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약 1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시대에 불교는 법흥왕 때부터 크게 융성하기 시작했으며, 법흥왕, 박염촉(이차돈의 방언), 원효대사를 신라 불교의 삼성(三聖)이라 일컫는다.
법흥왕은 불교를 진흥시키기 위해 천경림 숲을 베어 절을 짓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은 이를 강하게 반대하며 간언했다. 이에 법흥왕은 탄식하며 말했다.
"내 덕이 부족하여 부처님을 받들고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하려 하는데, 신하들이 이를 따르지 않으니 누가 나를 대신해 이 깊은 불법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때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이 나서서 간청했다.
"폐하께서 신하의 목을 치심으로써 의논을 결정하소서."
왕은 난감해하며 답했다.
"불도를 흥왕하기 위함이라 하여 충직한 이를 먼저 죽이는 것이 옳단 말인가?"
이에 이차돈은 굳은 의지를 보이며 말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천신이 받들어 행하는 교입니다. 소신을 참하신다면 하늘과 땅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니 누가 이를 감히 거스르겠습니까? 몸을 바쳐 올바른 길을 세우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온데, 하물며 부처님의 광명이 세상을 비추고 폐하의 도모가 오랫동안 번영한다면, 죽음 또한 영광일 것입니다."
왕은 그의 결심에 크게 감탄하며 이에 대한 논의를 신하들과 다시 이어갔다. 신하들은 여전히 반대하며 말했다.
"승려들은 머리를 깎고 기이한 행색을 하니, 혹 우리가 이를 따랐다가 후회할까 두렵습니다."
이차돈은 다시 청원하며 말했다.
"특별한 사람이 있기에 큰일 또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불법은 깊고 심오하니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국 법흥왕은 결심을 굳히고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 이차돈은 형장에서 마지막 서원을 남겼다.
"불교가 나라에 복을 주고 백성들에게 이로우면, 내 목에서 흰 젖이 흐를 것이고, 해가 될 것이라면 붉은 피가 흐를 것입니다. 이것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이스쳐 처형이 집행되자 그의 말처럼 목에서는 흰 젖이 솟구쳤고, 그 목은 허공으로 날아가 멀리 백률사에 떨어졌다. 동시에 태양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으며, 대지가 크게 진동하였다.
그 이후 신라는 불교가 본격적으로 융성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부처님께 예배하며 도를 행했고, 이차돈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법주사라 지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는 국교로 자리 잡았고 찬란한 신라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대각국사 의천도 이차돈의 희생을 기리며 그의 사당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님 찾으려 천리를 남행했건만
아득한 청산만 몇 해를 바라보네
말세에 법 행함 어려움을 만난다면
나 또한 님처럼 몸을 바치리라."
한편, 원효대사가 도를 깨우친 일화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의상대사와 함께 불법을 배우고자 중국으로 유학 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숙소를 찾다 결국 무덤 속에서 머물게 되었다. 깊은 밤 목마름에 물을 찾아 헤매던 그는 그릇에 담긴 물을 발견하고 마셨는데, 시원하고 맛이 좋아 갈증을 해소했다. 그러나 이튿날 날이 밝아와 보니 그 물은 사람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역겨움에 몸서리치며 토하던 원효대사는 바로 그 순간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효 대사는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는 몰라서 마셨더니 시원하더라. 그런데 날이 새고 나니 그것이 사람의 해골에서 나온 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제야 구역질이 나오는구나. 이는 곧 마음이 생기면 모든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삼계가 오직 마음에 의존하고, 만 가지 이치가 오직 인식에 달려 있으니,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법을 따로 밖에서 찾을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그의 말은 마음의 생멸이 본질적인 참마음을 차지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망상 곧 잡념과 흔들림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가리킨다.
원효 스님은 이에 이르렀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도를 깨달았으니 굳이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겠다." 이렇게 말하며 본국으로 돌아왔다.
원효 대사가 저술한 책이 천여 권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그는 단순히 저술로 끝내지 않고 신라 곳곳을 누비며 불법을 전했다. 거기서 그는 작은 장삼을 걸치고 주장자를 짚은 순회하는 승려로서, 만나는 이에게 각자의 처지와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법을 행했다. 선비를 만나면 그에 맞는 가르침을, 농부를 만나면 농부의 삶에 맞는 가르침을 주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어른들에게는 어른들에 맞게, 또한 무지한 이에게는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여성에게는 여성에게 필요한 설법으로 교육하고 깨우침을 전하며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감화를 주고 다녔다.
아이들과 만나게 되면 그는 동요를 만들어 들려주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어려운 진리를 그대로 가르쳐서는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아중아 니 칼 내라 뱀 잡아 회 치고
개고리 잡아 탕 하고 찔레 꺾어 밥 먹고
니 한 그릇 내 한 그릇 평등하게 나눠 먹고
알랑달랑 놀아보세 알랑달랑 놀아보세."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도 기뻐하며 웃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 동요 자체가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중아 니 칼 내라"라는 것은 모든 사람마다 지혜의 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수도하는 이들에게 이 지혜의 칼은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는 최상의 보검과 같다. "찔레 꺾어 밥 한다"라는 표현은 진리를 밥으로 삼아 삶을 이어간다는 의미다.
"개고리 잡아 탕 한다"의 의미는 깨달음의 이치를 끓여내는 것을 말한다. "뱀을 잡아 회친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뱀이란 '사사(四蛇)'를 뜻한다. 우리의 몸은 흙, 물, 불, 바람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강렬하고 위험한 뱀과 같은 성질을 가진다. 이 네 가지 요소가 균형을 잃으면 병과 고통을 초래하므로 이를 길들이고 다스려 조화로운 상태로 만든다는 의미가 "회를 친다"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다. 결과적으로 아이나 어른이나 "니 한 그릇 내 한 그릇" 모두 평등하게 진리를 나누고, "알랑달랑 놀아보세"라며 천진난만하고 무구한 상태로 삶을 즐기자는 가르침이다.
아이들은 그 동요의 깊이를 알 리 없지만, 단지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원효 스님은 이렇게 소박하고 쉽게 접근 가능한 종교적 교육법으로 널리 깨우침을 전했다
원효 스님의 방대한 저술과 심오한 도덕적, 학문적 깊이는 이미 당시 동아시아 삼국에서 큰 명성을 떨쳤으며, 멀리 인도의 용수와 마명보살에 비견될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초기 신라의 불교를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전파한 인물이다.
울창한 푸른 숲 속 붉은 꽃 한 송이
봄빛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많지 않아도 충분하다
靑綠萬枝紅一點
動人春色不須多
할 한 번 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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