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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을 시작하려 했지만 막상 할 말을 찾기 어렵다.  

정법안장의 진리는 마음이 머무는 곳을 소멸시키고, 말의 흐름을 단절하게 하며, 모든 이름과 형상에서 벗어난 참된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깊고도 묘한 이치를 입으로 아무리 길게 설명해도 그저 말일 뿐이고, 글로 아무리 많이 써 내려가도 다만 글자일 뿐이다. 이를 비유하자면,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의 참맛을 아무리 말로 표현하려 해도 온전히 전하기는 어려우며, 장미 향기를 맡아도 그 향기를 글로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도 49년간 설법을 펼치셨지만, 마지막에는 다자탑 앞에서 침묵하며 가섭 존자와 자리를 나란히 하셨다. 또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가섭 존자는 그저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열반에 드실 때에도 니련선하 강가에서 곽밖으로 발을 내보이셨을 뿐, 다른 말은 없으셨다.  

유마거사는 32명의 대보살들과 더불어 설법과 문답으로 논했지만, 궁극의 불이법(不二法)에 이르러서는 말을 멈추고 침묵하는 것으로 전달했다.  

이 법은 입을 열어서 설명하면 본래의 의미를 잃고, 말을 닫으면 전달되지 않으며, 열지도 닫지도 않으면 만 리를 벗어난다고 한다. 그 깊은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법은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두 눈이 서로 마주하는 순간에 담겨 있다. 또한 삼라만상 어디에나 법이 있으며, 중생의 일상 속에서도 법문이 깃들어 있다. 우리의 일상적 동작, 가고 오며 물건을 쥐고 놓는 데서도 선(禪)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에 매이지 않고 넘어가야 한다. 비록 심오한 진리를 설파하거나 묘한 경지를 논한다 하여도, 그것은 결국 더러운 물을 퍼내는 행위와 같으며, 방망이질하며 소리치는 것 또한 갈증 난 이에게 소금을 건네는 격이다.  

금조차 불에 들어가야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금이 되어 세상에서 가치를 발휘하듯, 사람의 마음도 수련과 정화를 통해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심을 벗어나야 한다. 팔만사천의 번뇌망상이 모두 보리로 변하여 마음이 밝고 투명해지고, 맑은 거울처럼 본질에 깨어 있어 흐림 없는 지혜로 머물게 된다. 그러한 마음은 허공에 걸린 거울처럼 삼라만상을 반영하며, 이는 무엇이라 단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경지이다. 이를 깨달으면 비로소 법에 자유롭고 이치에 통달한 참된 대장부가 될 것이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놋쇠 눈동자와 철 같은 눈으로 세상을 투명히 보라.  

길 위를 걷는 사람 위로 떨어지는 망석두여.  
맑은 음율로 울리는 노래가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듣고 기억될 수 있을지.  
동해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달빛 감추기는 어렵고,  
영축산이 아무리 깊어도 그 추위는 배어온다.  

동해 바다 넓어 달을 감추기 어렵고  
영축산 깊어 추위가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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