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④
상원이 우송된 편지들을 가져오면서 방문을 열자, 눈보라가 방안으로 들이쳤다. 잠시 멎었던 눈이 눈보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명담스님은 빈 찻잔을 하나 들며 상원도 앉아 차를 마시라고 말했다.
“차 한 잔 하거라.”
“방금 원주실에서 신도님들과 몇 잔이나 마셨습니다.”
“상원 수좌는 아직도 차 마시는 양과 수행이 비례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군 그래.”
명담스님의 말에 상원은 허리를 굽혀 엉거주춤하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명담스님이 허허허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김 화백님, 우리 노장님은 이미 22년 전에 입적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노장님을 어찌 불러내어 그리시겠습니까.”
“우선은 큰스님의 행장을 따라 답사해 볼 생각입니다. 큰스님의 중요 상좌 분들도 만나 볼 생각이구요.”
“그거야 당연한 수순이지요.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어찌 노장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마음속으로만 들어가면 꽃을 다투어 피어나게 하고, 구름이 일고 비가 오게 하고, 온갖 낙엽이 지게 하고, 서리와 눈이 오게 하는, 말하자면 신통 묘용한 산신의 부채는 저절로 얻어질 것입니다. 김 화백님의 붓이 산신의 부채가 된다면 노장님은 반드시 진영을 방편 삼아 환생하시고 말 것입니다.”
명담스님은 석정이 경봉스님에게 대답한 게송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경봉스님의 마음속으로만 들어가면 김 화백의 붓도 신통 묘용해진다는 의미나 진배없었다.
“상원아, 너는 앞으로 김 화백님이 답사할 노장님의 인연 터를 안내하거라. 자, 이제 너에게는 할 말이 더 없으니 나가보아라.”
상원을 주저앉힌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 화백은 결코 수행자인 상원을 앞세워 답사할 생각은 없었다. 경봉스님의 인생행로를 따라 혼자 사색하며 오롯하게 떠돌아다니고 싶었다.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데 극락암에서 하룻밤 더 묵어가야 하실 것 같습니다.”
“이왕 극락암에 왔으니 이번 기회에 통도사의 암자들을 순례할 생각입니다.”
“거, 좋은 생각입니다. 저 위의 백운암은 경허선사가 계시면서 통도사에 스님의 발자국을 흘렸고, 바로 옆 비로암은 저보다 더 오랫동안 노장님을 모시고 산 노승이 지금도 계시고, 저 아래 자장암에는 노장님이 지은 시가 주련에 걸려 있습니다. 또 향곡 선사가 계셨던 선방 백련암에도 노장님의 상좌가 주지로 있습니다. 이번에 그분들만 만나 보아도 소득이 아주 클 것입니다.”
김 화백은 이제 명담스님에게 돌려줄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양복 안 호주머니에서 합죽선을 꺼냈다.
“스님, 이제 이 합죽선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더구나 경봉스님께서 몇 십 년 동안 소중하게 소장했던 유물이라 하니 큰스님 유물 전시관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명담스님은 합죽선을 받아 이리 저리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 합죽선은 노장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진품이 확실합니다. 글씨도 노장님의 친필이 맞고요.”
“제가 대학원 시절에 직접 받은 것이니까요.”
그런데 명담스님은 뜻밖에도 김 화백에게 합죽선을 되돌려주려 하고 있었다.
“김 화백님, 이 합죽선을 지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불가에는 활구(活句)가 있고 사구(死句)가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활구도 되고 사구도 됩니다. 그렇듯이 이 합죽선도 유물 전시관에 들어가면 죽은 유물이 돼버리고, 김 화백님이 가지고 계시면서 산 정신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활인검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경봉 노장님께서 김 화백님께 이 합죽선을 준 뜻도 거기에 있을 터입니다. 그러니 노장님의 진영이 끝났을 때 저에게 돌려주어도 늦지 않습니다.”
문득 명담스님이 내밀고 있는 합죽선이 김 화백에게는 화두가 된 느낌이었다. 경봉스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자물쇠의 비밀 번호가 돼버렸다. 김 화백은 머쓱한 얼굴로 합죽선을 되돌려 받으면서 내심으로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나무랐다.
“자, 김 화백님.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상원이 안내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혼자 다니겠습니다.”
“상원을 길동무로 붙이는 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상원이 자청했습니다.”
“뭐라고요?”
“노장님의 법문집을 읽고 감동해서 출가한 상원입니다. 그러니 이 일이 어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진영을 그리는 데 상원이 일조할 것입니다.”
김 화백은 더 이상 거절을 못했다. 단순한 안내가 아니라 상원도 자신의 구도를 위해 경봉스님을 징검다리 삼고 싶어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은사에게 미리 부탁했다니 김 화백은 상원을 낙심시키고 싶지 않았다.
“스님, 답사는 스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스님이 첫 계단이 되어주십시오.”
“하하하. 좋습니다만 약속을 하나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경봉 노장님과의 내 인연담을 말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지금 법당으로 가셔서 108배를 하십시오. 절을 하면서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인과의 도리를 조금은 체험하고 오십시오. 다만 그것뿐입니다.”
김 화백은 별 수 없이 마당에 쌓인 눈을 밟으며 법당으로 갔다. 108배는 대학원 시절에 많이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나 명담스님의 선기(禪機)에 압도당해 얼떨떨함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명담은 김 화백이 절을 하는 동안 그에게 얘기해 줄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려고 했다. 김 화백은 절을 20배쯤 했을 때 문득 경봉스님이 떠올라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학 교수실을 찾아온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김 화백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 텅 빈 법당이었으므로 법당 천정이 메아리칠 만큼 큰소리로 웃었다. 고성의 수도원에서 수녀들이 경봉스님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수녀들이 경봉스님을 만나고 싶은 것은 당시 고승들 중에서 가장 도력이 높고 인자한 스님으로 소문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님은 삼소굴로 수녀들을 불러들이고 난 후 침묵을 했다. 수녀들은 스님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도무지 말할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10분이 흐르고 다시 20분이 흘렀다.
그래도 스님의 말이 없자 초조해진 나이 든 수녀가 법문을 청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바로 그때 스님이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다소곳이 인내하며 앉아 있던 수녀들이 가슴을 움켜쥐며 혼비백산하여 ‘에구머니나!’ 하고 비명을 질렀다. 빈대 똥이 드문드문 묻어 있는 벽 쪽으로 도망치듯 물러난 어린 수녀도 있었다. 그제야 스님이 능청맞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도하는 분들이 무얼 그리 놀라십니꺼.”
스님의 미소에 안도하며 늙은 수녀가 말했다.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 정도 고함에 놀라면서 수도한다고 할 수 있십니꺼. 하긴 사자가 포효하면 여우 고막이 찢긴다는 말이 있십니더.”
이후 스님을 만난 수녀 중 한 명은 이 말이 화두가 되었다고 한다. 기도하면서 곤경에 처할 때마다 스님의 그 말씀이 놀라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말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스님이 수녀들에게 한 법문은 무엇을 하든 목숨 걸고 하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일상생활, 밥 먹고 옷 입고 하는 온갖 것이 도(道) 아님이 없다. 정신을 한 곳에 모아서 무사무념(無思無念), 그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 예전에 고인(古人)의 기연(機緣)이 하나 있다. 소산 광인(疎山 光仁) 선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누가 불법을 물으면 ‘나무로 깎은 뱀’을 들어보이고는
- 이것이 조가(曹家)의 여인이니라. 하고 말했다. ‘나무로 깎은 뱀’을 들어 보이는 것이 소산 선사의 유일한 법문이었다. 소산 선사가 그러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씨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그만 풍랑을 만나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조씨 부인에게 가서 ‘당신 남편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그 부인이 애통해 하며 남편이 빠져죽은 바다까지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다.
할 수 없이 그 사람은 조씨 부인을 데리고 조씨가 빠져죽은 바다로 데리고 나갔다. 그런데 그 부인마저 그 바다에 손살같이 뛰어내려 사라지고 말았다. 조씨 부인을 발견한 것은 사흘이 지난 후였다. 한 바닷가에 조씨의 부인이 자기 남편을 끌어안고 파도에 떠밀려 와 있는 것이었다. 망망대해인데 어디 가서 죽은 남편을 껴안고 나왔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노릇이었다. 소산스님이 공연히 나무뱀을 들고 ‘이것이 조가의 여인이니라’ 한 것이 아니라 조가의 아낙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기 남편의 송장을 껴안고 바닷가에 떠밀려온 그것을 말한 것이다. 송장이 가서 송장을 찾아 안고 떠밀린 뜻은 거기에 있다. 소산스님의 설법에 자수(慈受)선사라는 분이 착어(着語)를 달았다.
헤어지는 모습은 꽃이 웃는 것만 같지 못하고
이별의 정은 무심한 대나무와 같을 수 없어라
사람들에게 공연히 조가의 여인을 말해서
서로 생각하여 병만 점점 깊게 하는구나.
소산스님의 나무뱀 이야기에 대하여 한 방망이 준 것인데, 방망이를 준 곳은 어디인가? 그것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송장이 송장을 끌어안고 바닷가에 떠밀려 와 있었겠는가. 목숨을 걸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다는 소산선사의 법문이리라. 불법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걸면 결코 불(佛)을 이루지 못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는가. 그림 그리는 흉내만 내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헛산 것이다. 허깨비로 산 것이나 다름없다. 유령처럼 떠돈 것일 뿐이다.
김 화백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배우가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듯 웃다가 금세 울고 있었다. 진영을 그리려면 조가의 여인처럼 간절해야 한다. 송장이 송장을 끌어안고 바닷가로 떠밀려 와 있듯 목숨을 걸어야 한다. 김 화백은 이를 악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조가의 여인처럼 목숨을 걸면 죽은 경봉스님이라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훗날 경봉스님은 극락암의 한 제자에게 조가의 여인보다 더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충무에 살던 어부 부부의 일화인데 남편은 날마다 고기잡이를 하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어부에게는 발밑이 저승이었다. 하루는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다 잘못하여 그만 바다에 빠져죽고 말았다. 함께 고기잡이하던 어부가 부인에게 가 사실을 말하니 그 부인은 아무 말도 묻지 않더니 바다로 걸어들어 가버렸다.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준 어부가 만류할 틈도 없었다. 부인은 며칠 후에야 죽은 남편을 껴안고 바닷가로 떠밀려 나왔다.
조가의 여인은 남편이 죽은 바다를 물어서 알고 뛰어들었지만 충무의 아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망무제의 바다로 걸어 들어가 죽은 남편을 찾아내었으니 더 불가사의한 것이다. 망나니에 얽힌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야기 역시 조가의 여인보다 신비스러운 것으로 경봉스님이 제자들에게 히히히 웃으며 틀니를 드러내곤 했었다. 옛날에는 역적모의에 가담하여 발각되면 구족(九族)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어린 조무래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한 망나니가 차마 어린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양부처럼 데리고 있다가 어른이 되면 죽이겠다고 관아에서 허락을 받았다. 자라면서 망나니와 아이는 서로 정이 들었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양부 손에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는 양부에게 사정했다.
-아버지.
-왜?
-저를 죽이지 마셔요.
-오냐 오냐. 귀여운 내 자식을 어찌 죽이겠느냐. 세월은 흘러 아이를 죽이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관아와 약속한 참수형 집행일이 다가온 것이었다. 아이가 눈치 채고 양부에게 애걸했다.
-아버님, 저를 죽이지 마셔요. 망나니는 소년을 죽이지 않으려고 꾀를 냈다.
-내가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출 때, 나를 똑바로 보고 있거라. 그러면 내가 눈을 찡끗 할 테니 그때 도망가거라. 소년은 형 집행일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서는 양부가 시킨 대로 했다. 양부의 눈이 찡긋거리자 도망을 친 것이다. 소년은 멀리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몇 년 후에는 몸을 의탁한 집의 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았다. 어느 날 어른이 된 그는 양부의 은혜를 못 잊어 조랑말에 선물을 가득 싣고 찾아갔다. 그는 늙어버린 양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아버님, 제가 왔습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그러나 양부는 당달봉사처럼 눈을 뜨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네가 누구인데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냐.
-아버님은 저를 살려주신 은인이십니다. 은혜를 보답하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망나니는 그래도 꿈속의 일인 것처럼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이상도 하구나. 그때 나는 분명히 너를 목을 쳐 죽였는데 말이다. 망나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흐물흐물 형태가 무너지더니 마침내 연기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른바 몸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유체이탈(幽體離脫)이었다. 그러니 조가의 여인보다 더욱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법당 문이 화닥닥 열어젖혀졌다. 누군가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열렸다. 눈보라는 여전히 거친 바람을 타고 휘날리고 있었다. 눈가루가 법당 안으로 무법자처럼 침입해 들어왔다.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사라진 사람은 바로 명담스님이었다. 그는 김 화백이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법당 뒤편의 솔바람 소리는 파도가 날뛰며 허공을 물어뜯는 소리와 흡사했다.
우우우 우우우우-.
원광재 끝방으로 다시 돌아와 문을 닫자, 밖의 세상은 무성영화처럼 눈보라치는 소리가 죽어버렸다. 문득 김 화백은 명담스님과 함께 무거운 돌처럼 심연으로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다관을 잡은 명담스님의 손놀림이 찻잔 사이로 무심히 이어졌다. 명담스님은 차를 천천히 따르며 좀 전에 약속한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것은 명담스님만의 얘기는 결코 아니었다. 경봉스님의 몽타주를 한 부분 한 부분 그려가는 소묘와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해인사에 입산하였을 때는 50년대 말이었습니다. 17살에 김포를 떠나 해인사로 갔지요. 그때 해인사에는 노사님들이 여러 분 계셨는데 금봉(錦峰), 응선(應禪), 고봉(高峰) 같은 스님들이었지요. 당시 퇴설당 선방에는 10여 명이 있었고 입승은 덕현(德玄)스님이었습니다. 광채나는 눈빛으로 후원에 와서 손가락질하며 애매모호한 표현을 하던 덕현스님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공부가 무르익어 그랬는지 뒤에 경봉스님께서도 덕현스님의 견처(見處)를 관심 있게 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해 겨울에는 법정과 고은 수좌도 안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소밭에서 고소를 뜯고 있는데 연산스님이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고?’하며 저에게 애정을 보여주신 연산스님도 계셨는데, 그 스님은 저에게 경봉스님을 안내해 주셨던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18살에 야반도주하여 삼소굴로 왔지요. 경봉스님은 그때 69세이셨습니다.”
경봉은 무테 돋보기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어린 명담을 자상하게 맞아주었다. 손도 만져보고 어깨도 두드려보고 집안 사정도 시시콜콜하게 물으며 어린 명담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명담은 따뜻하게 이리 저리 살펴보는 경봉의 눈길에서 이런 말을 읽을 수 있었다.
-이놈아가 와 이제 왔노. 고승에 대한 경외심으로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한 어린 명담에게 경봉은 과분한 덕담을 하고 있었다.
-니는 전생에 많이 닦았으니까 이승에는 조금만 더 닦으면 되겠다. 며칠 후에는 사미계를 내려주었다. 명담은 일진(一眞)과 함께 경봉스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런데 경봉스님의 첫 마디는 비로소 석가모니 부처의 후예가 된다는 자부심에 부풀어 있던 명담에게는 놀랍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나 경봉은 천하가 다 아는 대처다. 그래도 사미승이 된 명담과 일진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훗날의 명담은 그때가 다시 반복된다면 ‘영감이 뭐 장가 간 것 가지고 자랑하는가’ 하고 찔러보았을 터였다. 일진도 잔뜩 얼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중물이 든 일진은 경봉을 흉내 내곤 하여 사람들을 곧잘 웃길 만큼 장난기가 넘쳤는데 그때는 보리자루처럼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날 경봉스님에게 들은 첫 법문은 이랬다.
‘울산 태화강 건너편으로 사람들이 장을 보러 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배가 뒤집혀 사람들이 죽은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소식을 들은 어느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아범이 어찌 됐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일렀다. 그러자 며느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버님, 배탄 장꾼들이 다 죽었어도 그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 그 사람을 잘 압니다. 강물이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 빠져도 살아나올 그 사람입니다. 과연 남편은 실제로 살아 돌아왔다. 아버지가 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연 며느리의 이야기가 맞았다. 아들은 물살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끼고는 상투를 풀어 머리카락이 흐르는 반대방향으로 헤엄쳐 나왔다는 것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 장꾼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고서 급류에 휩쓸려 죽지 않았던 것이다. 짧은 법문 끝머리에 경봉은 사미승이 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서는 마무리를 지었다.
-니들이 강물에 빠져서 흐르는 머리카락을 보고 헤엄쳐 나올 정도면 대처(帶妻)든 취처(娶妻)든 상관없으니 중노릇 잘하면 그만인 거라. 이를테면 걸림 없이 잘사는 도리를 알아 중노릇 멋들어지게 하라는 법문이었다. 사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여자를 취하더라도 여자에 죽지 않고 술을 마시더라도 술에 죽지 않는다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무애의 경지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무애가 어찌 쉽게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겠는가. 꿈을 깨지 못한 수행자가 막행막식(莫行莫食)한다면 저잣거리의 중생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었다. 경봉은 늘 극락암의 시자(侍者)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경책하곤 했다.
-소금이 바닷물에 나지만 물에 들어가면 녹으며, 봄이 오면 비바람으로 꽃을 피우지만 또 비바람에 의해 꽃이 지고, 여인의 몸에서 사람이 태어나지만 여인에 의해서 스러진다. 명담스님은 찻잔 속에서 스승 경봉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맑은 차를 응시한 채 김 화백을 아예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말을 할 때도 찻잔 속의 찻물을 보고 말했다.
“노장님께서는 누가 찾아오면 꼭 묻는 말이 있었습니다.”
“노장님께서 던지는 화두였군요.”
“그렇습니다.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무슨 말인지 잘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돌아가려고 했지요. 그러면 또 말씀하지요. ‘대문 밖을 나서면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미끄러져 옷도 버리지 말고 잘들 가라’고요.”
“하지만 스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물에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것쯤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노장님의 평생 공부가 다 거기에 들어 있다고 봐야 옳습니다.”
명담스님이 가볍게 도리질하며 그제야 김 화백을 보았다. 그러면서 명담스님은 꿈에서 깬 자의 진리는 결코 밥 먹고 잠자고 똥 누는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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