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참선이란 승속僧俗을 구분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결정된 ‘믿음’자 만을 요하나니, 만약 당장에 믿기만 하면 믿어지게 되고 잡기만 하면 안정이 되고 하기만 하면 주체가 되어 오욕에 흔들리지 않음이 마치 무쇠 막대기 같게 하면 반드시 한정된 날짜에 공을 성취할 것이로되 독안에서 달리는 자라는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찌 보지 못했는가? 화엄회상에서 선재동자가 1백10성을 다니며 53선지식을 찾아 뵙고 위없는 불과를 획득함도 또한 하나의 ‘믿음’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법화회상에서 8세의 용녀가 부처님에게 구슬을 바치고 곧장 남방의 무구세계로 가서 성불한 것도 또한 하나의 ‘믿음’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열반회상에서 광액도아가 도살하던 칼을 내려놓고 외치기를 나도 1천 부처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한 것도 또한 하나의 ‘믿음’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예전에 아나율타가 부처님에게 꾸지람을 듣고는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다가 두 눈을 잃고서야 대천세계를 마치 손바닥 안의 과일처럼 꿰뚫어 보게 된 것도 또한 하나의 ‘믿음’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또 어떤 젊은 비구가 한 늙은 비구를 희롱하며 과위果位의 증득을 인가하여 준다 하고는 마침내 가죽공으로 머리를 네 번 때리는 끝에 곧 사과四果를 얻게 된 것도 또한 하나의 ‘믿음’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양기가 자명화상에게 참례하고 원주院主의 소임을 맡아서 10년이 되던 해에 콧구멍(識心)을 잃어 버리고 도를 천하에 전파한 것도 또한 하나의 ‘믿음’자를 벗어난 것이 아니며, 역대의 부처님과 조사 같은 분들이 저 언덕으로 뛰어 올라 위대한 법의 바퀴를 굴려 만물을 이끌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한 것이 모두 이 하나의 ‘믿음’자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믿음은 도의 원천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며, 믿음은 위없는 부처님의 보리이며, 믿음은 번뇌의 근본을 영원히 끊을 수 있으며, 믿음은 해탈문을 신속히 증득할 수 있다」 하였다. 예전에 선성비구가 부처님을 시봉하며 스무 해 동안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이 ‘믿음’자 하나가 없었기에 성인의 도를 이루지 못하고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오늘 신옹거사는 비록 부귀한 가운데 자리하였으나 능히 이와 같은 결정된 믿음을 갖추었다. 지난 임오년에 산을 올라와 뵙기를 청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돌아갔으며, 또 이듬 해 겨울에 직옹거사를 데리고 함께 방문하여 비로소 문안에 들어오게 되었다가, 지금 또 한 해를 지나 양식과 음식을 꾸려 싸가지고 특별히 찾아와 만나서 계를 받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까닭에 여러 날 그 동기를 깨물어 보았더니 돈독한 믿음을 가지고 도에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확실하게 있었다.《유마경》에 이르기를 「높은 벌판 너른 땅에는 연꽃이 나지 않고 낮으며 습기찬 더러운 진흙땅이라야 이 꽃이 난다」 하였으니 바로 이를 일컫는 말이다. 산승이 이러한 연유로 가상히 여겨서 힘도 덜고 수행하기 쉬우며 일찌기 증험했던 화두를 가지고 양손으로 전함에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자리로 돌아가는가?」라고 하나니, 결정코 이렇게 믿고 이렇게 의심을 낼지어다.
모름지기 의심은 믿음을 바탕으로 삼고 깨달음은 의심을 작용으로 삼음을 알아야 할지니라. 믿음이 십분 있으면 의심이 십분이 되고 의심이 십분이 되면 깨달음이 십분이 되니, 비유컨대 마치 물이 불어나면 배가 높아지고 진흙이 많으면 부처님이 커지는 것과 같다. 서역과 이 땅에서 고금의 선지식들이 이 부분의 광명을 피워서 선양하였으니 그것은 단지 하나의 해결된 의심일 뿐이다. 천 가지 의심과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한 가지 의심일 뿐이니 이 의심을 해결한 자는 다시는 남아있는 의심이 없으며, 이미 남아있는 의심이 없으면 곧 석가나 미륵 또는 유마거사나 방거사와 더불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둘일 수도 없고 다를 수도 없으며, 동일한 눈으로 보고 동일한 귀로 듣고 동일하게 받아들여 작용하고 동일하게 드나들며 천당과 지옥을 임의로 노닐고 호랑이 굴과 마구니 궁전을 종횡으로 다녀도 걸림이 없으며 자유롭게 운에 맡기고 운에 맡겨서 자유롭게 된다. 그러므로《열반경》에 이르기를 「나고 죽음이 멸하여 다하면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하였으니 모름지기 이 즐거움은 망령된 생각으로 변천하고 집중되는 정식情識의 즐거움이 아니라 곧 참된 깨끗하며 행함이 없는 즐거움일 뿐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고,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으며, 증점은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생멸이 없는 참된 공의 즐거움을 모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의심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설령 그대가 앉은 자리에서 미륵이 하생할 때까지 이르더라도 또한 다만 풀에 의지하거나 나무에 붙어있는 정령이 되거나 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놈이 될 뿐이리니, 경전에서 말하기를 「이승二乘 가운데 작은 과위果位를 얻은 자들은 비록 8천겁 동안 큰 선정에 들어가더라도 이 일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인과의 거리가 점차 멀어져서 늘 부처님의 꾸지람을 받는다」 하였다. 곧장 큰 믿음을 드러내고 큰 의심을 일으켜서 의심하고 의심하여 한 생각으로 만 년이 흐르고 만 년 동안 한 생각이 되어 이 하나의 법이 떨어지는 자리를 정확하게 보고자 한다면, 마치 어떤 이와 더불어 생사의 원수를 맺은 것처럼 마음으로 분노하고 문득 한 칼에 두 동강이 내고자 하여 비록 아차하며 넘어지는 순간에도 언제나 맹렬하고 예리하게 채짹질을 가하는 시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어 자나깨나 잃지 않으며 눈이 있어도 봉사처럼 하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처럼 하여 보거나 듣는다는 상투적인 형식에 떨어지지 않더라도 여전히 아직은 주체와 대상이 잊어지지 않고 훔치려는 마음이 쉬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쪼록 정진하는 가운데 더욱더 정진하여 곧 행해도 행하는 줄 알지 못하고 앉아도 앉은 줄 알지 못하고 동서도 변별하지 못하고 남북도 구분하지 못하며, 어느 한 법도 정情에 가히 상대시킬 만한 것이 있다고 보지 않음이 마치 구멍없는 무쇠방망이와 같아서 의심의 주체와 의심의 대상 및 속마음과 바깥경계가 한꺼번에 잊어지고 한꺼번에 없어져서 없다는 것이 없어진 것 또한 없어지게 해야 한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발을 들거나 발을 내리 딛는 자리에서 절대로 바다를 밟아 뒤집거나 수미산을 차서 쓰러뜨리려 하지 말고, 꾸부리고 돌아보고 내려보고 우러를 때 맹렬히 쏘아보아서 달마의 눈동자를 멀게 하고 석가의 콧구멍을 뭉그러지게 하라.
만일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설명을 더해 주겠다. 어떤 승려가 조주화상에게 묻기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지만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니 조주가 이르기를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을 한 벌 만들었는데 무게가 7근이었다」고 하였으니, 변변치 못한 조주 스님이여! 너무 지나치게 자질구레하였도다. 특히 그 승려를 위해 의심을 끊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천하의 납자들을 속여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소굴 속에 죽어 있게 하였도다. 서봉은 그렇지 않으리니, 오늘 홀연히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지만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면 다만 그를 향해 「개가 펄펄 끓는 가마솥을 핥느니라」라고 하겠다. 신옹거사여 신옹거사여! 만약 이 속에서 짊어지고 갈 수 있다면 다만 이 하나의 ‘믿음’자도 또한 눈 속에 붙은 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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