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기바(지바카)가 의학을 10년 동안 배웠다. 그는 오랜 수련 끝에 문득 궁금증이 생겨 스승에게 물었다.
"제가 10년 동안 의학을 공부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배워야 진정한 의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말없이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좋다. 그러면 약초가 아닌 풀을 찾아오너라."
기바는 산과 들을 헤매며 약초가 아닌 풀을 찾으려 했지만 모두 약초였다. 이 풀은 이런 병에, 저 풀은 저런 병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하나하나 깨우쳐갔다. 결국 기바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못한 채 스승에게 돌아와 말했다.
"스승님, 온 산천을 샅샅이 뒤졌지만, 약초가 아닌 풀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스승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 너는 훌륭한 의사가 될 자격을 얻었구나. 떠나도 좋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에도 통한다. 모든 것은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가진 도(道)이며, 이를 깨닫기 위해 마음을 맑히고 한곳에 집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다른 고인의 일화도 있다. 소산 광인 선사가 어떤 사람이 불법(佛法)을 묻자, 그는 나무로 깎은 뱀을 들어 올리고는 "이것이 조씨의 여인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깊은 비유를 담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조씨라는 사람이 바다에서 항해하다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아내는 남편이 떨어진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그녀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며칠 뒤 그녀는 죽은 남편을 안은 채 파도에 밀려왔다. 이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통해 소산 스님은 법문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후에 자수 선사는 이 이야기에 비판적인 시를 남겼다.
헤어지는 모습은 꽃이 웃는 것만 같지 못하고
이별의 정은 무심한 대나무와 같을 수 없어라
사람들에게 공연히 조가의 여인을 말해서
서로 생각하여 병만 점점 깊게 하는구나
別面不如花有笑
離情難似竹無心
因人說看曺家女
引得想思病轉深
이후 규봉 종밀 선사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출가 전에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학습했던 사람으로, 여러 차례 과거 시험에서도 낙방했다. 좌절한 그 앞에 한 스님이 나타나, 도리어 경전을 읽어보라고 건넸다. 규봉이 원각경(圓覺經)을 읽고 크게 깨달음을 얻어 출가를 결심하며 읊은 시가 있었다.
물을 끓여서 못에 얼음을 녹이려고 부으니
얼음이 녹는 듯 하더니 끓는 물조차 다시 언다
얼음을 가마솥에 집어넣으니
비로소 바늘 끝에 겨자씨가 자연히 서로 꿰이듯 하네
投湯消池永
永堅湯亦疑
將永投釜裡
針芥合自然
이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수행과 깨달음으로 가능해짐을 상징한다.
공자와 상(商) 태재의 대화에서도 공자는 성인이란 존재에 대해 말을 아끼며 오히려 서방에서 왔던 '큰 성인', 즉 스스로 다스림과 믿음, 교화를 이루는 존재를 언급한다. 이는 공자가 이미 부처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인지했음을 암시한다.
결국 모든 도리와 깨달음은 깊은 내면의 탐구와 성찰에서 오며, 이를 통해 우리는 삶 속에서 참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 설법 또한 설법이라 이름 붙일 수는 없지만, 이는 그 자체로 설법이다. 깊이 생각하길 바라며 큰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한다.
바늘 끝에 겨자씨를 꿰는 것은 수미산에서 염부제에 바늘을 세우고 겨자씨를 던져 맞추는 일을 비유하는 것으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이처럼 수행도 여럿이 함께하면 자연히 잘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옛날 상商 태재가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성인이십니까?"
"나는 단지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할 뿐, 성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삼왕은 성인이십니까?"
"삼왕은 지혜와 용기를 잘 쓴 이들일 뿐, 성인인지 아닌지는 내 알 바 아니다."
"오제는 성인이십니까?"
"오제는 어질고 의로움을 잘 쓴 이들일 뿐, 성인인지 아닌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면 삼황은 성인입니까?"
"삼황은 정치를 잘 다스린 인물이었을 뿐, 내가 아는 바와는 다르다."
태재는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이런 분들도 성인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존재가 성인입니까?"
공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듣기로 서쪽 나라에 큰 성인이 한 분 계신데, 굳이 다스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어질게 되고, 말을 하지 않아도 믿음이 생기며, 가르침을 전하지 않아도 저절로 실천되며 탕탕무애하여 사람들은 그의 이름조차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이 말을 들어보면 공자 또한 부처님께서 큰 성인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본질을 알아야 한다. 반야 바라밀은 반야 바라밀이 아닌데, 그 이름이 곧 반야 바라밀이다. 오늘 설하는 법문 역시 설법이 아니지만, 그것이 설법이다. 이 가을에 참으로 특별한 일이 있으니 곧잘 귀기울여라.
큰소리로 할 한 번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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