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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소가 된 왕중주(王中主)의 이야기  

 

금강산으로 출가하셔서 한평생을 금강사사(金剛四寺: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 신계사)에서만 계시던 이혜명 스님께서 6·25사변 직후 부산으로 피난 오셔서 선암사에서 주석하시다가 말년에는 영도 백련암에서 입적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혜명 스님은 경학에도 밝을 뿐만 아니라 의식 절차와 어산작법(魚山作法)에도 매우 해박하신 분이다. 
산승이 20대 중반에 팔공산 파계사 일우당 종수(一愚當 宗壽) 스님을 따라 백련암에서 며칠 동안 머물며 들은 이야기이다. 

스님께서 젊은 시절에 중국 불교 성지를 두루 참배하시고 중국 명승지를 구경하시던 중, 한 번은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현재는 노신공원 魯迅公園)에 들렀다.
 공원 한쪽에 검은 소 한 마리를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혜명 스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소 앞에 세워진 게시판 같은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보았는데, 그 안내판에 적힌 내용이 더욱 신기했다.
"지나가는 남녀노소 여러분, 이 소의 배를 보십시오……"라고 시작하는 아주 긴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상해 지방에 큰 부자가 한 분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주 친한 죽마고우인 왕중주를 재산관리인으로 정해 재산을 맡기고 상당한 대우도 해주었다.
왕중주에게는 등기 서류뿐만 아니라 인감 도장까지 모두 믿고 맡겼다.
그러나 왕중주는 친구의 은혜로운 부탁을 저버리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모든 재산을 가로챘다.
하늘처럼 믿었던 친구가 자기 재산을 교묘하게 사취한 사실을 알게 된 부자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거지가 된 그는 남은 패물을 팔아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논과 밭을 갈 암소 한 마리를 사서 길렀다.
몇 해가 지나자 암소가 검은 송아지를 낳았는데, 그 새끼의 배에 글씨 몇 자가 새겨진 흔적이 있어 자세히 보니 흰 털로 자기 배신자이자 철천지원수인 왕중주의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알아보니 왕중주가 1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한으로 가득 찼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원수가 죗값을 치르려고 내 집에 태어난 것이로구나. 이놈! 잘 만났다.
사람이 죽으려면 삼 년 전부터 환장한다더니, 너처럼 환장한 놈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네가 죽어 이제 빚을 갚으러 온 모양이다만, 송아지로 내 집에 태어난 것만으로는 나의 분하고 원통한 빚을 다 갚는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이제부터 네 놈에게 원수를 갚을 터이니 견뎌 보아라."
이렇게 다짐한 그는 아주 모질고 기이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는 왕중주의 후신인 송아지를 가두어 두고 끼니 때마다 먹을 것을 주었다.
그리고 한밤중이 되면 촛불을 밝혀 들고 시퍼렇게 간 칼을 가지고 우리 안으로 들어가 매여 있는 송아지 목에 큰 칼을 들이대고는 살기 등등한 모습과 음성으로 송아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이놈! 원수 왕중주, 이 나쁜 놈!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더냐? 네 이놈, 이리와 같은 놈이었으니 그런 짓을 했겠지, 이 나쁜 놈! 내 너를 지금 당장은 죽이지 않는다.
조금 더 키워서 잡되, 그것도 단번에 죽이지 않을 것이다.
네 놈 앞에 숯불을 피워 놓고 시퍼렇게 칼을 갈아 하루에 살 한 점씩만 베어 내어 네 놈이 보이는 앞에서 구워 술안주로 삼을 것이니, 네 이놈! 단단히 들어 두어라."
그는 이 일을 매일같이 계속하였다.
그러자 왕중주의 이름이 새겨진 송아지는 삐쩍 말라 자라지 못하였다.
이렇게 한동안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왕중주의 아들이 느닷없이 찾아와 마당 한가운데 넙적 엎드려 사정을 하였다.
"어르신네, 제발 널리 저의 아버지를 용서해 주시옵고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 재산을 다 돌려드림은 물론 모든 것을 영감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부디 아버지만 살려 주십시오."
아들은 수없이 절을 하며 간청하였다.
"나는 지금 꼭 돈만 가지고 이러는 것이 아니다.
너의 아버지 소행이 너무나 괘심하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너는 어찌된 일이냐?"
"예, 저희 선친께서 어르신네의 은공을 저버리고 사취한 것을 저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사오나 자세히는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여러 달 전부터 어머니와 제 꿈에 돌아가신 선친께서 매일 나타나시어 그동안 지은 죄를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르신네 집의 소로 태어나 죄 값을 갚으려 하지만 그 죄가 워낙 크기 때문에 소의 몸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무서운 지옥으로 떨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의 괴로움도 괴로움이거니와 재산을 어서 돌려드려야만 당신의 죄를 벗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살아생전에 자세한 내용을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당신이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가족들이 아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었고, 그 내용을 알면 저희들이 떳떳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계신 이곳을 꿈속에서 일러주셨습니다.
이제 저희가 모든 재산 문서를 이렇게 가지고 와서 사죄를 드리오니 널리 용서하시옵고 부디 이것을 거두어 주시고 저희 아버지를 돌려 주시기만 하시면 그 은혜 백 번 죽어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지극정성으로 간청하는 아들의 효심에 감동하여 재산을 되돌려받고 송아지를 내어 주었다.
왕중주의 아들은 아버지의 후신인 송아지를 데리고 가서 음식도 잘 대접하고 각별히 보살폈다.
그 소가 자란 후에는 공원에 좋은 우리를 지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여물을 쑤어 대접하였다.
또한, 오고 가는 만천하 사람들이 이 소를 보고 경각심을 일으켜 인과를 믿고 선행을 닦으라는 뜻으로 사연을 쓴 안내판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혜명 스님께서 직접 보셨다고 말씀하신 내용을 전하는 바이다.
그리고 혜명 큰스님께서 피난을 오시면서 몸만 오셔서 대총상법문(大摠相法門)과 소총상법문(小摠相法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셔서 운문사 전강주이신 명성스님의 편저 제경서문을 같이 드린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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