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칠성기도(七星祈禱)로 부자가 되다.
이 이야기는 입적(入寂)하신 대은(大隱) 대강백(大講伯)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경기도 용인군 용인면 삼가리, 현재는 용인시 처인구 동백죽전대로 111-14에 위치한 화운사(華雲寺)를 창건한 연안차씨(延安車氏) 교윤공(較潤公)은 호가 우암(又岩)이다.
그는 경기도 수원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석완(錫完)공,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교윤공은 불행히도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만약 생존했다면 병신년으로 124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69세에 고인이 되었다.
그분은 한동안 수원에서 부자로 유명했으며, 시외버스 100여 대와 합승차 20여 대를 보유한 . ‘차부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이렇게 자수성가하기까지는 숨은 애환이 있다.
어머니가 불교의 독실한 신자였기에 그도 불교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처음부터 독신자는 아니었다.
부모님 생존 시절에는 부자는 아니었으나, 남에게 신세 질 정도도 아니었다.
교윤공이 7, 8세 때 독선생에게 글을 배우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었다.
15세 때 혼자 장사를 시작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 부모가 밑천을 대주면 대주는 대로 실패했다.
성패가 엇갈려 벌기도 했으나 실패가 더 많아 결국 부모의 논마지기까지 팔아 없애고 남의 집 셋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잘되길 바라며 명산승지에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아 성공이 더디었다.
이런 고생이 28세까지 계속되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사람이 부자가 되려면 성현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인력만으로는 어렵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교윤공은 귀가 번쩍 뜨여 겨우 몇십 원을 빌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관악산 염불암을 찾아가 칠성각(七星閣)에서 칠성기도를 올리며 백일간 정진했다.
돈이 넉넉하지 않아 기도법사 없이 혼자 마지를 짓고 공양을 올리며 칠원성군만을 불렀다.
각 법당에도 공양을 올렸으나 주로 칠성기도에 집중했다.
또한 절이 퇴락한 것을 스스로 기와를 만지고 벽을 바르며 담을 쌓고 제단을 손질하는 등 절 도량의 미화 작업에도 힘썼다.
백일 기도를 마친 날 밤, 꿈에 점잖은 태상노군이 나타나 큰 함지에 쌀을 넘치도록 붓고 실한 타래를 걸쳐 주며 “교윤아! 이것을 받아라. 네가 이것만 가지면 모든 것이 네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매우 기뻐하며 “고맙습니다.
잘 받겠습니다.”라고 답했으나,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럼에도 기분은 상쾌했다.
그런데 다음 날 우연히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왔다.
“ 이 사람아, 근간에 도무지 보이지 않더니 이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있었구나. 이제 장사는 포기하고 스님이 될 작정이냐? ”
“ 이 사람, 별 소리를 다 하네. 내가 장사하던 사람인데 왜 스님이 된단 말인가? 너무 답답해서 수양 차원에서 기도도 좀 하려고 여기 와서 있는 것일세. 그런데 말이야, 다시 장사를 시작해야겠는데 밑천이 없어서 앞이 캄캄하네. 자네가 주선하여 장사 밑천을 좀 돌려줄 수 없겠는가? ”
“ 장사하는 사람이 밑천이 없으면 되겠는가? 내가 주선을 해 보겠으니 어서 수원으로 내려가 보게”
하고 권하므로 그와 함께 수원으로 돌아왔다.
어떤 이에게 신용 대부로 몇 백 원을 빌려 약간의 물건을 도매가로 사서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수원을 중심으로 안중, 발안, 조암, 안성, 평택 등 각처 장날이면 자전거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도매를 하였는데, 어디를 가든 누구보다도 잘 팔려서 항상 물건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다가 각 개인의 주조업(酒造業)이 통제될 때 수원시에서 제일 먼저 양조장을 엉터리로 냈더니 술이 어떻게든 잘 팔려 큰돈을 벌게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이 밑천을 대고 누룩 장사를 하자고 하여 곡자회사를 만들고 누룩을 시골 양조장에 도매하는 장사를 하였는데 역시 장사가 잘 되어 큰돈을 벌어 벼락부자가 되었다.
어떻게든 돈이 잘 생겨 꼭 귀신이나 도깨비가 막 갖다 주는 것 같았다.
어느 시골의 수백 마지기 전답에 문제가 생겨 매매가 어려워 헐값에 거래된다는 말을 듣고, 누군가가 사라고 졸라서 마지못해 샀더니 그 해 추수량이 500석이나 되어, 논 산값을 제하고도 수십 배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 뒤에도 직조공장, 목재상 등 여러 가지를 경영하였는데 모두 순조롭게 잘되어 불과 4년 만에 만석 추수를 하는 부자가 되었다.
그 뒤에 가운이 길창하여 재취부인 단양 우씨에게서 사남일녀(四男一女)를 낳아 자손도 번성하였다.
그래서 그분은 네 가지의 원을 세웠는데, 하나는 선산을 정비하는 것이었고, 하나는 집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집을 지어 주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불은(佛恩)을 갚기 위해 절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것을 실천하여 괴산 땅에 양로원을 설치하고 팔십 명의 노인을 수용하고 대지와 토지를 기부하여 영원히 운영하게 하였으며, 선산의 산소를 용인으로 이장하여 치산을 잘 하였고, 불은(佛恩)을 갚기 위해 당시 용인군 용인면 삼가리산에 화운사(華雲寺)를 창건하였다.
또한 8·15 해방 후 각처에서 밀려드는 영세민에게 무상으로 천 호를 지어 주어 네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었다.
농지개혁 때에도 다른 지주들이 망한 사람이 많았지만, 이분은 개혁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관세음보살님께서 현몽하시어 예감을 얻어 전부 팔아 시골에 수백 정보의 산을 사고 서울시내와 수원시내에 고급 주택을 여러 백 호 샀기 때문에 토지개혁에도 손해가 없었다.
6·25 사변 때에는 서울에서 괴뢰군에게 붙들려 네 번이나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귀인이 나타나 북한으로 끌려가거나 총살당할 위기를 면하였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가서 무사히 피난하였고, 수복 후 상경하여 운수사업이 좋을 것 같아 신영버스 회사를 조직하여 백여 대의 버스와 이십여 대의 합승차를 사서 운영하였다.
십 년간 한 번도 큰 교통사고를 내지 않아 운영이 잘 되어 당시 10억 대의 재산을 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일이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하며 불교에 대한 신심(信心)이 돈독하였다.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자제분들도 부모님의 유훈을 받아 신심이 깊고 화운사를 적극적으로 보호·후원하여 화운사의 강당과 선원을 영원히 지속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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