가 일어난 곳으로 이른바 적전이란 것인즉, 화령의 칭호는 반드시 이곳을 가리킨 것이니, 고증해 보아야 할 것이다.
72. 두만쟁계(豆滿爭界)
북방의 국경은 두만강으로 경계선을 삼고 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윤관(尹瓘)의 비(碑)가 선춘령에 있고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칠백 리 밖에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지난번에 국경선을 정할 때 두만강의 원류만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
두만이란 것은 바다로 들어가는 위치를 말한 것이니, 토문(土門)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여기인데, 어음이 비슷해서 와전된 것이다.
백두산의 물이 이리로 모여드는데, 만일 토문에서 여러 물의 근원을 따라 올라간다면 지금 강 북쪽에 있는 지역은 모두 우리의 소유이며 선춘령도 그 안에 포함된다.
말하는 사람들은, 경계선을 논쟁할 때 세밀히 따지지 못한 것을 탓하는데 그 말도 옳다.
그러나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것을 갑자기 회수한다하여 찾아질 바가 아니며, 방어와 수호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장래에 큰 걱정거리가 되므로 반드시 영토를 넓히는 것만을 능사로 삼을 것은 아니다.
지금 중국과의 관계가 잘되고 있어 국경에 걱정이 없는 터에 다만 욕심만 부리고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옛적에 한 광무는 옥문관을 폐쇄하고 서역에서 보내는 인질을 사절하였으며, 송 태조는 도끼로 대도하를 그으면서,
“이 밖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원대한 생각이 있는 처사라고 하였다.
토지만 넓은 것이 영구히 안정된 방법이 아니므로 서혜비(徐惠妃 당태종의 후궁인 현비 서혜)의 간한 글이 사실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의 땅덩어리는 한 곳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말을 거절한 양 무제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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