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기억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젊었을 때에는 ‘산두 박첨지’라는 허수아비 놀이가 있었다. 동네 중심의 빈 터가 있으면 기둥 네 개를 세우고 포장을 쳐서 간이 무대를 마련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산두 박첨지 놀이가 시작되었는데, 기둥 네 개는 우리 몸이 땅, 물, 불, 바람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상징하며,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놀이가 시작되면 포장 위로 허수아비들이 탈을 쓰고 등장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이 허수아비들을 움직이는 것은 포장 아래 숨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줄을 당겨 허수아비들이 입을 움직이게 하고 춤을 추게 하니, 겉보기에는 정말로 허수아비들이 스스로 하는 듯 보였다.
처음에는 부채를 흔들며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뒤에 한 털보 영감이 나오는데, 탈로 만든 수염이 인상적인 캐릭터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오늘 참 사람들이 많이 모였구먼.”
하지만 곧이어 그는 재치 있게 덧붙인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너희들이 아니라 나처럼 부모의 탈을 쓰고 있는 존재라는 의미 아니겠느냐고. 그리고 너희 마음속 번뇌와 망상도 마치 내 수염처럼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다며 비유를 건넨다.
그 다음에는 남녀 허수아비 한 패거리가 등장하여 춤추고 노래하며, 인간의 세속적 애정과 집착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서로 장난스럽게 때리기도 하고 즐겁게 어울리며 한바탕 신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동물 탈이 등장해 함께 어울리고, 이어서 스님 몇 명의 허수아비가 절을 짓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장단을 맞추어 흥겹게 노래하며 절을 짓는다.
에루 화산에 절을 지어 뚝딱
에루 화산에 절을 지어 뚝딱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빠르게 절 하나를 완성한다. 절이 다 지어지면 법사가 등장해 법문을 펼친다. 법상 위에 앉아 주장자로 법상을 탁 치며 게송을 읊는다.
다만 범부의 생각만 모두 비우거라
별로히 성현의 깨달음은 없다네
但盡凡情
別無聖解
간단한 법문이지만 내포된 메시지는 깊다. 범부의 생각을 비우기만 하면 되는데도, 바로 그 집착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간결히 법문을 마치고 주장자를 또 한 번 탁 친 뒤 마무리한다.
누가 이런 놀이 속 법문을 기획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박하면서도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비록 허수아비들의 입에서 나오는 알 듯 말 듯한 이야기였지만, 묘하게 여운을 남기며 끝나는 것이 이 놀이의 매력이었다.
용이 나오고 사자가 등장하고 온갖 구경거리가 펼쳐지다가 마지막에는 일곱, 여덟 살 정도의 홍동지라는 어린아이가 발가벗은 채 나타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이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자지를 어깨에 메고 나타나, 그 자지로 여기저기 치기 시작한다. 춤추고 노래하던 존재들이 맞으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법사도 맞으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 용과 사자까지 모조리 그에게 맞아 사라지고, 결국 모든 것이 없어지니 구경꾼들은 그 모습에 웃고 떠들며 야단법석을 떤다. 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숨겨진 의미는 깊다. 홍동지의 자지는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인생의 근본 문제를 상징하며, 그것은 곧 법과 지혜의 방망이를 나타낸다. 이 방망이로 맞으면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고, 절마저도 없어진다. 부처에게 휘둘러도, 조사에게 휘둘러도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지는 법의 방망이인 것이다.
높디높아 아이가 온전히 맑은 모습으로 발가벗은 채
홀로 천지 사이를 거니니 누가 나를 친구 삼으랴.
巍巍落落淨裸裸
獨步乾坤誰伴我
이 게송은 우리가 찾으려는 진정한 자성의 자리, 그 참된 본체를 바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이 곧 홍동지가 발가벗고 등장한 본질적인 이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산 울타리 머리에서 허수아비를 조종하는 모습을 보라.
밀고 당기는 모든 것이 속사람의 짓이다.
看取柵頭弄傀儡
推傘全借里頭人
속사람은 바로 사람을 움직이는 주인공이다. 우리의 춤, 노래, 움직임은 모두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작용이다. 눈이 보는 것도 귀가 듣는 것도 발이 걷는 것도 실은 모두 속사람의 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속사람을 알지 못한 채 물질에만 집착하며 매일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세상에 나왔느냐?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 바에야 더 없이 헛된 일일 뿐이다. 여러분은 고민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언제쯤 땅 아래로 내려가게 될까?"라고 말이다. 만약 칠십이나 팔십까지 산다고 해도 인생에서 육십을 넘겨보면 일 생 중 단 한 번 지나가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사십을 산 사람은 이제 남은 시간이 이십 년이고, 삼십을 산 사람은 삼십 년이 남았다며 스스로 회계를 해야 한다. 이렇게 현실을 자각해야 도를 닦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죽음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계획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소리 없는 기러기는 수많은 강 위 달빛을 날고,
돌사자는 동쪽을 향해 울어대지만
하늘의 두우별은 서쪽으로 옮겨간다.
無影雁飛千澗月
石獅東吼斗移西
용이 나오고 사자가 등장하고 온갖 구경거리가 펼쳐지다가 마지막에는 일곱, 여덟 살 정도의 홍동지라는 어린아이가 발가벗은 채 나타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이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자지를 어깨에 메고 나타나, 그 자지로 여기저기 치기 시작한다. 춤추고 노래하던 존재들이 맞으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법사도 맞으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 용과 사자까지 모조리 그에게 맞아 사라지고, 결국 모든 것이 없어지니 구경꾼들은 그 모습에 웃고 떠들며 야단법석을 떤다. 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숨겨진 의미는 깊다. 홍동지의 자지는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인생의 근본 문제를 상징하며, 그것은 곧 법과 지혜의 방망이를 나타낸다. 이 방망이로 맞으면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고, 절마저도 없어진다. 부처에게 휘둘러도, 조사에게 휘둘러도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지는 법의 방망이인 것이다.
높디높아 아이가 온전히 맑은 모습으로 발가벗은 채
홀로 천지 사이를 거니니 누가 나를 친구 삼으랴.
巍巍落落淨裸裸
獨步乾坤誰伴我
이 게송은 우리가 찾으려는 진정한 자성의 자리, 그 참된 본체를 바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이 곧 홍동지가 발가벗고 등장한 본질적인 이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산 울타리 머리에서 허수아비를 조종하는 모습을 보라.
밀고 당기는 모든 것이 속사람의 짓이다.
看取柵頭弄傀儡
推傘全借里頭人
속사람은 바로 사람을 움직이는 주인공이다. 우리의 춤, 노래, 움직임은 모두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의 작용이다. 눈이 보는 것도 귀가 듣는 것도 발이 걷는 것도 실은 모두 속사람의 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속사람을 알지 못한 채 물질에만 집착하며 매일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세상에 나왔느냐?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 바에야 더 없이 헛된 일일 뿐이다. 여러분은 고민해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언제쯤 땅 아래로 내려가게 될까?"라고 말이다. 만약 칠십이나 팔십까지 산다고 해도 인생에서 육십을 넘겨보면 일 생 중 단 한 번 지나가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사십을 산 사람은 이제 남은 시간이 이십 년이고, 삼십을 산 사람은 삼십 년이 남았다며 스스로 회계를 해야 한다. 이렇게 현실을 자각해야 도를 닦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죽음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계획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소리 없는 기러기는 수많은 강 위 달빛을 날고,
돌사자는 동쪽을 향해 울어대지만
하늘의 두우별은 서쪽으로 옮겨간다.
無影雁飛千澗月
石獅東吼斗移西
할 한 번 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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