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범어사 명학동지 이야기
이 이야기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옛날 신라 시대에 생긴 이야기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강원도 금강산에 영원암이라는 암자가 있으며, 그 절 안에 있는 골짜기를 영원동이라고 한다.
옛날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이곳에서 입정수선(入定修禪)하였기 때문에 영원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영원조사는 경주 사람으로, 본관은 김씨이다.
어려서 동래 범어사에서 명학(明學)이라는 스님을 찾아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차츰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스님이 사판승(事判僧)으로서 돈과 쌀을 모으며 생활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의 근본 뜻을 참되게 깨닫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발심하였다.
이후 명산과 덕망 높은 선지식들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며 명심달도(明心達道)의 자기수행(自己修行)을 점차 심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홀로 금강산 골짜기에 초막을 짓고 들어가 선정(禪定)을 닦고 있었다.
어느 날 선정에 들었을 때, 남혈봉(南穴峯) 아래에서 죄인을 다스리는 소리가 천지가 진동하는 듯 들려왔다.
정중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시왕봉(十王峯) 아래에서 염라대왕이 범어사의 명학 스님을 잡아다가 생전의 죄목을 세어가며 엄형을 내리고, 금사보(黃蛇報)를 씌우라고 명령하여 업경대(業鏡臺) 아래에 가두는 광경을 보았다.
영원조사는 선정에 들어 깊이 생각해 보니, 명학 스님이 평생 수행하지 않고 탐욕만 부렸기에 업인(業因)이 심하여 이와 같은 죄보(罪報)를 받았음을 깨달았다.
매일 세 번씩 금사굴 앞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신주(神呪)를 외워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금사가 홀연히 사라졌다.
영원조사가 다시 선정에 들어 살펴보니, 전생의 탐욕 업력으로 그 몸이 범어사 창고 한가운데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영원조사는
“아, 불쌍하다.
우리 스님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하고 49일 동안 재를 지내며 행장을 차려 범어사로 내려갔다.
그러나 대중 스님들은
“저 중은 스님 생전에는 시봉하기 싫어 공부하지도 않고 나갔는데, 스님이 죽은 줄 알았는지 논밭이나 타러 온 모양이다.”라며 빈정대는 소리도 들려왔다.
영원조사는 그런 말에 개의치 않고 49재를 마친 후 문도 권속들에게 죽을 끓이라고 시켰다.
죽그릇을 손수 들고 창고 문을 열자, 커다란 구렁이가 머리를 두드렸다.
영원조사는
“스님, 생전에 재물에 탐욕만 부리고 인간에게 은덕을 베풀지 않으며 인과를 믿지 않아 이런 죄보를 받았습니다.
이 법식을 받으시고 속히 해탈을 구하소서.”라고 법문하였다.
구렁이는 법문을 듣고 몸을 움직여 산문 밖으로 기어나가 스스로 머리를 층계 돌대에 세 번 부딪히고 죽었다.
그리하여 영원조사는 그 영혼을 인도하여 금강산으로 돌아오는 도중, 업력이 중하여 짐승들이 교미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로 들어가려 하였다.
영원조사는 그것을 말려 이끌고 강원도 삼척(三陟) 고을에 이르렀는데, 그날 밤 홀연히 촌부 전씨(村婦全氏)의 태중으로 들어갔다.
그 이튿날 영원조사는 전씨 부인을 찾아가
“이제 십 개월 후에는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을 터이니, 일곱 살이 되면 산에 들어가 도를 닦게 하십시오. 그때 내가 다시 와서 데려가리라.”고 하였다.
이후 영원암으로 들어가 수행하던 아이는 7년이 되던 해 약속대로 영원조사가 찾아가 데리고 와 선리(禪理)를 탐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업력이 두터워 깨닫기 어려웠다.
이에 한 방편을 세워 뒷방에 가두고 바늘로 문구멍을 뚫어놓은 뒤,
“이 구멍으로 큰 소가 들어와 네 목숨을 해칠 것이니, 소가 들어오는 것을 꼭 지켜 막아라.”고 하였다.
아이는 그 말을 믿고 소가 들어오는 것만 열심히 지켜보았다.
일곱 해가 지나던 어느 날,
“스님, 창밖에서 큰 소가 창구멍으로 들어오려 합니다!”라는 고함이 들렸다.
스님은 그때가 기연(機緣)이 익었음을 알고
“오냐, 가만히 앉아 못 들어오게 지켜라.”고 하였다.
소는 더욱 용맹스럽게 7일 만에 창구멍으로 쫓아 들어왔다.
아이는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
깨닫고 보니 영원스님은 전생에 자기의 상좌였으며, 그 고마운 전생 상좌의 은덕으로 대도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뒷방에서 깨쳤다 하여 후원조사(後院祖師)라는 칭호가 생겼다.
이 이야기는 불가에서 말하는 업과 윤회(業果輪廻)의 교훈을 담고 있다.
즉, 탐욕을 부려 재물을 모으기만 하고 남에게 시덕을 베풀지 않으면 창고를 지키는 업이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 종단에서 발간한 『불교지』 55호에 기고된 내용이며, 범어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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