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⑤
명담스님은 은사 경봉에 대한 한없는 경외심을 가지고 말했다. 22년 전에 입적한 경봉스님이 지금 환생하여 옆방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제자의 예를 갖추어 공손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얘기를 이어갔다.
“김 화백님도 아시겠지만 불교의식을 치를 때 맨 먼저 발원하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아실 겁니다.
가없는 중생을 건지오리다
다함없는 번뇌를 끊으오리다
무량한 법문을 배우오리다
위없는 도를 이루오리다.
우리 중생들의 네 가지 큰 서원을 말하지요. 그런데 경봉 노장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만 선방 때가 묻은, 머리카락이 밤송이 가시처럼 쭈뼛거리는 쭈그렁밤송이 선객들의 사홍서원은 이렇습니다.
배고프면 요긴히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더 입고
몸이 고단하면 발을 죽 펴고 누워 자고
더우면 시원한 바람을 사랑한다.
여기에 대해서 노장님께서는 <금강경>의 첫 구절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김 화백은 차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명담스님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경봉스님에게 들었던 법문을 성능 좋은 녹음기가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듯 막힘없이 술술 외우고 있었다. ‘
우리 일상생활을 제쳐 놓고 무엇을 하겠는가. 일상생활이 그대로 불법이고 도(道)다. 눈만 끔적하고 소리 한번 지르는 여기에 도가 있고, 밥하고 옷 만들고 농사짓고 장사하는 데 도가 있고, 밥 먹고 대소변 보는 데 도가 있다. 도를 모르니까 도를 찾지 극소에 다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 첫머리에, 부처님이 밥 먹을 때를 당하여 가사를 수하시고 발우를 가지고 사위대성(舍衛大城)에 들어가서 차례로 걸식해서 본처(本處; 기원정사)에 돌아와 밥 잡수시기를 마치고 옷과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라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그 소중한 경전에 밥 얻어먹고 밥을 다 먹고 발 씻고 자리를 펴고 앉은 것을 경초(經初)에다 넣었겠느냐 말이다. 진리가 다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대목을 경(經) 읽는 수행자도 예사로 넘기고 처음 배우는 학인(學人)도 예사로 넘긴다.’
명담스님은 책상 위에 있는 <금강경>과 목탁을 가져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실제로 경초 부분을 독송했다. 경봉스님의 한 점 맑은 영가를 부르는 것처럼 단조롭고 간절한 리듬에 따라 읊조리는 염불은 차실로 쓰이는 방을 그대로 법당이 되게 했다. 명담스님은 짧은 염불을 마치고는 다시 경봉스님의 법문으로 돌아갔다.
‘수행자가 도를 깨달은 일화를 하나 소개하려 한다. 예전에 도겸(道謙)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이십 년 간이나 참선을 했어도 공부가 시원치 않았다. 어느 절에 머리를 들일 곳도 없고 깜깜하기만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십 년 동안이나 선지식을 친견하며 수행했어도 아무 얻은 것도 없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고 작년에도 그렇고 금년에도 그러니 먼 길을 떠나 선지식을 찾아가봐야 또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또 가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서 따분하고 서럽고 서글픈 생각이 나서 울었다. 종원(宗元)이라는 도반이 옆에 있다가 물었다.
-너 왜 우노?
-난 안 가련다. 여지껏 내가 공부하며 이십 년 동안이나 이산 저 산 돌아다니며 선지식을 많이 친견했어도 아무 소득이 없었고 깨닫지도 못했다. 이번에 또 가봐야 또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니 난 가지 않으련다.
-아니, 떠나겠다고 해놓고 이제와 가지 않겠다는 말은 무어냐. 그렇다면 내 말을 들어봐라. 지금 선지식 만나려 간다는 생각 말고, 네가 알고 있는 것들도 텅 비우고, 너에게 있는 다섯 가지만 알면 된다. 그것을 알아봐라.
-다섯 가지란 무언가?
-옷 입고 밥 먹는 것, 대변 보고, 소변보는 것, 그리고 산송장을 끌고 길 위에 다니는 것이다. 이것만 알면 된다. 무엇이 옷을 입고 무엇이 밥을 먹고 무엇이 대소변을 보고 무엇이 산송장을 끌고 길 위로 다니는지 이것만 알면 된다.
너의 주인공(참나)을 찾으라는 말에 도겸은 활연히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주인공을 찾으려는 생각 없이 헛눈을 팔며 살아왔던 것이다. 종원의 충고 한 마디에 세상이 달라 보이자 도겸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하늘에는 별도 많다 쾌지나 칭칭나네
땅에는 흙도 많다 쾌지나 칭칭나네
바다에는 물도 많다 쾌지나 칭칭나네
산에는 나무도 많다 쾌지나 칭칭나네
도겸이 춤만 추었다고 전해오지 이런 노래를 했는지는 모른다. 춤을 추었다면 그냥 춤만 추지 않았을 것이고 손바닥으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했을 것이 아닌가. 이 노래는 깨달은 이후에 무엇을 할지 말해주고 있다.
밤하늘에 별이 없으면 참으로 깜깜하다. 그 많은 별 가운데 이십팔수(二十八宿)가 있어서 인간 세상의 선과 악을 조사한다. 또 정반성(定盤星)이란 별이 있는데 다른 별들은 다 움직이는데 이 별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도 정반성 같이 심주(心柱; 마음의 기둥)가 은산철벽처럼 동하지 말아야 한다.
곡식을 심는 땅은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 나락 한 낱을 심으면 거기서 벼가 자라서 한 이삭에 이백오십 낱 이상이나 붙는다. 그러니까 남을 이롭게 하기를 땅과 같이 해야 한다. 바다에는 물이 많다. 푸른 바닷물에는 수없이 많은 어족들이 살고 있다. 바다는 온갖 강과 하천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받아들인다. 그래도 늘거나 줄지 않는다. 이 바다에서 남을 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산에는 초목이 있어 잎도 피고 꽃도 피고 한다. 나무가 없으면 불도 피우지 못하고 집도 짓지 못한다. 초목이 사람을 이롭게 하듯 이것을 닮아 남을 이롭게 하라는 말이다.
“잘 아시다시피 노장님의 이 말씀은 깨달음을 이룬 도겸이 이제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경상도의 신나는 민요 가락을 예로 든 것인데, 말하자면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말씀하셨던 겁니다.”
김 화백은 명담스님이 은사인 경봉이 입적한 이후에도 거의 20여 년 동안이나 극락암을 지키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직도 명담스님은 경봉스님이 남기고 간 유물을 끌어안고 시자의 역할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은혜가 그리 깊어 그러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스님께서는 극락암을 왜 떠나지 않는 것입니까?”
“노장님의 삶이 저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붙들고 있어도 저로서는 도 닦는 일입니다.”
“올해로 극락암에 주석하신 지 몇 해째입니까?”
“산술적으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노장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저도 운수납자로 떠돌아다녔으니까요. 70년대 초에는 오대산으로 자주 갔습니다. 상원사 선방에서 선객 틈에 끼어 중물을 들였습니다. 선객들이라고 해서 참선만 한 게 아닙니다. 씨름도 하고 축구도 하고 장기도 두고 그랬습니다. 저도 힘 좀 쓰는 축에 들어 씨름 상대가 있곤 했는데 여름에 상원사 마당에서 30대의 덩치 큰 스님과 씨름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해 겨울이었습니다. 상원사에서 오리쯤 떨어진 깊은 산속에 너와집으로 된 염불암이라는 암자가 있지요. 감옥으로 치자면 독방 같은 1인 선방이지요. 그 덩치 큰 스님의 안부가 궁금해서 염불암으로 눈을 헤치고 갔었는데, 암자의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스님이 자살해 있었던 것입니다. 목을 맨 지 오래되어 몸과 목이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 장작을 모아 불을 붙여 다비를 해주고 상원사로 내려와 극락왕생하라고 염불해 주었지요. 구참 스님들께 말했더니 죽음을 초탈한 것처럼 범룡스님과 또 한 스님이 히죽이며 장기만 두더군요. 그때는 몹시 허허로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스님이 죽음을 쉽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혹시 겉멋이 들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화두 들고 잘 사는 것이 더 멋들어진 일 아니겠습니까.”
김 화백은 명담스님이 투박한 겉모습과는 달리 인정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후배의 죽음 앞에서 아무 일도 아닌 듯 히히히 웃으며 장기를 두는 것이 생사를 초탈하려는 선객다운 일인지는 모르나 고혼이 된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위해 염불해 주는 명담스님에게 더 정이 갔다. 명담스님은 70년대 초에 겪었던 또 하나의 아픈 기억을 스스럼없이 김 화백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수행자들이 말하기를 꺼려하는 속가의 일이었다.
“비도 오고 진달래꽃이 필 때입니다. 산사에서 머물고 있는데 문득 속가에서 요절한 동생과 늙으신 할머니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 일기장을 빌어 할머니에게 하소연을 했지요. 잘 하지도 않은 떡을 큰댁에서 한다고 할머니가 가지고 오기를 한 나절이나 기다리던 동생 생각이 난다고 말입니다. 그날 할머니와 혼잣말로 얘기를 나누다가 일기장 끝에 할머님, 인간의 가슴은 크나큰 별것이 그득한 창고와도 같은 건가 봅니다. 눈물이 있어도 기쁨이 있어도 그저 간직해 두었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어야 하는 저는 회색, 진회색의 옷을 두른 승려이옵니다, 하고 끌쩍거렸던 일이 기억납니다.”
김 화백은 찻잔을 보고 있는 명담스님을 유심히 보았다. 어찌 들으면 감상에 젖어 말하는 것 같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너무나 인간적인 고백이었다. 자신의 슬픔과 기쁨조차도 술을 빚듯 간직해 두었다가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는 심성이 말 그대로 성직자의 품성을 타고났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김 화백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미라며 내심 부끄러워했다. 지금도 그때의 여운이 짜릿하게 전해오는지 명담스님이 고개를 흔들며 자리를 수습했다.
“눈 내리는 날 탓인가 봅니다. 미처 사랑을 주지 못한 속가의 동생과 그리운 할머님이 생각나 쓸데없는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눈은 소나무 한 가지를 부러뜨릴 것처럼 내리퍼붓고 있었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여니 눈발이 방 안으로 날려들어 왔다. 김 화백은 명담스님의 얘기에 빠져 합죽선을 다시 돌려받은 사실도 잊고 방을 나섰다. 경봉스님을 6.25전쟁 이후 20여 년 동안 시봉했다는 노승을 만나 보기 위해서였다. 노승이 주석하고 있는 곳은 극락암에서 가장 가까운 비로암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삼소굴 뒷길로 천천히 걸어서 10분 거리라고 하므로 눈길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방을 막 나서려는데 상원이 다가왔다. 상원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스님, 피곤해 보입니다. 비로암을 저 혼자 가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낮에는 대중스님들 외호(外護)하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나야지요. 요즘은 잠을 더 줄이고 그 시간에 참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피곤하게 보일 것이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좋아서 하니까 피곤한 줄 모르겠습니다.”
가지들이 장막처럼 드리운 숲 속에 쌓인 눈인데도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상원이 눈에 덮인 산길을 찾아 앞장서 걸었다.
경봉의 상좌는 많았지만 그중에서 효(孝)가 지극했던 세 수행자를 꼽자면 6.25전에 시봉했던 벽안(碧眼), 전쟁 후의 원명(圓明), 그리고 70년대부터 지금까지 극락암에 주석하고 있는 명담 정도였다. 벽안이 극락암에 들어오기 전에 출가한 상좌들은 대부분 환속했거나 다른 문중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벽안에 대한 경봉스님의 신뢰는 대단했다. 경봉스님과 9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벽안은 통도사 부근의 면사무소 직원 출신으로 6.25 전쟁 전에 극락암으로 들어와 출가했는데 말 그대로 다방면으로 재주가 출중한 팔방미인이었다. 면에서 닦은 깔끔한 행정 능력에다 농사일까지 능수능란했다. 심지어 바느질까지 잘하여 상좌가 들어오면 솜씨 좋은 아낙네처럼 손수 건사한 장삼을 만들어 입힐 정도였다. 그래서 경봉스님은 벽안을 대중들 앞에서 ‘감자중’이라고 불렀다. 감자는 체한 기가 있을 때 생즙으로 먹으면 소화제가 되고, 익히면 음식과 반찬이 되고, 썩어도 물에 담가두었다가 풀로 쓸 수 있는, 말하자면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먹을거리이기 때문이었다. 결혼하여 늦게 출가했지만 벽안은 타고난 성실성과 다재다능한 재주로 한 소식만 못했을 뿐 통도사 안팎으로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던 것이다.
게다가 스승을 흠모하는 벽안의 효성스런 태도는 지금까지도 통도사에서는 전설이 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경봉스님이 팔십이 넘어 기력이 쇠해지자, 벽안 자신도 칠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날은 물론이고 자신의 몸이 편치 않은 날에도 매일 오조장삼을 걸치고 통도사의 적묵당에서 10여리 길을 걸어 올라와서 극락암의 경봉스님에게 문안인사를 올렸던 것이다. ‘벽안 수좌, 나이도 있고 하니 그만 다니시게’ 하고 여러 차례나 만류했지만 경봉스님이 입적하기 얼마 전까지 소용없는 일이었다. 벽안 역시 거동이 불편한 노승으로서 극락암의 산비탈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오르내렸던 것이다.
한편, 원명이 경봉스님을 만난 것은 6.25 전쟁이 인연이 됐다. 원명은 15살에 밀양 무봉사에 출가하여 중물을 들이고 있었는데, 서울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전쟁을 만난 경봉스님이 오도 가도 못할 때 밀양 손씨들의 편의로 함께 밀양까지 내려와 무봉사에서 거처하게 됐던 것이다.
비로암에 다다라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있는데 허리가 꼿꼿한 노승이 나와 맞아주었다.
“상원이 아니냐.”
“네, 스님. 이 분은 경봉 큰스님의 진영을 그리실 분입니다.”
“들었다. 어서 들어오너라.”
노승은 짙은 눈썹 때문에 강직한 인상을 풍겼다. 목소리도 카랑카랑하여 매사를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처리할 것 같았다. 선승인 명담스님과는 달리 계율을 중시하는 율사 같은 차가운 인상이지만 언뜻 흘리는 미소 뒤에는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구석도 비쳤다.
김 화백은 상원이 삼배를 올린 뒤 일배로 예를 갖추었다. 노승은 절을 받는 동안 차를 준비했다. 일반인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리 말수가 적은 수행자라도 무언가를 자극해 주면 말문이 쉽게 열리는 법이다. 잊혀지지 않는 지나간 날의 향수나 오랫동안의 관심 분야를 건드려주면 말문을 터트리게 마련인 것이다. 노승은 ‘무봉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김 화백으로서는 뜻밖의 소득이었다.
“아니, 내가 어떻게 무봉사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았소.”
“큰스님의 상좌 분에게 들었습니다.”
“맞아요. 무봉사는 내게 고향 같은 절이오. 1951년도 내 나이 15살 음력으로 4월에 무봉사로 갔지요. 그때 주지스님은 62세 진갑을 맞은 대월(大越)스님이었어요. 처음 가보니까 사명스님 동상 만들고 있었어요. 좌대 둘레는 어른 다섯 사람 정도가 팔을 벌린 크기였고, 높이는 30자 정도였어요. 3년 동안 진흙으로 다섯 토막으로 만든 후 석고를 부었어요. 그런데 석고는 완성됐지만 전쟁 후 비구 대처 싸움이 심해 중단되고 말았지요. 대월스님은 대처 편에서 싸우면서도 시골 돌아다니며 화주 모으고 징 깨진 것, 놋그릇 등을 몇 차 모았고 완성된 석고 다섯 토막을 서울로 보냈는데 그후 어찌 됐는지 몰라요.”
피난 왔던 경봉스님도 사명스님의 동상이 중단된 것에 대해 몹시 아쉬워했다. 스님 역시도 어린 시절에 사명스님처럼 고승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남루 앞에 사명스님의 동상이 서 있다면 부산 서울로 오가는 기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명스님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비구 대처 싸움 끝에 다된 사명스님의 동상만 사라져버린 셈이었다. 이후 경봉스님은 극락암으로 돌아와 사명스님 동상에 대한 얘기를 가끔 하다가 어느 날부터인가는 시절인연으로 돌리며 아예 침묵해 버렸다.
노승도 경봉스님과 같은 심정이었는지 사명스님의 동상 얘기만 차를 너댓 잔 마시는 동안 길게 하다가 상원이 약간 지루한 표정을 짓자 서둘러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밀양 출신이거나 밀양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은 사명스님에 흠모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상원은 자장암과 백련암까지 한 바퀴 돌 셈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다. 극락암 원주 소임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은 것이었다.
“노장님, 큰스님의 법문 중에 어떤 것이 기억납니까?”
“난 노장님 회상에서 특별히 법문을 들은 것은 없어. 극락암 선방 외호만 했으니까. 한 철에 오십 명에서 칠십 명씩 전국의 수좌들이 죽어도 노장님 회상에서 한 철 나야 된다고 몰려들던 시절에도 나는 살림살이만 맡았어. 전생에 노장님 빚이 많아 빚 갚고 산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물론 안거의 결제나 해제 때 대중을 상대로 법문할 때도 듣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경봉스님과 은밀하게 선문답을 나눈 사실이 없다는 것을 노승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암자 문을 막 열고 나서려는 순간 노승이 상원을 붙들어 세웠다.
“상원 수좌, 경봉 노장님으로부터 최고의 법문을 들은 게 하나가 생각나는구나. 그래, 그게 나에게는 최고의 법문이었지.”
순간 김 화백은 노승의 얼굴에 퍼지고 있는 선열(禪悅)의 표정의 읽었다. 노승은 좀 전에 ‘무봉사’라는 말을 듣고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던 것처럼 또 다시 그런 표정을 짓더니 얘기를 했다.
“절 살림 곤란하다고 밀려드는 수좌들을 안 받아들일 수는 없었어. 자연히 원주생활은 빛도 안 나고, 더구나 내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점점 힘들었지. 그래 경봉 노장님께 ‘스님, 제가 좀 쉬어야겠습니다.’ 하고 말했어. 그러니까 노장님께서 ‘선방 원주 하려면 팔지보살이 아니면 못 한다’고 그래. 그러시며 나를 인자하게 한 동안 쳐다보시더니 ‘너 알고 내 알고 삼세제불이 알면 됐지 딴 사람이 알아준다고 한들 뭐 할 것이냐. 그러니 알아주느니 못 알아주느니 하지 말고 더 참고 해라’ 하는 것이야. 중생이 알면 뭐하겠느냐는 말씀인데 이 보다 멋진 법문이 어디 있겠나. 노장님이 네게 해준 최고의 법문이었지. 하하하.”
노승은 큰소리로 소리 내어 웃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김 화백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던 여신도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김 화백과 상원은 마루에 앉은 채 내리는 눈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들의 귓가에는 노승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 한 마디가 맴돌고 있었다. 너 알고 내 알고 삼세제불이 알면 됐지 딴 사람이 알아준다고 한들 뭐 할 것이야. 김 화백은 문득 가슴이 뜨거워졌다. 진영은 혼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삼세제불이 함께 한다는 생각이 미치자 도화선에 불이 당겨진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상원스님, 오늘 자장암과 백련암까지 간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저는 눈길도 좋습니다만 김 화백님께서 그러하시다면 삼소굴로 돌아가 쉬시지요.”
“아닙니다. 오늘 돌아가겠습니다. 시간을 내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눈길이라 위험합니다. 눈이 멎거나 녹으면 가시지요.”
“화가로서 붓이 이처럼 그리운 적은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솔직히 처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돌아가려고 합니다.”
김 화백의 절박한 사정은 진심이었다. 지리산 작업실로 빨리 돌아가 텅 빈 캔버스에 자신의 구상을 거침없이 쏟아 붓고 싶다는 욕구가 활화산에서 붉은 용암이 분출하듯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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