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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이야기이다.

모든 일이 정성스럽게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부모 역시 자식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3년에 걸쳐 정성을 다했다. 매 닷새마다 열리는 장날에 음식을 정성껏 차려 스님을 대접했는데, 이는 스님을 부처님 삼보 가운데 존귀한 존재로 여긴 불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식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만 3년을 보내던 중, 어느 날 하인이 장날에 스님을 모셔오려 했으나 그날은 단 한 명의 스님도 만날 수 없었다. 늦은 날까지 기다리던 중, 문둥병에 걸려 얼굴과 사지가 상한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하인은 그를 데리고 갈지 망설였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 그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둥병 스님을 대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주인에게 상황을 전하자, 주인은 기쁨으로 영접하라 지시했다.

스님이 집 안으로 들어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는 피와 고름이 떨어졌지만, 주인은 전혀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숟가락, 젓가락, 그리고 음식에 피와 고름이 섞였지만 주인은 여전히 변색하지 않고 친절히 대접했다. 음식을 다 먹은 스님은 집주인에게 말했다.

“다른 곳에 가서 이곳에서 대접받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는 다른 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스님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에 경사가 찾아왔다. 주인의 부인이 아이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다. 문수보살 덕분에 아이를 얻었다고 여기며 아이의 이름을 문수라 지으려 했지만, 성인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기에 ‘뛰어날 수(秀)’ 자로 변경하여 박문수라 이름 지었다. 문수보살의 축복으로 태어난 아들은 비범한 재능과 지혜를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박문수는 후에 나라로부터 암행어사의 직책을 맡아 전국을 순찰하며 민중의 고충을 직접 조사하였다. 억울한 일을 해소하고, 선정을 펼쳐 백성들에게 존경받았다.

박 어사는 한때 오대산에서 수양을 겸해 3개월간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그가 일반 과객처럼 보였기에 사람들은 그의 신분을 알아채지 못하고 함부로 대했다. 스님들마저 박 어사를 소홀히 대하며 부려먹었고, 이에 박 어사는 마음속으로 불만이 쌓였다. 그는 이후 사찰들에 큰 공사들을 지시하여 불교계에 어려움을 주었다.

당시 대구 팔공산의 파계사에 살던 용파대사는 사찰의 고충을 해결하고자 결심하며 한양으로 나아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의 목적은 권력 있는 대신과의 연줄을 통해 사찰 공사를 중지시키는 것이었다. 가난한 형편에서도 한강 물을 길어 민간에게 팔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결국 여러 해 후에 궁중의 명령으로 어전에 나아가 정조대왕을 알현하게 되었다.

정조대왕은 용파대사를 만나 그의 사정을 듣고 사찰이 겪고 있는 공사를 중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더불어 자신의 어린 나이에 아직 후계자가 없음을 괴로워하며 대사에게 전국 명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용파대사는 수락산 내원암에서 기도를 시작했고, 그의 동료 농산 스님 또한 금선암에서 기도에 동참하게 되었다.

70일간 간절히 기도한 끝에 용파대사는 선정(禪定) 중에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작은 나라였지만, 그곳에는 임금 자리의 주인이 될 만한 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이 망상과 진뇌로 가득 차 있었고, 남을 해하려는 마음이 넘쳐나 세자로 삼을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나라의 임금에 필요한 인연을 성취하려면 자신이 죽거나, 아니면 농산이 죽어야만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기유년(己酉年) 2월 20일, 용파대사는 농산 스님에게 편지를 전했다.

편지의 서두에서 안부를 묻고 노고를 위로한 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제가 기도 중 선정에 들어 관찰해 보니, 사람들이 모두 육신에 속한 범상한 마음으로 가득하고 망상과 진뇌가 많아 세자가 될 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제가 죽거나 아니면 스님께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본사(本寺) 일로 인해 그 일을 할 수 없으니, 화상께서 자비의 마음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라 임금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만 백성을 위해, 불교를 위해 그 길을 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낸 용파대사는 농산 스님이 이를 받아들이길 희망했다. 편지를 받은 농산 스님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기도를 하던 중 이를 읽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씨앗을 심었는데, 이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열매가 이미 다가왔구나."  
그리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제가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은 대도를 성취하여 사람과 천상의 눈과 지혜가 되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나라의 임금의 자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 씨앗을 뿌렸고, 그 과보(果報)가 도래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기도 회향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용파대사는 농산 스님의 회신을 정성껏 보관하며 회향의 날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회향일 저녁 농산 스님은 자신의 방에서 홀로 "사십 년을 어찌 망건을 쓰고 있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렸다. 이는 자신의 죽음 이후 사십 년간 왕 노릇할 것을 예견하며 남긴 한마디였다. 이 말은 곁에서 상좌가 직접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날 밤, 농산 스님은 고요히 입적했다. 사전에 농산 스님은 정조대왕과 그의 왕비의 꿈속에 현몽하면서 자신이 태어날 것을 미리 알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농산 스님의 입적 소식이 임금에게 전해졌다. 임금은 매우 놀라며 용파대사를 불러 들인 후 말했다.  
"오늘이 바로 나라를 위한 위축기도 회향일이라 하였는데, 농산 대사가 입적했다니 이런 불행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에 용파대사는 자신이 직접 농산에게 보낸 편지와 농산으로부터 받은 회신 두 장을 임금 앞에 내놓으며 설명했다.  
"이 두 편지만 보시면 모든 사연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은 두 편지를 읽고 나서 모든 상황이 분명해졌다. 한 편지에서는 목숨을 바치겠다는 내용이 있었고, 다른 편지에서는 회향일에 만나자는 답신이었으며, 더불어 꿈에서 이미 왕비와 함께 환생의 징조를 명확히 본 것을 기억해냈다. 임금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 이듬해 경술년(庚戌年), 결국 세자가 태어났다. 이름은 공(蚣)이고 자는 공보라 했으니, 이 인물이 자라 왕위에 올라 순조대왕(純祖大王)이 되었다.

이 내용을 전하게 된 이유는 사람이 죽은 뒤 어디로 가는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지, 혹은 환생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 알리기 위함이다. 특히, 과거에도 환생에 관한 사례가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있었던 한 사례를 소개하며 여러 사람들의 의문을 해소하려는 목적이 있다.

서로 만나서 누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묻는가
산은 절로 높고 물은 절로 깊네
相逢誰問還家路
山自高兮水自深

할 한 번 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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