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①

 

김 화백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경봉스님을 다시 떠올린 것은 지금도 통도사 극락암에 머물고 있는 명담스님의 상좌 상원의 방문을 받고 난 후였다. 김 화백은 3년 전 대학에 사표를 던진 뒤 지리산 산자락에 화실을 짓고 은거 중이었는데, 갓 비구승이 된 상원이 명담스님의 지시를 받아 물어물어 거기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상원의 용건은 경봉스님의 진영(眞影)을 그려달라는 명담스님의 부탁을 전하는 것이었다.

“은사이신 명담스님의 부탁입니다. 경봉 큰스님께서 돌아가신 지 올해로 22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삼소굴에는 아직도 큰스님의 진영을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흔적에 연연하지 않는 극락암 선원의 선풍 탓도 있고, 그동안 자금 사정도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인연이 도래한 것 같다고 명담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인연이 도래했다는 말씀입니까?” 
“명담스님께서 큰스님의 유물전시관을 준비중인데 우연히 큰스님의 유물을 정리하시다가 일기장에 낀 메모를 하나 발견하신 겁니다. 거기에 당신의 진영을 김 화백님께 부탁하라는 글씨가 써 있었다고 합니다.”

진영(眞影). 
고승의 초상화를 진영이라 하는데, 그 뜻은 ‘참된 것의 그림자’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고승의 자취나 그림자가 진영이라는 말이었다. 대체적으로 화가들이 초상화 그리기를 꺼려하는 심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점이었다. 작가가 의도하는 창작성보다는 원하는 사람의 주문대로 그리게 마련인 초상화는 아무래도 밥벌이 차원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 화백은 상원스님에게 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경봉스님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봉스님은 김 화백에게 화가로서 눈을 뜨게 한 단 사람의 스승인 것이었다. 김 화백은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사람들은 제가 그림에 몰두하기 위해 지리산에 들어온 줄 알지 알지만 사실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복잡한 서울을 떠난 겁니다. 채식에다 공기 좋고 물이 좋아 그런지 이제는 건강이 조금 회복된 것 같아 소품 중심으로 작업을 겨우 하고 있습니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상원은 주춤거리며 말했다. 

“은사 스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상원은 몇 걸음 가다가 걸망에서 다급하게 검정 비닐로 싼 무엇을 꺼냈다. 그러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것 삼소굴 화단에 자란 옥잠화입니다. 보살들이 잡초를 호미질하다 옥잠화 한 뿌리를 캐 화단 밖으로 버린 것을 들고 왔습니다. 경봉 큰스님께서 생전에 키우시던 옥잠화라 생각하시고 받으십시오.” 

걸망에서 나온 옥잠화의 잎은 시들하고 뿌리는 말라 있었으나 계절이 화초를 심기에 좋은 봄이므로 잘 살 것 같았다. 김 화백은 상원이 간 뒤 즉시 처소 마당가에 옥잠화를 심고 물을 듬뿍 주었다.

생기를 잃은 옥잠화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건강에만 신경 쓰느라고 작업실 둘레에 단 포기의 화초도 심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김 화백은 산기슭에서 낙엽이 썩은 부엽토를 긁어와 옥잠화 둘레에 묻어주고 아침마다 물을 주었다. 물은 옥잠화만 먹는 것이 아니라 봄가뭄이 들어 단단해진 흙덩이나 김 화백의 가슴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아파트 단지를 찾는 꽃장사에게 화분에 든 꽃을 사 베란다에서 키워본 적은 있지만 화초를 직접 땅에 심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베란다의 꽃들은 대부분 일이 년을 넘기지 못하고 고사해 죽지만 산중의 옥잠화는 기대 이상으로 웃자라며 건강미가 흘러 넘쳤다. 잎들은 금세 무성해졌고, 한 뿌리였던 것이 여러 포기로 번졌다. 김 화백은 자신의 건강도 옥잠화처럼 회복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했다. 작업을 하다가도 쉬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마당가로 나와 옥잠화를 보살폈다. 

햇살이 덜 따가운 석양 무렵에는 쪼그리고 앉아서 옥잠화에게 중얼거리며 말을 걸기도 했다. 옥잠화 잎에 진딧물이 생겼지만 곧 사라졌다. 살충제를 뿌리지 않고 끝이 뾰쪽한 집게를 구해와 확대경을 비춰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떼어냈던 것이다. 진딧물을 잡아먹는 무당벌레를 방안 창틀에서 잡아다가 옥잠화 잎에 놓아주기도 했다.

한여름에는 옥잠화 포기 가운데서 꽃대 끝에 옥비녀처럼 생긴 꽃이 피어 나와 향기를 진하게 풍겼다. 하얀 옥잠화 꽃을 보면서 김 화백은 경봉스님을 문득 문득 떠올렸다. 스님은 법문하기 전에 게송을 읊조리곤 했는데, 곧잘 향기가 소리로 들리는지 영축산의 봄 향성(香聲)이여! 하고 노래하셨고, 제자들이 글씨를 원할 때도 먹을 듬뿍 찍어 향성이란 두 글자를 노잣돈 주듯 써 주곤 했던 것이다.

아무튼 옥잠화는 상원의 소망대로 김 화백이 봄부터 내내 경봉스님을 화두처럼 놓지 않게 한 견고한 연결고리가 된 셈이었다. 상원이 삼소굴에서 주워온 옥잠화를 놓고 가지 않았더라면 김 화백은 벌써 경봉스님을 잊어먹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 해 가을. 
김 화백은 손바닥만한 옥잠화 이파리를 만지면서 경봉스님의 진영을 그려야겠다는 마음이 용솟음쳤다. 어느 순간 진영이란 참뜻이 화두가 타파되듯 한순간에 풀어진 것이었다. 김 화백은 진영이란 참된 것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로서 참됨에 이르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처럼 현상을 징검다리 삼아 본질에 들어가는 작업이 진영의 원래 뜻이라고 믿어졌다. 그렇다면 고승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밥벌이를 위해 자신의 재주를 파는 천박한 일이 아니라 그것 또한 참됨에 이르려는 구도의 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래. 통도사로 가자. 경봉스님이 살아생전에 계셨던 극락암으로 가자. 경봉스님의 유물전시관을 준비하고 있는 명담스님을 만나 경봉스님의 진영을 그리겠다고 말씀드리자. 김 화백은 부랴부랴 서울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해 대학시절 경봉스님에게 받았던 합죽선을 보내오게 했다. 

스님의 유물전시관을 만든다면 별 쓸모없이 서재에 방치해 놓아두었던 합죽선을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보급된 이후부터는 눈요기 거리로 전락한 합죽선이야말로 유물전시관에 전시해 둘 만한 물건이었다. 더욱이 합죽선 종이에는 묵향이 곧 번져 나올 것처럼 먹이 거침없이 묻은 다음과 같은 선필(禪筆)이 적혀 있었다.

寒梅吐紅古佛心 ㅇ光

김 화백은 경봉스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준 정표로서 간직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그 깊은 뜻은 지금도 잘 알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 대학생이던 그때는 고승의 선묵(禪墨)이니 훗날 찾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원광(ㅇ光)이란 스님께서 환갑이 넘은 이후에 쓰기 시작한 시호(詩號)이고, 시문을 굳이 해석하자면 ‘찬 매화가 옛 부처의 마음을 붉게 토하네’ 정도였다.

김재인이 처음으로 극락암을 찾은 것은 대학 4학년 2학기도 끝나갈 무렵이었다. 반민주 반독재 타도를 외치는 데모가 대학시절 내내 끊이질 않았지만 그에게는 큰 상처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어렵사리 학비를 보내는 고향 부모를 생각해서 선두에 나서 데모할 용기도 없었고, 통기타를 들고 남녀 친구들이 하하 호호 어울리는 야유회에도 암울한 시대 탓에 즐겁게 끼어들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런 어정쩡한 시간들이 그에게는 이것도 저것도 못할 때 제 3의 선택을 하는 심리처럼 그림에만 더욱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졸업이 눈앞에 와 있다고 생각하니 장래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명 화가의 그림이 팔리지 않을 것은 너무 뻔한 일이고, 그렇다고 취업을 할 것인지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 것이었다. 미대 출신이 입사할 수 있는 직장이란 너무 한정돼 있어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이고,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대학에 남아 계속 공부하겠다는 선택도 몹시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화구를 간단히 챙겨들고 떠난 곳이 영남 지방이었고, 우연히 극락암을 들리게 된 것이었다.

통도사 일주문 근처의 한 국밥 식당에서였다. 식당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김재인은 통도사는 알고 있었지만 극락암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줌마들이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경봉스님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도인 시님 안 있노? 통도사 끄트머리에 있는 극락암의 경봉시님 말이다. 우리 둘째를 시님 맹글자꼬 하데. 집안에 존 일 있을끼라꼬. 그때 김재인은 극락암에 도인이라는 경봉스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도인이라면 자신의 인생길을 알 수 있는 분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기 때문이었다. 화구를 들쳐 맨 그는 당장 밥집 주인에게 극락암 가는 길을 물어 통도사 경내를 거쳐 산길 끝에 있는 극락암까지 올라갔었다.

그러나 극락암에 당도한 그는 막상 경봉스님이 어디 있는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암자가 너무 적막하여 침이 마르고 위아래 입술이 붙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선원 쪽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고, 이따금 요사채에서 마당을 가로지르곤 하는 스님은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뒤쫓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암자의 가람들 중에서 맨 오른편에 자리한 대숲 아래의 아주 작은 요사에서는 가끔 노인의 천식 같은 잔기침소리가 나긴 했지만 무턱대고 주인을 불러내기도 뭐했다. 요사의 편액에는 삼소굴(三笑窟)이라고 쓰여 있어서 미소 지을 소(笑) 자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는 실제로 경봉스님이 만나준다고 해도 도인의 눈에 자신의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어 두려움이 일었다. 그런가 하면 처음 뵙는 분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미래를 묻는다는 것이 결례가 아닌가도 싶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내보였다는 사실 때문에 뒷맛이 씁쓸하리란 예감도 들었다. 

그래서 김재인은 경봉스님을 만나 자신의 장래를 묻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화구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그림은 마약과 같았다. 일단 그림에 빠져들면 거기서부터는 현실의 자잘한 고민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수련의 잎들이 누렇게 시든 극락영지(極樂影池)를 배경으로 삼소굴을 경쾌한 붓놀림의 수채화로 그렸다. 일단 스케치를 하듯 수채화로 그린 다음 서울에 올라가서 유화로 다시 그리자는 심사로 팔레트와 붓을 꺼냈던 것이다. 극락영지 못물은 너무 맑아서 몽당연필 같은 송사리 떼가 몰려다니는 것이 투명하게 보였고, 하늘이 내려앉은 연못은 에메랄드 빛깔로 반짝거렸다.

김재인은 자신이 지금 극락암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그림에 몰두했다. 누군가가 조금 전부터 캔버스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신의 그림을 엿보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그림을 유심히 감상하고 있는 사람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키가 훤칠한 노승이었다. 노승의 키가 크기 때문에 마치 삼층석탑처럼 승복 저고리와 바지가 허리께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노승은 화가 난 듯도 하고 미소를 짓고 있는 듯도 하였다. 김재인이 여백을 마무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노승이 성큼 다가서더니 그림을 낚아채기라도 할 듯 긴 팔을 뻗어 갑자기 그의 뺨을 후려쳤다. 가격을 당한 김재인은 피할 새도 없이 순간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에야 어둔 곳에 불이 켜진 듯 눈앞이 밝아졌다. 노승에게 항의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눈앞에 펼쳐진 극락암의 전경이 좀 전과 달라져 있었다. 극락암의 전경이 세탁기에 들어갔다가 나온 빨래처럼 산뜻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의 눈에 낀 비늘과 헛것들이 떨어져나간 느낌이었다. 그제야 노승이 한 마디를 했다.

“색(色)을 보지 말고 공(空)을 보거라.”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설명해 줄 수 있나? 콜록콜록... 설명한다면 벌써 천만리나 어긋나는 벱(법)이지." 
노승은 알 듯 모를 듯한 한 마디를 더 던지고는 잔기침을 하며 삼소굴로 사라져버렸다. 김 재인은 때마침 지나가는 젊은 스님을 붙잡고 물었다.

“스님, 삼소굴에 계신 스님이 누구십니까?” 
“경봉 큰시님입니더.” 
“저, 저분이 도인이라는 말입니까?”

김재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황당해 했다.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 들었다. 분명한 것은 이제 경봉스님과 초면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비록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뺨을 얻어맞았지만 구면이 되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자신의 뺨을 후려친 것은 관심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삼소굴로 들어갔다. 

삼소굴 방 벽의 누런 종이에는 빈대 똥이 드문드문 묻어 있고, 그 종이에는 경봉스님의 좌우명이 분명해 보이는 몇 구절의 글씨가 모두 한자로 쓰여 있었다. 그가 나중에 대학원 시절에야 정확하게 해독한 내용인데, 그 구절들 중에서 특히 마지막 괄호 안의 문장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5,6,4,3 등의 산만한 숫자가 
어찌 1,2의 실로 다하기 어려움과 같겠는가 
몇 줄기 구름빛은 산봉우리로 피어오르고 
시냇물 소리는 난간에서 들린다 
고운 것은 미워하고 싫은 것은 즐거워하도록 노력하련다 
큰 활용은 미간조차 꿈쩍 않는 것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할 말이 있는 이는 10분 이내로 하고 나가도록) 
 

그러나 대학 4학년이던 김재인은 한문을 잘 해석할 몰랐으므로 스님의 좌우명을 무시하고 스님과 오랫동안 마주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좌우명 끝의 괄호 속의 문장대로 10분이 넘어가자 스님을 시봉하는 사미승이 눈총을 주었지만 김재인은 뺨을 맞은 것이 억울하여 그대로 눌러 있었다. 경봉스님 또한 사미승이 미간을 찌푸리건 말건 두 번씩이나 ‘시자야, 염다래(捻茶來)하거라’ 하고 차를 다려 오도록 지시했다. 

그 사이에 김재인 또래의 대학생이 또 찾아와 스님의 좁은 방이 꽉 찼다. 그 대학생은 불교 예절에 익숙한 듯 김재인과 달리 경봉스님께 정식으로 삼배를 넙죽넙죽 올렸다. 학생은 스님께 오체투지로 절을 올린 뒤 자기소개를 길게 했다. 수도암에서 책을 싸들고 와 공부중인 졸업반 대학생인데, 암자 공양주보살이 극락암에 도인스님이 계시니 만나보라고 해서 왔다는 둥 쭈뼛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경봉스님이 버럭 고함을 쳤다.

“나가거라!” 그도 놀라고 있었지만 김재인도 또 한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인이란 뺨을 후려갈기거나 고함을 치는 것이 취미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학생은 씩씩거리며 방을 나가버렸다. 아마도 몹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군화 끈을 질끈 매고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쿵쿵 났다. 일부러 발길질하며 삼소굴 마당을 나서고 있었다. 찬바람이 쌩하고 부는데도 방문을 닫지 않고 지그시 바라보던 스님이 그제야 사미승에게 말했다. 

“저 학생 데리고 오니라.” 그러자 사미승이 학생을 큰 소리로 부르며 달려 나갔다. 
“큰시님께서 오라 하십니더.” 학생도 그냥 도망치듯 가기가 아쉬웠던지 사미승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다시 오라고요예?” 
“그렇십니더.” 
방 안으로 다시 들어온 학생에게 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나가라고 한 줄 아나?” 학생이 대답을 못하자 스님이 말했다.
“니 걸음걸이로 성품을 볼라꼬 그런기라.” 스님은 큰 손으로 성냥통을 짚고 있었다. 낙타가 그려진 카멜표 성냥 통이었다. 

“이게 뭔 줄 아노?” 
“낙타입니다.” 
“맞다. 니 걸음걸이를 보니 저돌적이고 진취성도 있다. 허나 항상 낙타를 생각하그래이. 낙타란 뜨거운 사막에서도 묵묵히 사람들의 짐과 물을 지고 가는 짐승 아닌가. 한 마디 불평 불만 없이 지 자신보담도 주위를 위해서 희생하는 짐승이다 이 말이야.” 

스님의 훈계는 ‘낙타처럼 살라’는 것이었는데, 정작 불벼락을 맞은 김재인에게는 이렇다 할 법문 하나 해주지 않았다. 그저 사미승이 끓여온 차만 마시게 했다. 그 학생이 나가고 난 뒤에야 스님이 히히히 장난스럽게 소리를 내어 웃으며 말했다.

“히히히. 니 뺨값 기다리고 있제. 오늘은 회계가 끝났으니 돌아가거라.” 
차를 많이 마셔 오줌이 마려운 김재인은 경봉스님에게 기묘한 매력을 느꼈다. 뺨을 맞은 게 섭섭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또 극락암에 오고 싶게 만드는 노승 특유의 흡입력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김재인은 삼소굴 방문을 나서며 언젠가 또 오리라고 마음속으로 작심하며 극락암 계단을 내려섰던 것이다. 그후 김재인이 극락암에 들러 경봉스님을 다시 뵌 것은 불과 1년 2개월만이었다. 경봉스님 말대로 회계가 아직 끝나지 않은 뺨값을 계산하고자 그는 ‘반야구도회’라는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된 단체에 가입하여 또 극락암을 찾아갔던 것이다.

경봉스님이 김재인에게 합죽선을 선물한 것은 두 번째로 만났을 때였다. 반야구도회 대학원생들이 열 한 명이나 극락암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사미승을 통해 은밀히 삼소굴로 올라오라 하더니 합죽선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스승과 제자 간에 무슨 전법(傳法)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신성하여 등골이 잠시 오싹했었다. 촛대에 꽂힌 촛불이 춤을 추는 동안, 소소령령(昭昭靈靈)한 맑은 차 한 잔을 음미한 후 합죽선 하나가 경봉스님의 손에서 김재인에게 아주 천천히 전해졌던 것이다. 

스님의 다탁 위에 놓인 합죽선을 보는 순간 김재인은 ‘저 합죽선은 이제 내 것이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었다. 이심전심이 틀림없었다. 일렁이는 촛불에 눈이 더 퀭해진 경봉스님이 곧바로 합죽선을 들더니 김재인에게 건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재인은 합죽선이 뺨값의 대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경봉스님도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어쩌면 경봉스님은 뺨값 같은 것은 이미 잊어버렸는데, 김재인 혼자서 심중에 두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김 화백은 아직도 경봉스님에게 뺨을 얻어맞고 있는 셈이었다. (계속)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