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법좌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문을 열고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니, 사월의 남풍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제비들이 짝을 지어 날며 속삭이는 듯 서로 밀어를 전하고 있다. 산은 높고 물은 푸르며, 만 가지 꽃들이 저마다 향긋하게 피어 있다.

예전 어느 선비가 제비들의 지저귐에 영감을 받아 이런 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제비야, 제비야, 네가 돌아왔구나. 소식이 참으로 반갑다. 요즘 강남의 풍경은 어떤지 궁금하구나.

이에 제비가 답하기를:

어젯밤 동풍과 봄비에 복사꽃이 주인댁 뜰을 가득 채우며 피어났습니다.

말씀은 이어진다. 산이 평등하니 어디서나 붉고 푸르며, 물이 평등하니 서로 만나 하나가 되어 길게 흐른다. 해와 달과 별이 평등하니, 사계절 내내 밝으며, 사람의 마음이 평등하니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고르게 이루어진다.

모든 진리가 평등하기에 과거와 현재는 본디 한결같다. 그 사이에 구별이 없으므로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온갖 존재와 경계가 평등하게 조화를 이루니, 꽃은 웃고 새는 노래하는 것이다. 이 법이 평등하므로 높고 낮음, 길고 짧음, 옳음과 그름, 밝음과 어두움, 선악, 생사마저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이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길게 말할 것 없이 나머지는 내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옛날 항주의 무착 문희 선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오대산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성지로 알려진 오대산 금강굴 앞에 앉아 사색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소를 몰며 나타나 무착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는 누구이며, 이 산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문수보살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문수보살을 뵐 수 있을까? 그런데 밥은 먹었는가?"

그것은 단순히 밥을 물은 것이 아니라, 법문 속에서 그의 깨달음의 정도를 엿보기 위함이었다. 무착은 대답하기를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사실 여기서 '밥 먹지 않았다'는 말은 단순히 주린 상태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이 질문에는 일상 속에서도 진리를 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무착은 놓친 셈이다. 이에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소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

무착도 노인의 범상치 않은 태도를 감지하고 뒤따랐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절이 하나 나왔다. 그곳에서 노인은 시자를 불러 소를 맡기며 차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놓은 찻잔은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호박 등 칠보로 만들어져 환하게 빛났다. 차 한 모금만으로도 세속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감미롭고 상쾌한 향기가 퍼졌다.

노인이 물었다.
“자네는 어디에서 왔는가?”
“남방에서 왔습니다.”
노인이 찻잔을 들며 다시 물었다.
“남방에도 이런 찻잔이 있는가?”  
“없습니다.”
“없다면 무엇으로 차를 마시는가?”

여기서 진정한 질문의 실마리를 놓쳤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찻잔의 유무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탐구하려는 의도였다. 뜻을 헤아리지 못하자 대화마저 겉핥기에 그치고 말았다.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덩이를 향해 달리지만 사자는 던진 사람을 바로 알아보고 쫓는다라는 비유처럼, 겉모습과 참뜻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니 찻잔을 들고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 뜻을 모르면 단순히 찻잔 자체를 묻는 말로만 이해할 것이다. 어리석은 개는 흙덩이가 자신을 때렸다고 믿고 흙덩이를 향해 달려가지만,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바로 알아챈다. 사자와 개를 비교하면 지혜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느냐?"는 질문에 남방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하자, 비록 질문의 본뜻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상대는 단순히 돌려서 "찻잔이 없다면, 무엇으로 차를 마시겠느냐?"라고 되묻는다.

이러한 대화는 가끔 말의 겉으로 드러난 의미로만 받아들여질 때 본래의 깊은 뜻이 잊히곤 한다. 사람은 생각과 나아갈 방향을 깊이 이해해 배움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무착(無着)이 찾은 절의 장식과 벽, 방 내부는 모두 순금으로 빛나고 있었다.

노인이 묻는다.  
"남방의 불법(佛法)은 어떻게 유지됩니까?"  
"말법 시대에 비구들이 계율을 지켜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대중은 얼마나 됩니까?"  
"어떤 경우엔 300명, 어떤 경우엔 500명 정도입니다."  

그러나 노인이 묻는 질문의 깊은 뜻은 다른 데 있었으나, 무착은 있는 그대로의 숫자만 대답했다. 법(法)의 깊이를 깨닫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러자 무착이 도리어 노인에게 묻는다.  
"여기서는 불법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습니까?"  
"범부(凡夫)와 성현(聖賢)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혼재한다."  

무착은 이 말을 듣고도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여기 대중은 몇 명입니까?"  
"앞도 삼삼이고, 뒤도 삼삼이다."  

대중의 수효를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았다. 뒤집힌 까치 소리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날이 저물자 무착은 하룻밤 묵기를 요청했으나, 노인은 말했다.  
"염착(染着)이 있는 사람은 여기 머물 수 없다."  
즉, 마음속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이곳에서 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노인은 또다시 질문한다.  
"자네, 계행(戒行)을 지키고 있는가?"  
"예.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염착(染着)이 아니고 무엇인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으로 들릴 소지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는 다르다. 닦음으로써 닦음이 없고 행함으로써 행함 없는 상태에 이르러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것을 소유하고 있으니 집착이라는 것이다.

줄타기를 하는 광대가 낮게 매인 줄 위에서 지팡이에 의존한다면, 진정한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진정으로 조화롭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내려놓아야 한다.

노인은 무착을 지속적으로 시험하며 깨우침의 계기를 찾아주려 했다. 결국, 무착은 아직 닦아도 닦음의 경지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였기에, 자신의 집착을 떨쳐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노인은 덧붙였다.  
"자네는 염착이 있어서 여기 머물 수 없다."  
결국 무착은 내보내졌고, 절을 나와 균제 시동에게 절의 이름을 물으니 이를 '반야사(般若寺)'라 하였다.

생각해보니 대중의 수효를 묻자 "앞도 삼삼이고 뒤도 삼삼이다"라는 말이 떠올라 균제 시동에게 그 의미를 물었다. 그러자 균제는 답했다.

무착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대중의 수를 묻자, 노인은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라 답했다. 그 말에 갇힌 채 동자에게 물었다.  
"동자야, 내가 노인에게 대중의 수를 물었더니 앞도 삼삼이고 뒤도 삼삼이라 하였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동자가 말했다.  
"대덕이시여!"  
"그래."  
"이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그 단순한 물음에도 무착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대덕이라는 호칭은 높임말이지만, 깊은 깨우침이 없이는 그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음을 드러냈다.  

동자는 다시 물었다.  
"대덕이시여, 정말로 이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아십니까?"  
마치 천 리 만 리 떨어진 듯한 답답함에 무착은 계속 알지 못했다.  
깨달음의 하나가 통하면 무수한 경지들이 함께 열릴 텐데, 무특이 이해하지 못하니 동자가 분명히 가르쳐주어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결국 무착은 동자에게 법문을 청했다.  
"동자여, 나를 위해 법문을 설해주소서."  
동자는 이렇게 법음을 전했다.

얼굴에 화를 내지 않으면 공양이요,  
입으로 화를 내지 않으면 묘한 향기요,  
마음속에 성냄이 없으면 그것이 참된 보배요,  
더러움과 물듦이 없으면 그것이 영원한 참됨이라.  

面上無嗔供養具  
口裡無嗔吐妙香  
心內無嗔是珍寶  
無垢無染卽眞常  

법문을 들은 후 무착이 고개를 들어보니, 노인도 절의 사람들도 모두 홀연히 사라지고 푸른 산 속에 혼자 남아 있었다.  

아, 그 노인은 바로 문수보살이었다. 무착이 그렇게도 친견하고자 깊은 산중을 헤맨 바로 그 문수보살! 하지만 지혜의 눈이 열리지 않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다시 한 번 문수보살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염원했다.  

그 이후 무착은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어느 날, 오대산에서 전좌 소임을 맡아 동짓날 큰 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그때 솥에서 팔팔 끓는 팥죽 속에서 무수한 문수의 모습들이 줄이어 나타났다. 무착은 주걱을 들고 이리저리 치며 외쳤다.

"문수도 나의 문수요, 무착도 나의 무착이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솥에서 나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삼대겁 동안 수행했건만 결국 한 늙은 승려의 의심을 피하지 못했구나. 쓰디쓴 박은 뿌리까지 쓰고, 단 참외는 꼭지가 달기 때문이라네."

爾三大劫修行  
還被老僧嫌疑  
苦瓠連根苦  
甘瓜徹蔕甘  

문수보살의 첫 구절은 무착에게 더 높은 경지를 은근히 일러주며 동시에 자신의 또 다른 진면목을 슬쩍 보여준 것이었다. 두 번째 구절에서는 무착의 깨달음이 아직 완전치 못함을 지적했다.  

무착은 자신이 공부를 이루기 전과 이루고 난 후의 차이를 깊이 성찰했다. 공부를 이루기 전, 그는 단지 성현을 한 번 친견하겠다는 염원 하나로 깊고 험한 오대산을 헤매었다. 하지만 실제로 성현 앞에 서 있었음에도 그의 눈이 밝지 않아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떠나가야 했다. 이후 그는 다시 한번 친견하게 해달라며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성현을 한 번 친견하면 모든 업장의 장애와 수행에서 오는 걸림들이 모두 사라지고, 성현의 가피를 받아 마침내 공부를 성취하게 된다. 그 후에는 문수가 나타나더라도 "문수는 문수일 뿐이고, 나는 나다"라고 마음의 걸림 없이 받아들이니, 이를 이리저리 치며 대응하는 태도가 참으로 대단한 용기라 할 수 있다.

문수대지 스승이시여,  
법에 자유자재하고 살리고 죽이며 주고 빼앗음에 능하시니,  
중생계에 밝은 빛이요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시로다.

산이 끝나고 물이 다한 곳에서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게 피는구나.  

많은 선남선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부모 밑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는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었으나, 학업을 마친 뒤 장가가면 좋겠다고 하여 아버지를 흉내 내 장가보내고, 처녀들 또한 어머니를 흉내 내어 시집을 간다. 마치 거기에 어떤 행복이라도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정을 꾸리면 곧 알게 된다. 삶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온갖 걱정들에 꼼짝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문제뿐 아니라 물질의 문제로 밤낮없이 신경 쓰며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초월하여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아 멋지게 극을 연출하듯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늘 유쾌하고 명랑하며 낙관적인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고.

다른 화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