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고(故) 퇴경 권상로 선생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1. 공중에 나타나신 관세음보살님을 보고 발심한 우용택(禹龍澤) 씨
우용택(禹龍澤) 거사님은 경상북도 선산군(현재 구미시) 해평면(善山郡 海平面)에 거주하셨으며, 해평면장(海平面長)으로 여러 해 동안 근무하셨다.
호(號)는 육봉(六峰)이다.
그는 불교학자로, 당대 대강백이셨던 고(故) 권상로(權相老) 선생과 내외종(內外從)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유학자로서 권상로 선생과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으며, 권상로 선생으로부터 불교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보라는 권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용택 씨는 유교 정신이 몸과 뼛속 깊이 배어 있는 사람이어서, 불교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이단이자 미신이며 허무한 멸지도(滅之道)라고 여겨, 불교를 믿으면 불살(佛撒)이 내려 가족 모두가 스님이 되고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다고 반대하였다.
승려나 불교 신자들은 죽으면 시체를 화장하여 시신도 남기지 않으니, 그것이 허무적멸을 보여 주는 본보기라며 스님과 불교 신자를 비방하고 미친 사람이라 일컬었기 때문에, 불교 신자로서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공맹지도(孔孟之道)는 말할지언정 불교 이야기는 금기시해 왔다.
그런데 그는 2019년(기해년)으로부터 만 100년 전인 1919년 기미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그해 가을, 선산군 각 면 면장들이 함께 경기도에 있는 강화도 보문사로 단체여행을 갔다.
지금은 김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연육교가 놓여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당시에는 보문사까지 가려면 다시 배를 타야 했다.
그때는 증기발동선, 소위 ‘똑딱선’이라는 것도 없었고, 오직 목선으로만 왕래하던 시절이었다.
우용택 씨 일행은 목선을 타고 강화도에 가서 먼저 마니산을 구경한 후, 다시 배를 타고 보문사를 참배하고 목선을 타고 인천(仁川)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배가 전복될 위험에 처했다.
우용택 씨 일행은 물론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뱃사공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 낙담한 기색을 보이자, 우용택 씨와 가족들은 서로 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때 승객 중 한 사람이 일어서서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외치며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죽지 않고 살고 싶다면 저를 따라 관세음보살을 부르십시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가 큰 소리로 관세음보살을 함께 불렀다.
그때 유생인 우용택 씨도 정신미신(正信迷信)을 가릴 생각은 없었고, 영험이 있든 없든 무의식중에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낮은 소리로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떠올리며 불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풍랑이 더욱 거센 파도를 몰고 와 죽을 고비에 이르렀을 때, 관세음보살을 부르라던 그 사람이 갑자기 공중을 향해 “여러분, 저것을 좀 보시죠.”라고 말했다.
우용택 씨와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중을 바라보니, 오색찬란한 광명이 휘황하게 빛나는 가운데 귀부인의 얼굴을 한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을 보는 순간 벽력 같은 소리와 함께 큰 파도에 배의 돛대가 부러져 정신이 아득해졌으나, 바다의 극심한 풍랑은 일시에 잠잠해졌으며 관세음보살님의 상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돛대가 없는 배였음에도 무사히 인천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을 겪은 후, 우용택 씨는 관세음보살님의 영험을 깊이 체감하며 관음신자가 되었고, 동시에 불교를 깊이 신앙하는 불자가 되어 불교를 더욱 찬양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길, 유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려운 고난과 공포를 겪어도 공자님이나 맹자님을 찾지 않지만, 불교 신자는 어려운 고난과 힘든 일을 당할 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며 마음속의 공포를 몰아내고 심신의 안정을 꾀한다고 한다.
또한, 죽으면 극락왕생한다는 믿음을 확고히 하여 마음의 동요가 없으니, 종교로서는 불교 외에는 없다고 할 정도로 불교의 광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까지도 불교에 귀의시켜 온 가족이 모두 불교 신도가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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