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법좌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비가 개고 나니 산의 빛이 더 선명하고  
봄이 오니 꽃이 붉게 피어난다.  
달은 차고 솔가지에 걸렸으며,  
바람은 뜨락의 잣나무를 흔들어 춤춘다.

비가 오기 전보다 지나고 난 뒤의 산의 빛은 더욱 아름답다. 봄이 오면 붉은 꽃만 피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봄의 생기를 머금어 반짝인다. 화가의 눈에도 산의 빛과 바다 물빛은 하루에도 수없이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흔히 보는 자연 풍경– 달이 차가운 솔가지에 걸리고, 바람이 잣나무를 흔들며 노니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의 진리이자 법문이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다가 주장자를 여러분께 보이며 법상을 세 번 두드렸는데, 이것이 곧 법문이다. 이 주장자를 보라. 그러나 죽은 송장에게 이걸 보여준들 그것을 볼 수 있겠는가. 법상을 '탁' 치는 이 소리를 들었다면, 여러분은 사람 소리, 물소리, 새 소리 등 온갖 소리를 구분할 수 있듯이 이 소리 또한 분간할 수 있을까? 이게 무슨 도리인가? 공부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들어도 알 수 없는 이치다.

우주 만물은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조화롭게 존재한다. 푸른 산에는 초목이 자라고, 꽃이 피어나며, 새가 울고, 물과 돌 모두가 어우러져 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이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근본, 즉 자신과 만물을 하나로 잇는 뿌리를 깨닫지 못한다.

모든 상대적인 분별(二邊)을 넘어 대자유와 대자재를 얻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실재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진리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우주 만물 속에는 이미 불법(佛法)이 깃들어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곧 불법이고, 우리의 모든 행동 역시 불법이다. 불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공기 속 전기와 전자가 사람에게도, 나무와 물에도 통하듯, 불법의 진리도 삼라만상 어디 하나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이렇듯 범우주적인 진리가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있음에도, 자신의 지혜가 부족하고 안목이 어두우면 그것을 통찰하지 못한다.
모든 시냇물은 바다로 흘러들기를 목표로 삼듯, 삼라만상의 만물은 허공을 근본으로 삼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도 그 근저에는 허공을 극치로 삼고 있다. 육범과 사성 역시 그 근본을 부처님께 둔다.

밝은 안목을 가진 수행자는 이 주장자를 중심으로 삼는다. 선지식들은 주장자를 짚으며 다니고, 제자들은 그것을 들고 다닌다. 그렇다면 이 주장자가 어떻게 극치가 되는가? 만일 누군가 이 이치를 온전히 깨닫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두 손으로 주장자를 전해줄 것이다.

한가로이 선상에 기대어 있겠다만,
주장자를 말함은 후학에게 길을 가리키기 위해서다.

옛날 중국 복주의 고령사에는 신찬선사가 있었다. 그는 처음 출가하여 고향의 대중사에서 스승을 모셨는데, 스승은 경전만 탐독할 뿐 참선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뜻이나 법상에서 아무 말 없이 주장자로 법상을 탁 치신 뜻은 문자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선지식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수행하며 방황하다가, 마침내 백장화상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 본 사찰로 돌아온 그는 스승에게 들려주었다.
"무엇을 익혀 돌아왔는가?" 
"아무런 일도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중과 어울려 일을 돌보며 생활했고, 스승은 여전히 경전을 펴 든 채 문자만 탐하며 지냈다. 이는 깨로 기름을 짜면서 남은 찌꺼기만 먹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신찬선사는 이런 스승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스님은 문자만 붙잡고 매일 경전만 읽고 있구나."

어느 날, 은사가 목욕 도중 등에 밀어 달라고 하자 그는 말하며 등을 밀었다.
"좋은 불당이지만 부처가 영험하지 못하군요."
스승이 고개를 돌리자 그는 다시 말했다.
"부처는 영험하진 않지만 밝은 광명을 품고 있군요."

또 한 번 스승이 경전을 읽으며 창가에 앉아있는데, 한 벌이 창문에 부딪히며 나가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신찬선사는 게송을 읊었다.

문으로 나가지 않고
창문을 치다니 크게 어리석다.
백년 동안 헌 종이를 뚫는다 해도
어느 날에야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이는 글만 읽어나가는 것으로는 생사의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스승은 그제야 신찬선사의 말과 행동을 곰곰이 되짚으며 깨달았다. "이 사람이 이제야 도를 얻었구나." 그러고 나서 경전을 덮고 물었다.
"그대는 누구를 만나 도를 배웠는가?"
"저는 백장화상에게 머무름 없는 도를 배웠으며, 은사의 가르침에 보답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스승은 대중에게 공양을 준비하게 했고, 신찬선사를 환대하며 설법을 청했다. 선사는 법상에 올라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전했다.

신령한 광명이 홀로 빛나며
육근과 육진을 초월한 자리.
마음 본질이 진리를 드러내니
무엇에 걸릴 것이 있으랴.
참된 성품은 더럽혀짐이 없으며
본래부터 완전하게 이루어졌노라.
다만 허망한 인연에서 벗어나면
곧 여여한 부처이다.

참된 성품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음은 마치 연꽃에 흙탕물을 들이부어도 더렵혀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 어떤 더러움을 묻으려 해도 참된 자리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 잔망한 생각만 떨치면 바로 여여한 부처로 돌아간다.

스승은 그제야 깨달음을 얻고 말했다.

늘그막에 이런 깊은 설법을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선사는 이후 고령사로 가서 몇 해 동안 대중을 가르치며 교화에 힘썼다. 시간이 흘러 임종이 가까워지자, 스스로 머리를 깎고 목욕을 한 뒤, 종을 울리며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소리 없는 삼매를 이해할 수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잘 들어라. 모든 생각을 비우고 조용히 받아들여라."

대중이 모두 선사의 무성삼매를 들으려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그는 차분하고 엄연하게 입적하였다. 이후 본산에는 그의 탑이 세워졌다.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