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은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이는 스승이 법좌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있으나 다름없고, 청중이 자리에 앉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스승이 특정한 말을 하려는 순간적인 생각이 일어나기 전부터도 법문은 늘 존재한다. 이 도리를 바로 알 수 있다면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지만, 이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부득이하게 입을 열어 설명하거나 가르침을 전하게 되면서 불가피하게 언어로써 전해야 한다.
흩어진 구름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시선은 하늘과 땅을 넘나들고, 사방 어디를 보든 마음껏 세상을 누려보라는 고요한 가르침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산을 보면 산이 푸르고, 물을 보면 흐르는 물이 푸르게 보인다. 그러나 수행의 깊은 단계에 이르면, 산이 더는 산으로 보이지 않고, 물도 그저 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자기 내면의 수양과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만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말들이 이해되기 어려우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는 마치 무거운 쇳덩이를 삼킨 것처럼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깨우침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그 말의 본뜻에 합치되며, 산과 물의 참된 실상이 드러난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도 물이 아니다에서 더 나아가 산은 곧 물이며, 물은 곧 산이라는 통합된 이해가 생겨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니, 이는 더없이 심오한 진리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천경만론(千經萬論)의 수행에서도 결국 자신의 본성을 닦고 깨달아 부처가 되며 중생을 교화하라는 가르침에 귀결된다. 우리가 집착하고 사랑하는 이 몸 역시 엄격히 따져보면 나의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온 것이다. 참나(眞我)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육신을 조종하고 운전하는 밝고 생명력 있는 내면의 자리에 있다. 이 자리가 곧 나의 본질적 주체이며 참된 나 자신이다. 이는 마치 남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러도 집 주인을 찾아보는 것이 당연하듯, 몇십 년간 몸을 지니고 살아왔다 해도 그 주체를 찾으려는 노력이 없으면 제대로 된 삶이라 할 수 없다.
석가모니께서도 왕위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 이 진리를 깨닫고자 하셨다.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의식주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이 하루 중 단 한 시간이든 자신 안의 주인을 찾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마음은 왜 끊임없이 방황하는가? 현재를 살아가며도 서울, 대구, 부산 등 온갖 방면으로 생각이 흩어지고 과거와 미래를 궁리하는 망상이 계속 우리를 어지럽힌다. 이러한 망상이 주인 행세를 하면 진정한 나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반복적인 수련과 닦음을 통해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연습이 필요하다.
마음은 본래 고요하나 인간 스스로 그것을 흔들어 탁해지게 만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물이 맑게 가라앉듯, 마음 또한 고요와 평온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 망상이 앞을 가린다고 해서 한계에 머물지 말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그 혼탁함을 쉬게 하고 닦아나가야 한다.
삶에서는 걱정과 근심이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그러한 마음까지 떨쳐낼 필요가 있다. 우리네 인생은 어차피 백 년을 넘기기 어려운 짧은 길이다. 그러니 까닭 없는 걱정에 매달리기보다는 쾌활하고 낙관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가 늘 말하기를, “이 사바세계에 우리가 나왔는데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바탕 멋들어지게 하고 가자”는 말이 그런 까닭이다.
항상 걱정과 근심에만 얽매여 살아간다면 애초에 삶을 무엇하러 시작했겠는가. 물론, 걱정스럽고 불안한 일이 생길 수 있지만, 그런 일은 떨쳐내고 살아야 한다. 어차피 인간의 삶이란 기껏해야 백 년을 넘기지 않는 짧은 여정이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활기차고 쾌활하게, 낙관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안고 사는 대부분의 근심은 물질에 대한 집착이나 대인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이라면, 부처님의 초월적 가르침에 기대어 인생의 방향성과 올바른 세계관을 확립해야 한다.
그동안 이어온 잘못된 생각과 삶의 태도가 있다면 과감히 버리고, 진실하고 명확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자,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참선은 결국 자신의 본래 마음 상태를 찾는 과정이다. 선을 선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이미 선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법을 법이라 부르거나 부처를 부처라 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이름과 모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마음이 어디 적혀 있거나 구체화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그저 고요하고 맑은 자리에서 스스로를 비추어볼 뿐이다. 그 자리에는 이름도, 모습도 없다.
불교에 발을 들였다면 진리의 길을 찾아야 한다. 법문에 귀 기울이며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라. 선은 고요하고 맑은 사유다. 분주한 생각을 멈추고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실, '들어간다'는 표현조차 적절치 않다. 애초에 본질적으로 고요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악한 것을 버리는 행위인 기악(棄惡) 역시 중요하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악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참된 선(禪)에 다다를 수 없다. 마음이 고요하고 맑으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속에 불순한 생각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자신의 본성을 닦아 맑고 바른 상태에 이를 때, 보고 듣는 것이 명료해지고 삶의 모든 면이 조화롭게 이루어진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이를 속이지 않아야 한다. 내 본성을 숨기지 않고 또한 타인에게 정직하며 바르게 마주하는 것, 그것이 정수(正受)다.
참선은 말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치이다. 눈짓 하나로도, 손짓 하나로도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며, 화두 역시 원래는 없지만 중하근기의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활용되는 것이다. 참선을 통해 이 본체를 깨닫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앉든 눕든, 도를 닦는 사람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적절한 집중 상태를 유지하고, 화두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한 순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금강처럼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삶과 죽음의 근원을 탐구하며 공부해야 한다. 한 순간의 깨달음이 영원히 이어지듯, 자신의 내면을 돌이켜 보고 또 살피면서 망상의 흔적이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잡념은 불멸의 지혜의 빛 앞에서는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불꽃 속에서 파리가 앉을 곳을 찾지 못하듯 말이다.
참선 중에는 쉽게 혼침에 빠지거나 온갖 생각이 떠오르기 쉽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며 꾸준히 닦아 나가다 보면 점차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렇게 쉬고 또 쉬는 순간에 뜻밖의 경지를 만나거나 소리를 듣게 될 때, 의심의 덩어리가 사라지고 자신의 본질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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