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왕수인(王守仁)의 전생사
중국 명나라 때 왕수인(王守仁)이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호는 양명(陽明)이다.
그는 절강성 여조(浙江省 餘姚) 출신으로, 명나라 헌종 성화 8년(憲宗成化八年, 1472년)에 태어나 55세에 별세하였다.
왕양명이 태어날 무렵, 그의 조모께서 꿈을 꾸셨는데, 수천 명의 천녀가 채색이 영롱한 구름을 타고 집으로 내려왔고, 그중 한 천녀가 옥동자를 안고 와서 고함을 지르며
“이 아이를 받으라”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왕양명은 중국 유학계에 일대 새벽의 효성(曉星)과 같이 밝은 광명을 비추어 준 인물이었다.
원(元)대부터 명(明)대 중간까지는 주자학(朱子學)이 성행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의 주석에만 치중하였고, 송유(宋儒)들이 남긴 찌꺼기만 맛보며 철리(哲理)만 논하고 실행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명대 중반에 왕양명이 등장하여 양지양능(良知良能)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학(實學)을 주장하며 사상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양명학이다.
왕양명은 달마 선맥의 돈오선풍(頓悟禪風)에 이미 전생부터 마음을 밝혔던 선장(禪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왕양명과 불교 선종(禪宗) 및 숙세의 인연설이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
절강성 어느 곳에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이 있는데, 얼마 전까지 일심으로 선(禪)을 닦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자유자재로 할 경지에 이른 수도승 선지식이 계셨다.
어느 날 그분은 점심공양을 드시고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가사를 착복한 채 조용한 법당으로 들어가시면서
“이 문은 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 후로는 다시 나오지 않았고, 아무리 문을 열라고 해도 도저히 열리지 않아, 법당 안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 앉거나 서서 몸을 벗어버리고 가는 죽음)을 하신 것으로 생각되었다.
혹은 그런 성승(聖僧)의 부탁을 함부로 어기지 못해 문을 부수고 열 수도 없었기에, 오랫동안 문을 열지 못하는 법당으로 전해졌다.
그로부터 50여 년 후, 어느 봄날 왕양명 선생이 제자 수백 명을 거느리고 금산사로 봄놀이 소풍을 갔다.
도량의 환경이 마음에 들고, 산천이 익숙하게 느껴져 여기저기 법당을 참배하던 중 한 법당 앞에서 문을 열려고 하자 안내하던 스님이
“그 문은 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유를 듣고 왕양명은 어쩐지 문을 열고 싶어 문고리를 잡아당기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스님은 가사를 입은 채 가만히 입정(入定)하여 그대로 좌탈(坐脫)하였다.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대중이 모여들었고, 왕양명 선생의 제자들도 함께 모였다.
그 스님은 한쪽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五十年後王守仁 開門人是閉門人 精靈剥後還歸複 始信禪門不壞身
오십년후왕수인 개문인시폐문인 정령녹후환귀복 시신선문불괴신
뜻을 풀이하면,
“50년 전에 내가 이 문을 닫았는데, 50년 뒤에는 왕수인(王守仁)이 와서 이 문을 열 것이다.
문을 닫은 사람과 문을 연 사람이 동일인이다.
생사와 고금이 본래 없는 영원한 정령이 껍질을 벗고 다시 돌아와 보니, 불문(佛門)에서 말하는 ‘불괴신(不壞身)’이 바로 이것임을 알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좌탈(坐脫) 열반(涅槃)하신 이 법체를 대중 스님들과 함께 다비(화장)하였다.
이때부터 왕수인이 전생에 참선하던 스님이었다고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숙습인지 양지양능(良知良能) 설도 불가의 선리(禪理)에 가까우며, 왕양명은 정좌(精坐)를 즐겨 하였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유학 거유 이상필(李相弻) 선생에게 들었다고 하는 것을 고봉 강백님께서 전해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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