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⑥
1915년 3월.
한 사람이 달빛이 무서리처럼 뿌려진 밤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에 드러난 그의 키는 조선 사람의 평균치를 훨씬 넘어 보였다. 얼굴의 이목구비도 서구에서 바다를 건너온 천주교 신부처럼 또렷했다. 사내는 주재소 순사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장터를 지날 때는 천천히 걷다가도 들판 가운데로 뻗은 신작로에서는 달리듯 움직였다.
사내는 등에 걸망을 하나 매고 있었다. 큰 키 때문에 걸망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걸망은 꼽추의 등처럼 허리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사내는 겅중거리는 그림자를 벗 삼아 바삐 밤길을 걸어 나갔다. 들판 허리쯤의 산모퉁이에서 불빛이 하나 반짝였다. 길가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 주막이었다. 잡곡밥을 한 그릇 먹고 저녁 예불이 끝난 뒤 나선 길이었기 때문에 배는 고프지 않았다. 술 생각이 날 리도 만무했다. 그런데도 사내는 국밥과 술을 파는 주막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이십여 호쯤 되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지만 초저녁인데도 불빛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작년의 곡식이 다 떨어진 보릿고개를 맞아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저녁 끼니를 멀건 시래기죽이나 옥수수죽으로 때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음이 분명했다. 마을 어귀에서 어슬렁거리던 개 한 마리가 사내를 발견하더니 어둠을 물어뜯듯 컹컹 짖는데도 사립문을 열어 밖의 동정을 살피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빛은 사내를 처량한 생각이 들게도 했다. 사내는 은사와 사형에게 편지 한 장씩을 써놓고 통도사를 아무도 몰래 뛰쳐나온 것이었다. 은사와 면담한 뒤 날이 밝으면 떠날 수도 있었지만 사내의 마음은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에 절에서 보던 사무도 인계하지 않고 도망치다시피 산문을 나서버렸던 것이다.
사내의 은사는 성해(聖海), 사형은 사내보다 20살 위인 구하(九河)-. 사내는 은사와 사형에게 일찍이 절의 대들보 감으로 인정을 받아 다른 비구승처럼 재나 탁발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오직 불경공부만 전념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그러한 행운과 특혜를 내팽개치고 운수행각을 나선 길이었다. 사내는 주막에 이르러 주인을 불렀다.
“거기, 아무도 없십니꺼?” 대답이 없자 사내는 주막 마당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주인을 불렀다.
“아무도 안 계십니꺼?” 그제야 늙은 주모가 나와 하품을 길게 하더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누구십니꺼? 술독이 동났십니더.”
“보살님, 술 마시러 온 게 아닙니다.”
“그라믄 잠자러 왔능교. 고구마 창고로 쓰는 쬐그만 골방이 있지만 못 잡니더. 불을 넌지 오래 되어 얼음장 냉골입니더.”
“보살님, 소승이 주막에 들른 것은 술을 마시고자 함도 아니고 잠자러 온 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인교.” “내원사로 갈라코 합니더. 지름길을 알려 주이소.”
그러자 이번에는 주모가 말렸다.
“내원사 말인교? 여기서 30리도 넘십니더. 달이 떴다캐도 산길을 어캐 넘으실라꼬 그랍니꺼. 냉골 방에 장작 넣을 테니 하룻밤만 묵고 가이소.”
사내는 늙은 주모의 호의를 뿌리치고 다시 밤길을 나섰다. 맹수가 출몰하여 사람을 헤치곤 한다는 깊은 산길을 거치더라도 지금 내원사로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사내는 불이 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곳은 내원사 선방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이었다.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마치 머리에 불벼락이 내리친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왔던 것이다. 경전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화엄경>을 습관처럼 펼쳐 들었던 것인데 그날따라 단 한 개의 구절이 경봉의 머리통에 불화살이 되어 내리꽂혔던 것이다.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
천 코 만 코나 되는 수많은 불경을 외는 삼매에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다가 참선 공부라는 한 코에 걸려든 것이었다. 불경이 비록 구절구절 진리의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부처의 보배이지 자신의 보배가 아니라는 촌철살인 같은 한 구절이었다.
그동안 경봉은 불경 한 구절을 배우면 반드시 장터나 마을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즐거움으로 중의 길을 걸어왔던 것인데, <화엄경>의 그 구절은 그것이 아니라고 불벼락을 내리쳤던 것이다.
저잣거리로 나가 보면 부처의 진리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경봉은 강원의 강백에게 배운 불경을 혼자만 알고 있기가 안타까워 장터나 동네로 나가 포교하곤 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산두 박첨지 허수아비놀이’라는 천막무대에서 펼치는 연극 줄거리는 불법과 맞아떨어졌다. 훗날 경봉은 법문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곤 했다.
‘극(劇)으로 멋있게 도를 편 일이 있다.
누가 창안했는지 몰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주 멋진 도인이 구상을 한 것이다. 극으로 불법을 편 셈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보았을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젊었을 때에 산두 박첨지 허수아비놀이가 있었다.
동네 한복판에 빈 터가 있으면 기둥을 네 개 세우고, 포장을 치고, 구경꾼들이 모이면 산두 박첨지 허수아비놀이가 시작되는데, 기둥 넷은 우리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박첨지 놀이가 시작될라치면 포장을 둘러친 위로 허수아비들이 탈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데, 그 허수아비들을 줄로 조정하는 것은 포장 밑의 사람들이다. 밑의 사람들이 줄을 당겨서 허수아비들이 말할 때는 입도 열고 춤도 추어서 정작 허수아비들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부채가 흔들흔들 나타났다가 지나간 뒤에 한 영감이 나오는데, 구레나룻 털보 영감이다. 탈바가지 털보 영감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오늘 사람이 참 많이 모였다’ 하는데 여기 모인 남녀들은 사실은 너희가 아니라 모두 나처럼 부모의 탈바가지를 쓴 것을 말한다. 그리고 털보 영감의 수염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이 붙어 있는 번뇌 망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털보 영감이 나타난 후에는 남녀 허수아비들의 한패가 나와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세상의 애정에 집착하는 인간상을 펼치며 입도 맞추고, 옆의 사람을 쥐어박기도 하면서 한참 재미있게 논다. 호랑이 등 뭇 짐승과도 신나게 논다. 마지막으로 스님들이 두어 명 나와 흥겹게 노래 장단에 맞추어 절을 짓는다.
에루 화산에 절을 지어 뚝딱
에루 화산에 절을 지어 뚝딱
노래 부르며 뚝딱뚝딱 하다가 절을 순식간에 하나 짓는다. 절을 다 지은 다음에는 법상(法床)을 차려놓고 법사가 나와 법문을 한다. 법사가 주장자로 법상을 탁 치며 게송을 읊조린다.
다만 범부의 생각만 모두 비우거라
별로 성현의 지해(知解)란 게 없느니라.
간단한 법문이지만 참으로 좋다. 범부의 생각만 비우면 되는데 그것이 붙어서 아무 것도 안 된다. 법사 허수아비는 법문을 간단히 끝내고 주장자를 또 한번 탁 친다. 누가 이런 법을 냈는지 법문하는 허수아비도 모를 테고, 듣는 구경꾼들도 모르겠지만 참 좋은 법문이다. 법사 허수아비는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는 소리를 한 마디 해놓고는 법문 다 했다고 법상을 치운다.
다음은 용이 나오고 사자도 나오고, 별별 구경꺼리를 다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홍동지라는 일고여덟 살 되는 어린 아이가 발가벗고 나오는데, 자지가 어찌나 크던지 제 키보다 더 큰 자지를 어깨에 울러 메고 나와서 이리 치고 저리 치고 하는데, 춤추고 노래하던 놈도 때리면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법사도 치면 없어지고, 용이고 사자고 모조리 자지로 때리면 다 없어지니 구경꾼들이 웃고 야단법석이 난다.
우습지만 홍동지의 자지에 인생의 군본 문제가 붙어 있고, 그것이 법의 방망이요, 지혜의 방망이인 것이다. 이 방망이로 사람도 치면 없어지고 짐승도 치면 없어지고 절도 치면 없어지고 무엇이든지 치기만 하면 없어지는, 부처도 치고 조사도 치는 법의 방망이인 것이다.
산두 틀에 허수아비 놀리는 것을 보아라
밀고 당기는 것이 전부 속사람의 짓이다.
속사람은 곧 사람들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허수아비 자기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고 가고 하는 것도 모두 속사람이 하는 것이고, 눈이 보고 귀가 듣고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부 속사람이 하는 것이다.
속사람을 모르고 그냥 물질에 집착되어서 날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니 세상에 나와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 바에야 무엇 하러 나왔느냐 말이다. 여러분들은 내가 세상에 살다가 죽어서 언제 땅 밑으로 들어가겠나, 그것을 알아야 한다. 설령 칠십 팔십을 산다 해도 인생의 일도(一度)는 육십이니, 사십을 산 사람은 이제 이십이 남았구나, 삼십을 산 사람은 이제 삼십이 남았구나, 이렇게 회계를 대야 한다. 이렇게 해야 도 닦을 발심이 솟고 용기가 난다.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도 계획은 그저 천 년 만 년 사는 것과 같이 생각하니 틀린 일이다.
그림자 없는 기러기는 일천 시내 달에 날고
돌사자 동으로 향해 울부짖는데 하늘에 두우별은 서쪽으로 옮기네.
경봉이 장터나 동네로 나선 것은 강원에서 배운 것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였는데, 이른바 젊은 경봉 식의 포교요 설법이었다. 경봉은 어린 시절부터 서화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출가한 후에도 방편 삼아 붓을 놀렸다. 울긋불긋한 그림을 그려 주장자에 달고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나갔다. 이무기와 뱀, 그리고 쥐와 코끼리, 칡덩굴을 그린 그림을 주장자에 매달고 요령을 멋들어지게 흔들면 무엇이 있나 싶어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이게 마련이었다.
가을걷이 때는 일꾼들이 논에서 몰려와 자리를 뜨지 않자 주인이 달려와 ‘일꾼들이 스님 얘기를 다 들었다가는 추수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통사정을 했다.
안수정등(岸樹井藤)-.
젊은 경봉은 안수정등이란 화두를 실감나게 그려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별난 재주가 있었다. 화두의 내용인즉 이랬다.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코끼리가 쫓아와 정신없이 달아나다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나무를 감은 칡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쫓기던 사람은 칡넝쿨을 잡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우물 밑바닥에는 세 마리의 이무기가 입을 벌리고 있고, 우물 중턱에는 네 마리의 뱀이 사방에서 혀를 날름거린다. 할 수 없이 칡넝쿨을 생명 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는데, 두 팔은 빠지려 하고 흰쥐와 감은 쥐가 나타나 칡넝쿨을 쏠고 있다. 그때 머리를 들어 위로 쳐다보니 나무에 붙은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입속으로 들어온다. 어리석은 중생은 꿀물에 애착하여 위태로운 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으나 실제의 상황은 오르거나 내려가거나 머무를 수가 없다. 이처럼 급박한 처지에서 생사해탈을 이루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안수정등이란 화두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젊은 경봉은 구경꾼들 앞에서 질문을 던지고 아무 대답이 없자 스스로 답을 내렸다. 훗날에도 경봉은 화두 안수정등의 예를 즐겨 들었다.
-자, 이 형국이 어떠한가 한번 상상해 보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걱정을 하는데, 자식 걱정 돈 걱정 따위는 이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무상(無常)이란 살귀(殺鬼)인 코끼리를 피해 올라간 나무는 사람의 육신이고, 우물은 황천이고, 칡넝쿨은 목숨이다. 언제나 황천을 향하고 있는 육신이 칡넝쿨에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지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은 세 마리의 이무기가 되어 입을 벌리고 있고, 육신의 요소인 지수화풍은 네 마리의 뱀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 더욱이 해와 달을 가리키는 흰쥐와 검은 쥐는 목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오욕락(五欲樂)의 꿀물은 달기만 하다. 무상이 눈앞에 가득하지만 달콤한 꿀 한 방울 받아먹는 재미로 생사를 뛰어넘는 참선공부를 팽개치고 죽어가는 것이다.
사내의 그림자도 다시 겅중겅중 사내를 뒤따랐다. 사내는 문득 8년 전에 집 떠나올 때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어머니 안동 권씨가 돌아가신지 1년 만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의 이름은 용국(鏞國)이었다. 4대 독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김영규(金榮奎)는 고심 끝에 아들의 이름을 어디선가 지어왔는데 무슨 까닭인지 매우 흐뭇해했다.
용국은 집을 나서면서 한문사숙 죽하재(竹下齋)에 들러 그동안 친자식처럼 자신에게 사서삼경을 가르쳐준 강달수(姜達壽) 선생을 찾아 하직인사를 올렸다. 5년 동안 용국에게 한문을 가르쳐준 강달수 선생은 매우 아쉬워했다. 그러나 몇 대째 벼슬을 못해 잔반(殘班)으로 밀려나 초야에 묻혀 서책이나 뒤적거리며 지내는 강달수 선생은 용국을 붙잡지 못했다. 앞날이 창창한 용국이 한낱 밀양군 부내면 서부리의 초라한 한문사숙에서 뒹굴기에는 그의 그릇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었다. 말이 한문사숙이지 기와집 강당이 아니라 편액도 내어걸지 않은 초라한 토담집이었다. 토담집 뒤로 대숲이 무성해 죽하재라고 불렸는데 모이는 학동은 겨우 서부리 부근의 아이들 대여섯 명 정도였다.
용국은 강달수 선생에게 큰절을 올린 뒤 누님이 다니던 통도사로 가 성해스님의 허락을 받고 머리를 깎았다. 머리만 깎았지 아직은 속가에서 온 바지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행자가 되어 6개월 동안 성해스님 시중을 들며 안양암에서 보냈다. 그런 뒤에야 통도사 청호(淸湖)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사미승 정석(靖錫)이 되었다. 훗날 삭발은사 성해스님의 묵인으로 법명이 경봉으로 바뀌게 되지만 그때 한동안은 정석으로 불렸다.
용국이 사미계를 받던 날, 사미승 경봉은 비로소 장삼을 입고는 통도사를 한바퀴 돌았다. 삭발은사 성해스님도 기뻐하면서도 준엄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출가인(出家人)이 성취대도(成就大道)는 못하더라도 물질로 인한 죄과(罪過)는 범하지 말라. 공부하는 수좌외호(首座外護)에 항상 힘써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사미승 경봉은 이제 어엿한 중이었다. 아무리 나이 많은 신도라 하더라도 사미승 경봉을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합장을 먼저 해왔다. 사미승 경봉은 운 좋게도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信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할 수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신학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밀양에 살던 오촌 숙모가 경봉을 찾아와서 만류를 했다.
“신식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난리가 났을 때 선봉장에 세운다는 소문이 있다. 절대로 학교를 다녀서는 안 된다.” 경봉은 4대 독자였으므로 출가해서도 그의 행동은 늘 집안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러나 경봉은 명신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신학문을 더 공부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 일본 유학까지 생각했으나 은사 성해스님과 사형 구하스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명신학교를 졸업한 후 해담(海曇)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아 정식으로 중이 된 것을 자축했을 뿐이었다.
경봉은 강원에서 닥치는 대로 불경을 익혔다. 만해 한용운 스님으로부터는 <화엄경>을 배웠는데, 특히 한용운 스님은 불경 강의 시간에도 <월남망국사>를 강의하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인 날도 있었다. 23세 때 강원에서 대교(大敎)를 수료한 이후에도 경봉은 겨을 내내 방대한 <화엄경>을 놓지 않았다.
<화엄경>의 원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각 장이 독립된 경(經)으로 부처의 입멸 후 몇 세기에 걸쳐 전해지다가 집대성되어 육십 권으로 엮은 육십화엄과 팔십 권으로 엮은 팔십화엄이 전해지고 있는데, 대방광불화엄경이란 7자를 중국 규봉스님의 제자 전오대사가 독특하게 한 자씩 설명하고 있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大) 자는 마음이 비록 일체는 아니나
능히 일체가 되니
대는 곧 심체(心體)를 가리키며
심체는 끝이 없으므로 대자를 쓴 것이요,
방(方) 자는 마음의 모양인
심상(心相)을 가리키니
마음이 모든 덕상(德相)을 갖춘 까닭이요,
광(廣) 자는 마음의 쓰임(用)을 가리키니
마음이 우주본체에 쓰임이 있는 까닭이요,
불(佛) 자는 마음의 과(果)를 가리키니
마음이 해탈한 것을 불(佛)이라 이름하는 것이요,
화(華) 자는 마음의 인(因)을 가리키니
마음의 행(行)을 꽃에 비유한 것이요,
엄(嚴) 자는 마음의 공(功)을 가리키니
공덕을 지어 꾸미는 것을 엄(嚴)이라 하고,
경(經) 자는 마음의 가르침인 교(敎)이니
이름과 말을 일으켜서 이치를 설명하기 때문에
경(經)이라 한 것이다.
경봉은 광대무변한 <화엄경>의 불설(佛說) 중에서도 특히 ‘입법계품’ 가운데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을 만나서 보살행을 이루려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마음의 준비가 무엇이냐고 묻자, 보리심(菩提心; 구도의 마음)에 대해 대답하는 대목에서 선열을 느꼈다. 마치 경봉 자신이 미륵보살 앞에 선 선재동자가 된 느낌이었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의 종자이니, 모든 부처님의 법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대지이니, 이 세상을 받쳐주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맑은 물이니, 온갖 번뇌의 고통을 씻어주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큰 바람이니, 그 어떤 것에도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타오르는 불이니, 온갖 삿된 소견과 애욕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맑은 햇살이니,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비추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맑은 눈이니, 바르고 그릇된 길을 낱낱이 가려보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문이니, 모든 보살의 행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인자한 어머니이니, 보살들을 기르고 감사주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큰 바다이니, 온갖 공덕을 다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해 불보살의 공덕과도 같으니,
보리심에 의해 보살의 행이 열리고 삼세의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엄경>의 이 구절도 경봉에게는 잠시 선열을 안겨주었을 뿐, 경봉의 머리에 불을 지르지는 못했다. 통도사 강원의 대교를 수료한 그 이듬해 경봉에게 불벼락을 내린 <화엄경>의 단 한 구절은 바로 이것이었다.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
팔만사천의 불설도 어디까지나 부처의 보배일 뿐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자신에게는 반 푼어치의 가치도 없다는, 느슨하게 불경삼매에 빠져 있던 경봉의 머리를 후려치는,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구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경봉의 머리에 불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봉은 달빛도 세어들지 못하는 컴컴한 숲길로 접어들었다. 칙칙한 숲길에서는 길동무처럼 함께 따라왔던 자신의 그림자도 사라졌다. 가파른 숲길이라 발걸음을 빨리 할 수도 없었다. 경봉은 큰소리로 <천수경>을 외며 허공에 뜬 달이 보일 때까지 숲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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