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금비령(禁碑령)에 얽힌 구호대가(救護代價)
함경도 풍산 지방(豊山地方)에는 금비령(禁碑嶺)이라는 큰 고개가 있다.
이 고개를 한 번 넘은 사람은 다시 넘기를 꺼려하는 험한 고개이다.
어느 해 봄, 푸릇푸릇한 풀잎이 무성해지자 산 밑 마을의 아낙네들은 날마다 산나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석양 무렵, 나물을 해가지고 돌아오던 아낙네들이 고개 중간쯤 내려오다가 보니, 웬 행인이 폐의파립(弊衣破笠)한 차림으로 길가에 쓰러져 누워 있었다.
모두 본체만체 지나쳐 가버렸는데, 한 부인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허기에 지쳐 쓰러져 있었다.
산 그늘은 골짜기에 드리워져 있었고, 그냥 두고 가면 이 사람은 죽을 것 같았다.
‘이것 참 안됐다’고 생각한 부인은 마침 아이 젖이 불어 퉁퉁 부어 있었기에 사람을 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옆으로 다가가 그의 고개를 잡아당겨 젖꼭지를 입에 물리고
“여보시오, 이 젖을 빨아 보시오”
하니, 그 행인은 젖을 쭉쭉 한참 빨더니 눈을 번쩍 뜨고
“누가 나를 살리십니까?”
하고 물었다.
“어서 더 빨으시오”
하고 남은 젖 한 통을 마저 빨리게 했다.
이 광경을 보던 입 빠른 부인 하나가 쉬는 곳에 가서 쉬고 있던 부인네들에게
“아, 참 얄궂은 일도 다 봤어! 아무개 여편네가 길가에 누워 있는 웬 남자를 껴안고 젖을 빨리고 있어!”라고 소문을 냈다.
그러자 어떤 여자는
“그게 무슨 짓이야? 어서 가서 아이나 먹이지”
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여인은
“남의 남자를 껴안고 젖을 빨리다니, 그럴 수가 있을까?”
하며 놀라는 사람도 있었다.
젖먹이던 부인은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어서 동네로 같이 내려갑시다”
하고 나물 보를 이고 행인은 뒤따라 내려왔다.
먼저 모였던 아낙네들은 일어나 먼저 가버렸다.
앞서 온 나물꾼들이 동네 옆에 내려오자, 나물 마중 나온 젖먹이던 부인의 남편이
“우리 집사람은 안 오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느 참을성 없는 부인이
“저 뒤에서 웬 남자에게 젖을 빨리고 있다가 뒤에 떨어져 온다”고 입을 삐죽이며 사실대로 말하니, 그 남자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조금 있다가 뒤따라 오는 것을 보고는 달려들어 나물 보퉁이를 밀쳐 버리며
“야! 이년아, 누가 남의 남자에게 젖 주랬어? 망한 계집 같으니!”
하면서 욕설과 행패를 부렸다.
뒤따라오던 행인을 보니 참으로 민망했고, 그 남자의 무도한 행동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보시오, 당신의 저 부인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죽을 뻔했습니다.
사람 살린 것이 죄가 아닙니다.
진정하십시오”
하니, 그 남자는
“이놈아, 너 죽고 사는 것을 누가 알아? 그 따위 말이 무엇이냐, 말라 자빠진 소리냐!”
하며 폭언을 퍼부었다.
아무리 달래고 빌어도 점점 소리가 높아져 야단치는 바람에 남녀 할 것 없이 구경삼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냥 두고 모른 척 지나가자니 그 부인이 매우 곤란을 당할 것 같아, ‘에라, 이것은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고 주머니에서 마패를 꺼내 보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한 사람이
“야, 마패다! 큰일 났구나!”
하며 근방의 노기가 충천하던 남자가 기가 죽어
“살려주십시오, 어리석은 백성이 잘못하였습니다”
하고 땅에 엎드려 손이 닳도록 빌었다.
그가 바로 명인어사 박문수였다.
박 어사가 말하기를
“너 하는 짓을 보면 나도 할 일이 있겠으나, 네 부인의 은덕으로 살아났으니 너는 여하간에 나는 은덕만 생각할 뿐이다.
다음에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니 기다려라”
하고 그만 가버렸다.
장차 화가 있을까 걱정하며 날을 보내던 중, 하루는 그 고을 사또가 내외를 다 같이 부르더니
“비루한 계집 때문에 동원(洞院)까지 불리게 되었으니 이제는 도망도 못 가고 당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해가지고 동원에 들어가니 며칠 전 보던 어사와 사또가 함께 앉아 있었다.
먼저 사또가 남자를 단단히 꾸짖고, 다시 어사가 부인을 치하하며
“내가 꼼짝없이 죽었을 터인데 부인의 어진 마음씨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보아하니 형편이 넉넉지 못한 듯하니 자기 동네 앞들에 있는 논 몇 마지기를 주는 것이니 잘 지어 먹고 살라고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동네 앞에 그 내력을 기록한 석비를 세워, 다음에 이 고개를 넘는 사람이 음식 준비 없이 재를 넘지 말라는 뜻으로 금비령(禁碑嶺)이라는 비석을 세운 것이 금비령재의 이름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복지를 잃을 때를 놓치지 말라.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것이 은혜를 베푼 데서 오는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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