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수도암 창건과 상사뱀
전라남도 고흥군에는 수도암이라는 절이 있다. 이 수도암에는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사랑에 배신당한 한 여인이 상사뱀이 되어 밤마다 괴롭히는 원혼을 달래고 천도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제 수도암 창건 연기를 함께 살펴보자.
옛날에 한 선비가 있었다.
이 선비는 과거에 낙방한 홍씨 성을 가진 인물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길에 올라 고흥에 들렀다.
한려수도의 장관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가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고흥 땅 풍남리라는 포구를 지나던 중,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홍 선비는 대나무 숲 속 초가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 집은 비를 피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주인을 찾았다.
"주인장, 계십니까? 잠시 비를 피하고자 합니다."
문이 열리자 눈이 부실 만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은 누추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잠시 들어오셔서 비를 피하고 가십시오."
홍 선비는 옆으로 비켜선 여인이 좀처럼 보기 어려운 절세의 미인임을 느꼈다.
저녁에 시작된 폭우는 날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거세졌기에 두 사람은 한 방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미목이 수려하며 어질고 믿음직스러운 홍 선비에게 여인은 저녁을 대접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때 이 고을의 이름난 미인으로 남성들의 선망을 받았으나, 시집온 지 1년 만에 남편이 병으로 죽어 과부가 되었고, 병간호로 재산마저 잃어 모든 것이 싫어져 이 숲속에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세상을 등진 채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홍 선비도 남부럽지 않은 양반집 자제로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심란해 이곳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사정을 털어놓았다.
전생의 인연이었는지 두 사람은 마침내 뜻이 통하여 백년가약을 맺기로 하고 하룻밤의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튿날 아침, 홍 선비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꽃가마를 타고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열흘, 보름, 한 달, 두 달, 1년이 지나도록 홍 선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은 뒷동산에 올라 하염없이 바다와 나룻배를 바라보며 기다리다 지쳐 몸져눕게 되었고, 상사병이 깊어 약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의원의 말대로 홍 선비와 이별한 지 꼭 1년 만에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홍 선비는 부모님의 기대와 간절한 소망에 따라 엄한 훈계 속에서 초가집 여인을 잊은 채 열심히 공부하며 과거 준비에 매진했다.
그리하여 다음 해 과거에 급제하여 함평 현감으로 부임했고, 양가댁 규수를 아내로 맞아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현감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 막 잠이 들었을 때 이불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눈을 뜨니, 눈앞에 커다란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현감은 크게 외쳤다.
"누구 없느냐! 빨리 들어와서 저 구렁이를 붙들어 내라!"
하인들이 문을 열려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고, 문을 부수려 하자 손에 쥐가 나 움직일 수 없었다.
현감은 숨이 막히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때 구렁이는 혀를 날름거리며 여인의 음성으로 또렷이 말했다.
"도련님, 왜 저를 버리셨나요?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당신과 언약을 믿고 애절하게 기다리다 상사병으로 죽은 초가집 여인입니다.
맹세를 저버리면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죽이겠다고 한 그날 밤의 약속을 잊으셨나요?"
새벽이 되어 첫 닭이 울자 구렁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현감은 총각 시절의 잘못을 뉘우치며 사죄했지만, 그날 이후 밤이 깊어지면 반드시 구렁이가 나타났다.
급기야 병이 든 현감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약도 쓰고 굿도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현감은 깊은 산속에 계신 덕망 높은 고승을 찾아가 구원을 청했다.
스님은 여인이 살던 대나무 숲속 초가집을 헐고 그 자리에 절을 지은 뒤, 재를 크게 지내고 아침저녁으로 명복을 비는 축원을 하라고 가르쳤다.
스님의 가르침대로 현감은 그곳에 절을 짓고 여인의 명복을 빌며 축원했다.
그 뒤로 상사뱀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절이 바로 고흥 수도암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지키지 못할 헛된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함을 경계하는 교훈을 담고 있다.
(전라남도 고흥 수도암 창건 연기에서)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