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낭백(郞白) 스님의 수행과 원력
이씨 조선 말엽, 1600년대 말 범어사에는 낭백이라는 스님이 계셨다.
스님은 일찍이 범어사로 출가하여 공양주 소임을 부지런히 수행하였고, 또한 보시행을 발원하여 본인이 가진 모든 재물을 가난하고 병들었으며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현재 동래 기찰 대로변에는 행인의 눈길을 끄는 큰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 맑고 깨끗한 샘물이 있어 지나가는 행인들의 갈증을 달래주었는데, 이 소나무와 우물은 낭백 스님께서 행인들을 위하여 심고 파놓은 나무와 우물이다.
또한 스님께서는 동래 칼치재에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동래에서 온천 쪽으로 가는 대낫다리 동쪽 산기슭을 개간하여 참외, 감자, 옥수수 등을 심어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런 스님이었지만 당시 이씨 왕조는 억불정책을 펴면서 동래부사들이 범어사에 가하는 핍박은 언제나 스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동래부에서는 범어사에 갖가지 잡역을 부과하였고, 관리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스님들을 혹사시켰다.
절에서도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매일같이 잡역에 시달리니 어지간한 스님들은 범어사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낭백 스님은 동래부사를 찾아가 새벽 예불조차 제대로 할 시간이 없는 승려들의 고단함을 하소연하고자 했으나, 동래부사는 만나 주지조차 않았다.
이에 낭백 스님은 어느 날 부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였다.
"부처님, 저는 이제 이 생을 마치고자 합니다.
내생에는 큰 벼슬에 올라 공부하는 스님들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이튿날 아침, 낭백 스님은 범어사 대중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 몸을 보시하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내가 간 후 35년이 지나 절의 잡역을 없애주고 불사를 위해 힘쓰는 관리가 오면 그 사람이 나인 줄 알라."
그리고는 금정산으로 올라가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 보시하였다.
호랑이가 먹다 남긴 시체는 며칠 후 나무꾼들에게 발견되어 절로 옮겨져 다비되었는데, 그때 사리와 영골이 많이 나와 모신 사리탑이 지금도 범어사에 모셔져 있다.
과연 세월이 흘러 35년이 지난 후, 당시 이조판서를 지낸 조상경(趙尙䌹)의 아들 조엄(趙曮, 1719~1777)이 동래부사로 부임해 왔다.
어느 따뜻한 봄날, 산천도 구경할 겸 범어사를 찾은 동래부사는 동구 밖을 지날 때 묘한 향수를 느꼈고, 절에 이르러서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감격에 젖었으며 법당에 올라가 무수히 절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절의 사정을 스님들에게 낱낱이 묻더니 스님들의 모든 잡역을 면제시켜 주었고, 많은 불사를 할 것도 약속하였다.
범어사 스님들은 너무나 기이하여 순찰사에게 나이를 물었더니 35세라는 대답을 들었다.
스님들은 낭백 스님의 이야기를 전하며 오늘이 낭백 스님의 35번째 제삿날임을 알렸다.
조엄은 자신의 전생이 낭백 스님임을 깨닫고, 생각해 보니 자신이 일 년에 단 한 번씩 꾸는 꿈이 있는데, 꿈속에서 범어사에 와서 차 대접을 받는 그날이 바로 오늘임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꿈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동래부사에 지원하였으며, 평생을 통하여 범어사에 많은 불사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범어사에 전해 오는 낭백 스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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