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③
공양간에서 만난 상원이 또 명담스님의 소식을 전했다. 아무래도 명담스님이 밤늦게 돌아올 것 같으니 차라리 내일 아침나절에 만나라고 권했다.
“삼소굴에 이부자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늦을 것 같은 은사스님은 내일 뵙지요. 아궁이에 장작을 많이 넣어 따뜻할 것입니다.”
김 화백은 상원의 호의가 고마웠다. 아직도 미소년의 티가 남아 있어 아주머니 신도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할 것 같은 상원이었다. 외모도 그렇지만 공손한 태도가 더 호감이 갔다. 김 화백은 좀 전 삼소굴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처사와 겸상을 했다. 스님들은 스님들끼리 질서정연하게 발우공양을 하고 있었다. 상에 오른 반찬은 의외로 많았다. 김치 종류만도 세 가지나 되었다. 큼큼한 냄새가 나는 묵은 김치와 배추속이 노랗게 익은 백김치, 그리고 가지런하게 썰어진 갓김치에다 주전부리거리 같은 다시마튀각, 들기름이 발라져 반지르르한 김,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콩자반, 향긋한 송이버섯구이, 순두부가 넣어진 청국장에 팥이 점점이 든 오곡밥이 입안 가득 침을 고이게 했다. 특별히 먹는 별식이거나 아니면 어떤 신도가 극락암 대중스님들을 위해 음식을 보시한 날 같았다. 상원이 김 화백의 공양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괜찮으시다면 원주실에서 차를 한 잔 드시지요.”
“아, 감사합니다.”
김 화백은 녹차보다는 뜨겁게 마시는 발효차를 마시고 싶던 참이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했다. 세면장은 편리하게도 공양하는 요사와 붙어 있었다. 이제 절도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신도들을 배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활시설들이 예전과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공양간만 해도 온난방 시설은 기본이고, 대형냉장고에다 조리용 기구는 모두 엘피지가스로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었다.
공양하는 동안 암자 둘레는 어둑어둑해지고, 굵어진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김 화백은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새어나오는 원주실로 바로 건너갔다. 상원이 여신도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얘기하다가 김 화백을 소개했다.
“이 분이 바로 큰스님의 진영을 그리실 화백님입니다. 오늘밤 삼소굴에서 머무르실 것입니다.” 그러자 여신도들이 일제히 환영한다는 표시로 탄성을 질렀다. 중년의 여신도가 합장을 하며 김 화백에게 친밀감을 나타냈다.
“우리 경봉 큰시님을 그리실 분이라고예. 큰시님 잘 그려주이소예. 부탁합니더.” 정진할 시간이라며 여신도들이 빠져나가자 비로소 원주실에는 상원과 김 화백만 남았다. 상원은 극락암 원주 소임을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 화백님, 들고 오신 가방은 제가 삼소굴로 옮겨두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큰스님의 진영을 그리겠다고 허락하셨다니 큰스님의 문도인 저희들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큰스님 일기장에서 메모 형식으로 발견된 당부이긴 하지만 이제야 큰스님의 유훈을 지키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은사스님이 몇 번이나 좋아하셨습니다.”
“저에게 너무 기대하시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큰스님께 진 빚이 하나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일찍이 저에게 화가로서 눈을 뜨게 했고 합죽선을 하나 주셨습니다.”
“은사스님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합죽선은 큰스님께서 몇 십 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던 부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김 화백님께 드리게 되었는지 저도 큰스님의 마음이 궁금해집니다.” 상원이 천진하게 부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사실 오늘 제가 극락암에 온 것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큰스님 진영을 그리고자 하는 저의 각오를 명담스님께 보고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합죽선을 큰스님 유물전시관에 돌려준다 하더라도 큰스님께서 왜 저에게 그 합죽선을 주셨는지를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암자 주차장에서 승용차 소리가 날 때마다 김 화백은 혹시 명담스님이 아닌가 하여 귀를 기울였지만 그때마다 허사였다. 상원은 혹시 신도들이 은사에게 곡차를 권하는지 모르겠다며 은사의 건강을 걱정할 뿐 김 화백처럼 기다리지는 않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김 화백도 상원의 태도처럼 명담스님을 기다리지 않았다. 상원과 마주앉아 다담(茶談)을 나누는 시간이 무료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특히 삼소굴(三笑窟)에 대한 상원의 설명은 대단했다. 물론 상원 역시 전해들은 이야기였겠지만 김 화백이 듣기에는 심오한 것이었다.
“큰스님의 일지를 보면 삼소(三笑)의 깊은 뜻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 삼소는 과거 현재 미래의 미소인 삼세소(三世笑)와 과거 현재 미래의 꿈인 삼세몽(三世夢)을 초탈한 뜻을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가 삼소의 깊은 뜻을 알고자 한다면, 야반삼경(夜半三更)에 촛불 춤추는 것을 볼지니라.
삼세를 초월한 경계가 삼소란 말인데, 그것을 깨쳐 알고자 한다면 한밤중의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라고 한다.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어리둥절한 설명이지만 경봉선사로서는 자신의 경험담이었다. 경봉선사가 용맹정진 끝에 확철대오한 순간이 그랬었다. 음력으로 1927년 11월 20일 새벽 2시 반경 갑자기 촛불이 파파팟 파팟 소리를 내면서 크게 춤을 추자, 스님은 무릎을 탁 치고 하하하 크게 웃어젖히면서 자리를 박차고 달빛이 교교한 암자 마당으로 뛰쳐나갔던 것이다. 선열에 겨워 하회탈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심봉사가 심청이를 만난 것처럼 눈앞에 나타난 주인공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상상으로만 헤아렸던 우담바라 꽃이 빛으로 변해 온 세상을 향기롭게 적시고 있었다.
이뭣꼬(是甚?)?
바로 그 의문의 은산(銀山)과 철벽(鐵壁)이 남김없이 무너지고 깨지면서 마침내 주인공(참나)을 찾은 것이었다. 스님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자성(自性) 자리의 풍광은 이러했다. 이른바 스님은 깨달음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불렀던 것이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바라 꽃의 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
“이와 같은 설명마저 버거운 일반 신도들에게는 이렇게 삼소를 얘기해 주셨습니다.”
- 삼소의 삼(三)은 우주의 극수(極數)인 3이요, 소(笑)란 염주를 목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찾다가 결국 목에 걸린 것을 발견하고는 ‘허허’ 하고 웃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한 치도 여의지 않은 자성(自性)을 온갖 곳에서 헤매며 찾다가 깨닫고 나서 ‘허허’ 하고 웃는 웃음이다.
그러니 삼소란 목에 늘 걸려 있는 염주와 같은 것이며 자성의 다른 말이라는 것이었다. 김 화백은 삼소굴로 들어서며 신발을 마루 밑으로 밀었다. 눈발은 벌써 삼소굴 마루바닥까지 들이치고 있었다.
따끈한 온돌방에 눕자 일시에 피로가 몰려왔다. 쌓아놓은 벽돌이 와해되듯 몸이 방바닥에 조각조각 쏟아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김 화백은 암자 뒤 대숲을 훑는 바람소리를 간간이 들었을 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편한 잠은 아니었다. 두어 시간마다 맑은 의식이 심연 같은 잠을 헤치고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처럼 떠올랐다가는 잠수하곤 했다. 분명하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충은 이런 의식이었다. - 경봉스님은 무엇 때문에 몇 십 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했던 합죽선을 나에게 주었을까.
비밀이란 공개되지 않은 것을 일컬을 때 붙이는 추상명사이다. 그렇다면 경봉스님에게 물려받은 합죽선도 김 화백에게는 비밀의 물건인 셈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고민하게 했던 합죽선에 쓰인 글씨는 비밀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일곱 글자의 선필(禪筆)로 분명하게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문장 해석의 정확성이나 격외의 도리만 문제될 뿐인 것이다.
김 화백은 요란한 새벽 도량석의 목탁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잠이 달아난 상태이기 때문에 소리가 더 크게 들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김 화백은 목탁소리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몇 시간의 짧은 잠이었지만 몸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꿈이 없는 잠을 자보기는 근래에 처음이었다.
객승이 도량석을 돌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여느 절과 달리 특이했다. 경허선사의 <참선곡(參禪曲)>이 김 화백의 마음을 빨래하듯 헹구어 놓더니 경봉스님의 <태평가(太平歌)>가 이방인의 허허로운 마음을 훈훈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목청으로 보아 극락암 선방의 법랍이 오래된 늙은 스님임이 분명했다. 더구나 해동선의 중흥조 경허선사는 경봉스님이 사표로 삼아 정진했던 고승인 것이다. 도량석은 솔바람처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애절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都是夢中)이로다.
천만고(千萬古)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 면할 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승이요,
바람속의 등불이라, 삼계 대사(三界大師) 부처님이
정녕히 이르사대 마음 깨쳐 성불하여
생사윤회 영단(永斷)하고 불생불멸 저 국토에
상락아쟁 무위도(無爲道)를 사람마다 다할 줄로
팔만장경 유전(遺傳)하니, 사람 되어 못 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보세.
닦는 길을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대강 추려 적어보세. 앉고서고 보고 듣고
착의끽반(着衣喫飯) 대인접어(對人接語) 일체처 일체시
소소령령 지각하는 이것이 어떤겐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공(本空)하고
천진면목 나의 부처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 번 깜짝할 새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
분명한 나의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 이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 간절틋이 생각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하여 하여 가되 일념만년 되게 하여
폐침망찬(廢寢忘餐)할 지경에 대오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 절묘하다.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여래 이 아닌가.
김 화백은 오줌도 마렵고 하여 삼소굴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루까지 휘날려 쌓인 눈이 달빛을 반조하며 보석처럼 반짝였다. 눈발은 이미 그쳐 있고 세상은 온통 은색의 별천지로 변해 있었다. 암자 뒤 대숲에서는 눈을 터는 대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듯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멀어졌던 도량석 목탁소리가 다시 삼소굴 쪽으로 가깝게 들려오고 있었다. 김 화백은 도량석하는 스님과 마주치는 것이 민망할 성싶어 얼른 대숲으로 들어갔다.
영리한 주인공아, 주인공아
그대 말이 그러하고 그러하다
오늘 날씨도 따뜻하고 바람도 화창하여
산은 층층하고 물은 잔잔하며
산꽃은 웃고 들새는 노래 부르니
손을 마주잡고 태평가나 불러보세.
주인공아, 주인공아
태평가를 불러보세
태평가를 불러보세
녹양천변(綠楊川邊) 방초안(芳草岸)에
백우(白牛)를 잡아타고
임운등등 등등임운
마음대로 놀아보세.
방으로 돌아온 김 화백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늦잠을 자버렸다. 방문 밖에서 상원이 삼소굴 마당을 빗자루질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사스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아무 때나 원광재로 올라오라 하십니다.”
“도량석 때 일어났습니다만 늦잠을 자버렸습니다.”
“피곤하셨나 봅니다. 아침 공양은 따로 치우지 않았습니다. 세면하시고 공양간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원래 아침은 먹지 않습니다.”
암자의 풍광은 어제와 달랐다. 대중스님들이 눈가래로 눈을 치우느라고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제설작업은 시늉만 내는 듯했다. 스님들이 다니는 최소한의 통로에 쌓인 눈만 치울 뿐 온 산과 들은 은색천지로 바뀌어져 있었다. 김 화백은 눈이 부셔 찡그리며 원광재로 올라갔다. 명담스님이 잿빛 셔츠 바람으로 마루에 앉아 김 화백을 맞이해주었다. 명담스님 역시 눈밭에 난반사되는 빛살에 눈이 부셨는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월백 설백 천지백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가 앉자마자 명담스님은 차를 진하게 우렸다. 다관에 찻잎이 가득 차도록 넣어 우리는 것이었다.
“제가 우린 차를 짜다고들 합니다만 효당스님의 차는 소태처럼 짰더랬습니다.”
명담스님은 큰스님의 진영 얘기는 잊어먹었는지 차 얘기만 했다. 김 화백은 스님의 말을 자르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질박한 우리네 입맛에는 서도니, 다도니 하는 것이 그저 생경스럽게 여겨지지만 차에는 동양적인 고요함과 의연한 선비정신과 사기(史記), 경교(經敎), 그리고 율시(律詩)가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다도가 엄격하기로는 효당 최범술 스님을 따를 이가 없지요. 한때 다솔사에 머문 인연으로 효당과 만나게 되었지요. 다솔사는 효당이 심은 차나무와 황금 편백나무가 윤기를 내고 만해 한용운 스님을 주축으로 한 만당(卍黨)의 긴장감이 도는 뜻 깊은 분위기가 절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지요.
효당은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차도구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탕관에서 물을 푸기 전에 선방에서 입정할 때 죽비로 치듯, 차도구로 탁탁탁 하고 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차를 돌리는데 찻잔에서 손을 뗄 때는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 바쁜데 뭐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했더니 - 아, 이 사람아! 바쁘기는 뭐가 바빠. 공연히 바쁠 것이 없는데 스스로 만들어서 바쁜 것이지, 하며 핀잔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효당은 백탄(白炭)도 만들어 썼지요. 참나무를 잘게 잘라서 불을 많이 때는 아궁이 밑에 묻어 놓으면 얼마 지나서 저절로 차생활에 쓰기 좋은 백탄이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절의 부목이 이것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어찌나 호되게 호령을 하는지 기억에 남습니다.”
김 화백은 명담스님의 차 얘기 중간에 겨우 끼어들었다.
“스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삼소굴에서 하룻밤 잔 인연으로 큰스님의 진영을 그리겠다는 마음이 더욱 굳어진 것 같습니다.”
“선방 수좌들이 안거에 들어가듯 김 화백께서는 그림으로 결제에 들어간 겁니다.”
사실이었다. 상원의 빗자루질 소리를 듣고 삼소굴 방문을 나서며 김 화백은 기묘한 체험을 했던 것이다. 마치 경봉스님의 가사장삼 속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삼소굴이 경봉스님의 가사장삼 같았습니다.”
“노장님의 가사를 한번 입어 보았으니 이제부터는 진영을 그리실 분이니 노장님 마음속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노장님께서 부채를 주신 걸로 압니다. 그러니 노장님의 마음을 이심전심으로 아셔야 합니다. 더구나 그 합죽선은 노장님께서 오랫동안 간직했던 물건입니다. 수좌들이 오면 합죽선을 펴서 바람을 일으키시고는 묻곤 했습니다.”
“뭐라고 말입니까?”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입니다. 일찍이 노장님은 만공선사와 바람을 놓고 선문답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경봉스님은 오도 후 44세 때 통도사 주지를 맡은 적이 있었다. 스님은 업무차 서울에 가면 총무원보다는 선학원(禪學院)을 찾아가 머물며 고승들과 선문답을 주고받았다. 선학원에는 경허의 수법제자 만공과 젊은 청담이 자주 와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먼저 와 있던 만공이 선학원에 들어서는 경봉을 보더니 거량(擧量)을 시작했다. 경봉이 모자를 벗고 마루 끝에 앉아 신발 끈을 풀고 있을 때 여신도를 시켜 선문(禪問)을 띄웠던 것이다.
- 저기 있는 스님이 통도사 경봉스님이다. 네가 벗어놓은 모자를 덮어씌우면서 풍종하처래(風從何處來; 바람이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라고 물어보라. 여신도는 만공의 지시대로 했다. 그러자 경봉은 모자를 벗어 다시 여신도에게 씌우면서 말했다.
- 풍종하처래오? 여신도는 말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이번에는 경봉이 젊은 청담의 머리에 씌우면서 물었다.
- 풍종하처래오?
청담 역시 다급하게 모자를 벗어놓을 뿐 대답을 못하자, 경봉은 얼굴이 달덩이 같고 눈썹이 허연 만공의 머리에 모자를 씌웠다.
- 풍종하처래오?
- 스님이 일러보소. 경봉은 비쩍 마른 만공선사의 팔목을 잡아 통증을 느낄 만큼 혈(穴)을 꾹 눌렀다. 그러자 만공선사가 아얏 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 수고했소, 앉으시오. 바람이 오고 감을 느끼는 것도, 아얏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도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말하려는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김 화백은 합죽선으로부터 촉발되었던 의문이 하나 둘 씻기는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경봉스님이 67세 때 불화가 석정(石鼎)스님과 문답하는 얘기를 명담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는 눈에 끼었던 헛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통쾌함이 솟구쳤다. 극락암의 산신탱화 중에 산신이 학의 날개를 부채처럼 들고 있는 것에 대한 선문답이었다. 경봉이 먼저 석정에게 물었다.
- 학의 깃이 산 학의 깃인가, 죽은 학의 깃인가.
- 전단향을 쪼갬에 조각조각 전단이요, 생학의 분신이 낱낱이 생학입니다. - 산신은 다섯 가지의 신통과 다섯 가지의 힘이 있는데 부채는 어디다 쓰며 또 사철 부채를 들고 있으니 사철에 부채를 어찌 쓰는가.
이에 석정은 게송을 하나 읊조리며 대답을 했다. 경봉은 석정의 대답에 몹시 흡족함을 느꼈다. 자신의 일기장에 ‘1958년 6월 17일 화요일 맑음’이란 칸 밑에 다음과 같이 석정의 게송을 적어 놓았던 것이다.
봄날에 부채를 부치면 온갖 꽃 다투어 피고
가을에 부채를 부치면 온갖 나무에 낙엽지고
여름에 부채를 부치면 구름이 일고 비가 오고
겨울에 부채를 부치면 서리와 눈이 옵니다.
김 화백은 찻잔을 들었다가 갑자기 수전증 환자처럼 손이 떨리어 놓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가 등골을 타고 사라지고 있었다. 그동안 경봉스님이 건네주었던 합죽선에 대해서 품었던 두 가지의 의문이 다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는 풍종하처래와 같이 주인공을 찾는 마음공부를 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붓을 산신의 부채처럼 신통묘용하게 놀리라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