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또한 1924년 불교창간호에 실린 <신심과 효성이 지극한 김순득(金順得)이 명부(冥府)에서 인간에>라는 기사를 전재한 것이기도 하다.
2.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로 병이 완쾌되고 목숨이 이어졌다.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117번지에 거주하는 이진영 씨의 여동생 이(李)씨 원각화(圓覺華)는 1908년 무신년, 스물셋의 젊은 나이에 남편 김씨를 사별한 뒤 두 달 만에 아버지마저 잃은 딸 김순득(金順得)을 데리고 사간동 117번지 친정 오빠 집에 의탁하여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순득이는 영특하여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세월이 흘러 순득이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 되었다.
그때가 재동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였다.
어머니가 홀로 지내며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을 무렵, 서울 문안에도 포교당이 생겨 봉익동에 백용성 큰스님께서 포교당(布敎堂)을 설립하여 매주 일요일마다 설법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불교에 대한 신앙심(信仰心)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웃 노인의 권유로 백용성 큰스님의 설법을 듣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순득이를 업고 다니면서 법문을 들었고 관세음보살님을 불러 모셨다.
어머니 원각화(圓覺華)와 그 딸 순득이는 참으로 독실한 재가 불제자가 되었다.
비가 오나 눈보라가 치나 일요일이면 순득이와 함께 꼭 봉익동 포교당에 가서 예불도 드리고 법문도 듣고 관세음보살님의 염불도 올리는 것이 일요일의 일과였다.
젖먹이 때부터 열일곱 살 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까지 불교 신앙을 생활신조로 삼아 살아온 두 모녀는 참으로 진실한 불교 신행(佛敎信行)의 독신자였다.
숙세의 업연이었는지, 17세 때인 고보 3학년 되던 해에 감기처럼 우연히 생긴 병이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남대문 밖에 있는 제중원부터 시작하여 여러 병원을 다니며 진찰과 치료를 받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결국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으나 몸이 너무 쇠약하여 수술 도중 목숨을 잃을 위험이 크다고 하여, 그냥 죽을 때까지 관세음보살님만 생각하며 죽기로 결심하고 병원을 나왔다.
인력거를 타고 태평동 대한문 근처에 오던 중 순득이가 봉익동 교당(敎堂)으로 가자고 졸라서 포교당에 눕혀 놓고 불공을 올리고 돌아왔다.
그날 밤 잠을 자다가 순득이가 손짓을 하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기에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더니,
지금 막 관세음보살님이 오셔서 환약 세 개를 주시기에 받다가 머리맡에 떨어뜨렸기 때문에 찾는다고 하면서 슬며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다음 날은 병세가 약간 가벼워진 듯하였다.
그럭저럭 그 전해 12월에 시작한 병이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어 누웠으니, 엉덩이에 욕창이 나 눕지도 못하고 극도로 쇠약하였다.
어느 날은 자다가 “가고 싶어도 안 갈래요, 어머님은 어찌하고”
하면서 발악하는 것을 보고 순득이를 깨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찬란한 가마를 타고 관세음보살님이 오셔서 날 보고 하얀 빈 가마에 타라고 하시기에 안 가겠다고 발악하였단다.
그러자 “참 딱하구나. 너의 정명이 17세인데, 네가 마음이 착하고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간절하여 너를 극락으로 데려가려고 가마를 가지고 왔는데, 어머니를 생각하는 효성이 지극하고 신심(信心)이 돈독하니 너의 나이를 오십(五十) 살 더 늘리고, 너의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삼 년(三年)이 지난 뒤에 너를 극락으로 데려가겠다.”
하시면서 공중으로 사라지셨다고 한다.
다음에는 비몽사몽간에 하얀 옷을 입은 선녀 같은 처녀가 친구라고 찾아와서는 “얘 순득아, 너 몹시 아팠구나. 머리도 아프고 눈도 아프지”
하면서 몸을 만져 주며 “이제는 괜찮아! 4월 8일에는 걸어서 다닐 터이니 너무 애쓰지 말아라”
하고 가버린 일이 있었다.
또 한 번은 순득이 어머니 원각화에게 현몽하여 말하기를, “삼청동성제(三淸洞星祭) 우물 뒤에 절이 있으며, 그 절 뒤로 올라가면 석벽 사이에 물이 있으니 그것이 감로수(甘露水)다.
그 물을 가져다가 먹이면 병이 낫는다.”
하기에 그다음 날 그곳에 가서 사방으로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그 근처에 물이 째각째각 흐르는 곳이 있어 그것인가 하여 갔더니, 이주일이나 먹이고 씻기고 하여도 효과가 없었다.
하루는 순득이 외조부와 함께 올라가서 하루 종일 찾아보아도 허사라, 이에 외조부도 “얘야, 아마 꿈이 허사이지 무슨 약수가 있겠느냐”
하시며 그만 내려가자고 하셨다.
그래서 “그럼 아버님은 먼저 내려가시지요, 저는 더 찾아보고 가겠습니다.”
하고 속으로 관세음보살님을 간절하게 부르면서 혼자 더 찾아보기로 하였다.
더 올라가서 찾아보니, 그 아버지가 “그렇다면 나도 더 가보자.”
하시며 아주 북악산 꼭대기에 거의 다 올라간 곳에 돌 틈에 물이 고여 있었다.
그 물을 가져다가 먹이고 씻기고 하기를 7일 동안 하였더니 고름이 멈추고 차차 병색이 없어지더니, 과연 4월 8일에는 제발로 봉익동 대각사 교당에 걸어 갔다 왔다고 하였다는 말을 원각화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 말씀은 석주 큰스님께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이 두 모녀의 눈에는 북악산 전체가 관세음보살님의 탱화로 보이고, 그 약수터는 관세음보살님의 왼편 겨드랑이로 보인다고 한다.
순득이는 17세 때 꼭 죽게 된 병이었는데,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인해 살아난 것이다.
이 사실은 지금 서울에 계시는 노스님들도 많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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