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불승(一乘)
부처님께서 승만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일체 여러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바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이제 다시 말하라.”
승만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바른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곧 대승이니, 그 까닭을 말하면, 대승은 온갖 성문(聲聞)과 연각(緣覺)과 세간 선법과 출세간 선법을 내는 까닭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아뇩대지에서 여덟 개의 큰 강의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대승은 모든 성문, 연각과 세간, 출세간의 선법을 낳습니다.
세존이시여, 또 마치 온갖 씨앗이 모두 땅을 의지하여 나서 자라듯이, 온갖 성문과 연각과 세간 선법과 출세간 선법이 대승을 의지하여 자랍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대승에 머물러서 대승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곧 2승(乘)에 머물러서 2승과 세간 선법과 출세간 선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세존께서 6처(處)를 말씀하심과 같사오니, 6처란 것은, 바른 법이 머무는 것, 바른 법이 없어지는 것, 바라제목차·비니·출가·구족계(具足戒)를 받는 것들입니다. 대승을 위하여 이 6처를 말씀하셨으니, 그 까닭을 말하면, 바른 법이 머문다는 것은 대승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므로 대승이 머무는 것이 곧 바른 법이 머무는 것이며, 바른 법이 없어진다는 것은 대승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므로 대승이 없어지는 것이 곧 바른 법이 없어지는 것이며, 바라제목차와 비니의 두 가지는 뜻은 한 가지면서 이름만 다른 것이니, 비니는 곧 대승의 학문입니다.
그 까닭은 부처님을 의지하여 출가하였고, 그리하여 구족계를 받는 것이므로 대승의 위의(威儀)인 계가 곧 비니이며 출가며 구족계를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일이 없사오니, 왜냐하면 아라한은 여래를 의지하여 출가하였고, 또 구족계를 받는 까닭입니다.
아라한은 부처님께 귀의하였으며, 아라한은 공포가 있는 것이니, 그 까닭을 말하면, 아라한은 온갖 것에 대한 행이 없으며 두려워하는 생각에 머무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와서 나를 해하려 함과 같으므로 아라한은 끝까지 즐거움이 없나이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세존이시여, 의지할 데를 구하지 않는 이에게 의지하는 것인데, 저 중생들은 의지한 데가 없으므로 가는 데마다 공포하는 것이고, 공포함으로써 의지할 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아서 아라한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므로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벽지불은 다른 생에 나는 일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일이 있으며, 다른 생에 나는 청정한 수행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순일하지 못하고, 일이 끝나지 못하였으므로 지어야 할 것이 있고, 다른 것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끊어야 할 것이 있으며, 끊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열반세계와는 거리가 머나이다.
그 까닭을 말하면, 오직 여래·응공·정등각(正等覺)만이 반열반(般涅槃)에 들 수 있사오니, 온갖 공덕을 모두 성취한 까닭이며, 아라한·벽지불은 온갖 공덕을 성취하지 못하였지마는, 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에 들 수 있사오니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한 까닭이며, 아라한·벽지불은 한량 있는 공덕을 성취하였지마는, 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을 얻었사오니 불가사의한 공덕을 성취한 까닭이며, 아라한·벽지불은 생각할 수 있는 공덕을 성취하였지마는 반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을 얻었사오니 온갖 끊어야 할 허물을 모두 끊어버리고 제일가는 청정을 성취한 까닭이며, 아라한·벽지불은 남은 허물이 있으므로 제일가는 청정이 아니지마는 열반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오직 여래만이 반열반을 얻으시어 온갖 중생들의 우러러봄이 되어 아라한·벽지불 보살들의 경계에서 초월하였사오며, 아라한·벽지불은 열반계와의 거리가 멀지마는, 아라한·벽지불이 해탈하는 네 가지 지혜의 끝간 데를 관찰하여 소생하여 쉴 곳(蘇息處)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역시 바로 여래의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며, 아직도 끝까지 이르지 못한 말씀입니다.
그 까닭을 말씀드리면, 두 가지 죽는 것이 있사오니,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하면, 하나는 분단(分段)으로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사의하게 변화하고 바뀌어서 죽는 것입니다. 분단으로 죽는 것은 허망한 중생을 말함이요, 부사의하게 변화하고 바뀌어서 죽는 것은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대보살들의 마음대로 태어나는 몸으로부터 위없는 보리에 이르기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죽는 것 중에 분단으로 죽는 것이 없어졌으므로 아라한·벽지불의 지혜를 일러서 나의 나는 일이 다하였다 하고, 남음이 있는 과(有餘果)를 증득하였으므로 범행(梵行)이 이미 섰다 하였고, 범부인 인간 사람·천상 사람으로는 이루지 못한 것이고, 일곱 가지 학인(學人)들로는 앞서 끊지 못하였던 허망한 번뇌를 끊었으므로 지을 것을 이미 이루었다 하였고, 아라한·벽지불의 끊은 번뇌로도 다시 뒤의 몸(後有)을 받지는 아니하므로 뒤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였을망정 온갖 번뇌를 모두 끊었고, 온갖 받을 몸을 모두 다하였으므로 뒤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아니니, 왜냐하면 어떤 번뇌는 아라한·벽지불로는 끊지 못할 것이 있는 까닭입니다.
번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주지(住持)번뇌와 기(起)번뇌입니다. 주지번뇌에 또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욕애(欲愛)주지·색애(色愛)주지·유애(有愛)주지며, 이 네 가지 주지번뇌가 온갖 기번뇌를 일으킵니다. 기번뇌란 것은 찰나의 마음과 찰나에 서로 통하는 것이지마는, 세존이시여, 심불상응(心不相應)하는 것은 시작이 없는 무명주지(無明住持)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주지의 힘이 온갖 상번뇌(上煩惱)의 의지할 데며 종자이지만, 무명주지에 비하면 산수나 비유로 미칠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아서 무명주지의 힘은 저 네 가지 주지의 힘보다 매우 큽니다. 마치 악마 파순(波旬)이 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서는 그 빛깔과 힘과 목숨과 권속과 여러 가지 도구가 가장 자재하고 뛰어나듯이 이 무명주지의 힘은 저 네 가지 주지의 힘보다 매우 크며,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상번뇌의 의지할 데가 되며, 또 네 가지 번뇌로 하여금 오래오래 머물게 하므로,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지혜로는 끊을 수 없고, 다만 여래의 보리의 지혜라야 끊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무명주지의 힘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또 마치 번뇌(取)의 연(緣)과 유루업(有漏業)의 인(因)으로 삼계(三界)를 내는 것같이 무명주지의 연과 무루업(無漏業)의 인으로 아라한·벽지불·대력(大力) 보살들의 세 가지 의생신(意生身)을 내는 것이니, 이 세 가지 지위와 저 세 가지 의생신이 나는 것 및 무루업의 나는 것이 모두 무명주지를 의지하는 것이므로 연이 있는 것이고, 연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의생과 무루업(無漏業)이 모두 무명주지를 반연한다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유애주지(有愛住地) 등 네 가지 주지는 무명주지로 업이 같지 않나이다.
무명주지를 여의는 것은 네 가지 주지를 여의는 것과는 달라서 부처님 자리에서 끊는 것이며, 부처님의 보리(菩提) 지혜로 끊는 것입니다. 그 까닭을 말하면, 아라한·벽지불은 네 가지 주지는 끊었으나 무루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재한 힘을 얻지 못하였으며, 증득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무루를 끊어내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 무명주지를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최후신(最後身) 보살은 무명주지에 덮였으므로 저 여러 가지 법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므로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끊지 못하였으므로 허물이 남은 해탈이라 이름하고, 온갖 허물을 여읜 해탈이 되지 못하므로 나머지가 있는 청정이라 이름하고, 온갖 청정이라 하지 못하며, 남음이 있는 공덕을 성취하였다 이름할지언정, 온갖 공덕을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남음이 있는 해탈과 남음이 있는 청정과 남음이 있는 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남음이 있는 고(苦)를 알았고, 남음이 있는 집(集)을 끊었고, 남음이 있는 멸(滅)을 증득하였고, 남음이 있는 도(道)를 닦았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일부분 열반(少分涅槃)을 얻었다 합니다. 일부분 열반을 얻은 이는 열반의 경지를 향하는 것이라 합니다.
만일 온갖 고를 알고 온갖 집을 끊고 온갖 멸을 증득하고 온갖 도를 닦았으면, 무상하게 망가지는 세간과 무상하게 병나는 세간에서 항상 머무는(常住) 열반을 얻은 것이며, 보호할 이가 없는 세간과 의지할 데가 없는 세간에서 보호할 이가 되고 의지할 데가 됩니다.
그 까닭을 말하면, 법에는 낫고 못함이 없기 때문에 열반을 얻었으니, 지혜가 평등하므로 열반을 얻었고, 해탈이 평등하므로 열반을 얻었고, 청정이 평등하므로 열반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이란 것은 한맛이며 평등한 맛이라 하나니, 해탈 맛을 말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이는 한맛과 평등한 맛을 얻지 못한 것이니, 명(明)의 해탈 맛을 말함입니다. 그 까닭을 말하면,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끝내지 못한 이는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을 끊지 못하였고 끝내지 못하였으니,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법과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였고, 마땅히 증득하여야 할 것을 증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주지가 쌓여서 온갖 수도하는 자리에서 끊을 번뇌와 상번뇌(上煩惱)를 내니, 저것이 마음의 상번뇌와 지(止)의 상번뇌와 관(觀)의 상번뇌와 참선의 상번뇌와 정수(正受)의 상번뇌와 방편의 상번뇌와 지혜의 상번뇌와 과(果)의 상번뇌와 득(得)의 상번뇌와 힘(力)의 상번뇌와 무외(無畏)의 상번뇌를 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상번뇌는 여래의 보리 지혜로 끊을 것이니, 이 온갖 것이 모두 무명주지를 의지하여 세워진 것이며, 온갖 상번뇌가 일어나는 것도 모두 무명주지로 인한 것이며, 무명주지를 반연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으로 일으킨 번뇌는 찰나의 마음이 찰나에 서로 통하는 것이지만, 세존이시여, 심불상응(心不相應)하는 것은 시작이 없는 무명주지입니다.
세존이시여, 또 여래의 보리 지혜로 끊을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법은 모두 무명주지로 유지되는 것이며, 세워진 것이니, 마치 온갖 종자가 모두 땅을 의지하여 나서 세워지고 자라는 것이므로 만일 땅이 망가지면 저것들도 따라서 망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여래의 보리 지혜로 끊을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법은 모두 무명주지를 의지하여 나서 세워지고 자라는 것이므로 만일 무명주지가 끊어지면 여래의 지혜로 끊을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법도 모두 따라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온갖 번뇌와 상번뇌(上煩惱)가 끊어지면 여래께서 얻으신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온갖 법을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고, 온갖 지견(知見)이 온갖 허물을 여의고 온갖 공덕을 얻으며, 법의 왕이신 부처님께서 자재함을 얻어 온갖 법에 자재한 지위에 오릅니다. 그러므로 여래·응공·등정각(等正覺)께서 사자후 하시기를, ‘나의 나는 일이 이제 끝났고, 범행(梵行)이 이미 성취되었고, 지을 일을 이미 지어 마쳤고, 뒤의 몸(後有)을 받지 아니한다’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사자후로 올바른 이치를 의지하여 수기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뒤의 몸을 받지 아니하는 지혜에 두 가지가 있사오니, 여래께서는 위없는 방법으로 네 가지 악마를 항복 받고 일체 세간에서 뛰어나 온갖 중생들의 어려움을 받으시는 것이며, 부사의한 법신을 증득하여 온갖 지혜를 낼 만한 경계에서 걸림이 없이 법에 자재함을 얻으시며, 이 위에 더 지을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는 지위에서 10력(力)이 용맹하사 제일 위없고 두려움 없는 지위에 오르셨으므로 지혜를 낼 만한 경계를 막힘없는 지혜로 관찰하되, 다른 이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뒤의 몸을 받지 않는 지혜로 사자후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나고 죽는 두려움을 벗어나서 차례로 해탈의 즐거움을 얻고는 생각하기를, ‘나는 나고 죽는 공포에서 벗어났으므로 나고 죽는 고통을 받지 않으리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이 관찰하는바 뒤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제일가는 소생할 곳인 열반의 자리를 보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들이 먼저 얻은 자리에서 법에 어리석지 아니하면 다른 일을 말미암지 않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는 지위를 얻을 줄을 알며,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줄을 압니다.
그 까닭을 말하면, 성문승과 연각승이 모두 대승에 들어가는 것이니, 대승이 곧 불승(佛乘)이며, 그리하여 3승이 곧 1승이니, 1승을 얻는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곧 열반의 경지이고, 열반의 경지는 곧 여래의 법신이므로 구경법신(究竟法身)을 얻는 이는 곧 구경 1승이니, 여래와 다름이 없고, 법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여래가 곧 법신이니, 구경법신을 얻는 이는 곧 구경 1승이니, 구경이라 함은 곧 끝이 없고 끊이지 아니함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한정이 없는 시간에 머무시며, 여래·응·등정각은 끝없는 미래(後際)와 같이 머무시니, 여래가 한정이 없으시기 때문에 자비도 한정이 없으시어 세간을 위로하십니다.
한정이 없는 자비로 한정이 없는 세간을 위로하시니, 이렇게 말하는 이는 여래를 옳게 말하는 것이며, 만일 다시 말하기를, ‘한정이 없는 법과 항상 머무는 법이 온갖 세간의 귀의할 데가 된다’고 말하는 이도 역시 여래를 옳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도를 얻지 못한 세간과 의지할 데 없는 세간에 대하여 끝없는 미래(後際)와 같이 다함이 없는 귀의와 항상 머무는 귀의가 되는 이는 여래·응·등정각을 말함입니다.
법이라 함은 곧 1승의 도를 말함이요, 승(僧)이라 함은 3승의 대중이니, 이 두 가지에 귀의함은 구경의 귀의가 아니므로 일부분 귀의라 합니다. 그 까닭을 말하면, 1승의 도법으로써만 구경의 법신을 얻는다 하였고, 그 위에 다시 1승 법신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3승의 대중은 공포가 있으므로 여래에게 귀의하고, 벗어나기 위하여 도를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에 귀의함은 구경의 귀의가 아니고 한정이 있는 귀의가 됩니다.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조복을 받고 여래에게 귀의하여 불법의 즐거움을 얻고 믿는 마음을 내어 법과 승에 귀의한다면, 이 둘에 귀의하는 것은 둘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고, 곧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 됩니다.
제일의(第一義)에 귀의하는 것이 곧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에 귀의하는 것과 제일의는 이것이 구경에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여래가 없으면 다른 2귀의가 없사오니, 여래가 곧 3귀의가 됩니다. 그 까닭을 말하면, 1승의 도를 말함은 여래께서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성취하여 사자후로 말씀하시는 것이어니와, 만일 여래께서 저들의 욕망을 따라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면 곧 대승이며 3승이 없는 것이니, 3승이 1승에 들어가고, 1승이 곧 제일의 승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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