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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단장수가 비단을 팔러 다녔다. 산을 넘다가 몸이 고단해서 양지 바른 곳에서 비단짐을 베고 낮잠을 잤다. 한참 자고 일어나 보니 베고 자던 비단을 잠든 사이 누가 훔쳐갔다. 그 비단을 팔아서 먹고 살던 처지에 그것을 누가 훔쳐 갔으니
살 길이 막연해서 고을 원님께 소지를 청했다. 소지라는 말은 지금으로 치면 진정서를 낸다는 말과 비슷하다. 원이 비단 장수에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자
“예, 소인이 비단을 팔러 다니다가 비단짐을 베고 잠든 사이에 어느 놈이 비단 짐을 몰래 가져갔습니다.”
“그럼 누가 본 사람이 없느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이 봐도 봤겠지.”
자꾸 다그쳐 묻자 비단장수가 말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망두석이나 봤으면 봤을까.”
“망두석이 있더냐?”
“예.”
“그럼 사령들은 듣거라. 그 망두석 범인을 봤을테니 속히 망두석을 잡아 오너라.”
원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망두석을 잡으러 가지만 아전들이 웃는다.
“망두석이 보기는 무얼 봤다고.. 사또가 참 시원치 않군.”
하고 조소를 하였다.
아전들이 망두석을 묶어다 동헌 뜰에 엎어 놓았다. 원이 망두석을 보고 심문을 시작한다.
“망두석 듣거라! 비단 장수가 비단을 베고 자다가 비단을 잃어 버렸다고 하는데 네가 범인을 보았을 테니 본대로 바로 말하렷다.”
하지만 망두석이 어디 말할 수가 있나, 원이 노발대발하며
“저 놈을 장판위에 올려놓고 매우 쳐라!”
사령들이 곤장으로 망두석을 토닥토닥 치니, 이 희한한 광경을 지켜보고 서 있던 구경꾼들이 어찌나 우습던지 폭소를 터뜨리고 아전들도 웃고 모두들 웃으며 속으로 저 세근 없는 사또의 하고 있는 꼴 좀 보라는 듯이 수군거리자 사또가 노발대발하며
“저기 웃는 놈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어라. 사또가 정사를 다스리는데 무엄하게 조소하고 저렇게 소란을 피우니 저런 놈들은 좀 때려야 하니까 우선 가두어 놓아라!”
사또가 명령을 내려 잡아 가두게 하자, 도망친 사람도 있고 미쳐 달아나지 못하고 붙들린 사람이 한 삼십여 명이나 되었다. 사또가 아전을 시켜 은근히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너희들이 사또께서 치민治民 치정治政하는데 조소하고 소란을 피웠으니, 그 죄로 비단 한 필씩만 가져오너라. 그러면 놓아 줄 것이다.”
모두들 어서 나갈 생각으로 그 가족 되는 사람들에게 비단 한 필씩 가져오게 해서 전부 나갔다. 그렇게 해 걷어 들인 비단을 쌓아 놓고 비단장수에게 네 비단이 여기 있는가 찾아보라고 하니, “이것도 제 것이올시다. 저것도 제 것이올시다.”하며 여러 필을 찾았다. 사또가 나졸들을 시켜서
“이 비단을 어디서 샀는가, 그 산 곳과 사람을 비단 가져온 사람에게 알아 오너라.”
여러 필을 골라 가지고 산 곳을 캐보니 아무 동네 아무개에게 산 것이 드러나서
그 사라마을 잡아 들여 엎어 놓고 몇 차례 때리니까 전부 얘기한다.
“제가 어느 곳을 지나다 보니까 비단을 베고 자기에 욕심이 생겨서 가져갔습니다.”
다른 사람의 비단은 다 임자에게 돌려주고 비단 장수의 비단은 전부 찾아 주었다. 망두석을 곤장 칠 적에 모두 웃었지만 진범인 도둑이 거기서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적실한 뜻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庭前栢樹子]니라.”
자기 자성(自性) 자리를 찾는데, 왜 얼토당토않은 잣나무는 찾는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 3근이니라.”

이 모든 내용은 마음을 찾아가는 여정과 관련해 현실적으로는 전혀 닿을 수 없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의문을 품으며 깊이 참구하다 보면, 결국 무아(無我)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 단계에 이르면 앞서 언급된 망두석을 때리는 상황처럼, 마치 도둑이 잡히듯 참된 본래의 '무위진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위(位)가 없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다.

비록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을 꾸준히 탐구하면 진정한 본성을 깨달을 기회가 생긴다. 망두석을 때리는 행위나, 마른 똥 막대기, 삼 서 근 등의 공안을 통해 궁극적으로 나아가면, 스스로의 본질적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흔히 우리가 몸을 '나'라고 생각하지만, 과학적,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이는 부모로부터 온 것이지 나의 소유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자아는, 눈앞에서 그 무엇으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분명하고 밝은 자리이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공안을 끊임없이 참구해야 한다. 최근에 출가해 수행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바보가 되거라. 사람답게 살려고 하면 일은 끝이 없다. 바보가 돼야 참 사람이 나온다”라고 충고한다.

참선을 수행하는 이는 마삼근, 정진백수자, 무자, 간시궐과 같은 천칠백 개의 공안 중 하나를 붙들고 끊임없이 참구하면서 열심히 정진하면 지극히 고요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본래부터 고요한 자리지만, 그 경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늑함과 편안함을 주며, 몸과 마음이 절대적으로 평온해진다.

이를 넘어 수행이 더욱 깊어지면, 자신의 마음이 본래부터 맑고 정결한 경지에 이른다. 그 밝음은 어둠이 사라짐으로써 드러난다. 이 깨달음의 도리는 죽고 사는 것조차 본래 텅 빈 것이며, 알고 모르고의 구별마저도 부질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깨우쳐준다. 이 과정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스스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나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옛 성현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범부는 유(有)에 머물러 있고, 소승은 무(無)에 머물러 있으며, 보살은 유와 무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역시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킨 결과일 뿐이다. 색(色)은 색이 아닌 속성을 가지며, 색에 집착하지 않으며, 동시에 비색(非色)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또한 보는 견(見)을 보지 않고, 보지 않음조차도 보지 않으니 이를 견법(見法)이라고 한다. 아는 지(知)에 집착하지 않고, 모르는 것 또한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을 지법(知法)이라 한다. 이러한 형성된 견해 자체를 망상이라 부르고 있다.
수행하는 이는 이것을 재삼 살펴 볼 일이다.

달빛은 구름에 어려 희고
솔바람은 이슬에 젖어 향긋하네
좋다 이 참 소식이여
머리를 돌이켜 자세히 보아라

月色和雲白
松聲帶露香
好箇眞消息
回頭仔細看

할 한 번 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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