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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화엄사 각황전 중창불사에 관한 이야기

전남 구례군 화엄사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5년 갑자(서기 544년), 즉 1475년 전에 연기조사가 개창하고 '화엄사'라는 이름을 붙인 사찰이다.

이후 신라 경덕왕, 헌강왕, 고려 문종, 조선 인조대왕 때까지 다섯 차례 중창하였다. 특히 조선 숙종 때 계파 화상이 큰 법당을 2층으로 중창하였고, 나라에서 '각황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내렸다.

이 각황전 중건 불사는 가장 어려웠던 사업 중 하나였다. 각황전 중창은 조선 숙종 신묘년(1711년)에 이루어졌으며, 이는 2019년 기준으로 308년 전에 중창된 것이다.

이에 대한 신앙적 영험이 세상에 전해져 있는데, 그것을 약기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누구라고는 분명한 지명도 없다. 어느 때라고도 하지 않으며, 다만 각황전을 지을 때라고만 전하고 있으니, 아마 계파 화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화엄사는 옛날 대화엄종찰로서, 개산 연기조사는 삼천 제자를 거느리고 선림교해를 펼치셨다. 원효성사께서도 이곳에서 화엄원돈 교리를 강설하셨으며, 의상조사 또한 여기에서 제경요의를 연찬·선포하셨다.

도선, 정행, 현준, 준소, 정인, 조형, 부용, 청허, 부휴, 자운 등 용상대덕들이 장엄한 도량을 건설하고, 현현묘지의 대법을 찬양하던 이 화엄 대도량의 큰 법당이 퇴락하여 잡초 속에서 썩어 가는 모습을 뜻있는 불제자라면 누가 무심히 볼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당시 주관하신 큰 스님은 항상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두드리며 향을 피우며 정성껏 기도하면서 불보살님의 가호를 입어 큰 법당 중창을 발원하고 기도를 계속하였다.

이때 산하 동리에 사는 어느 노파 한 분이 항상 절에 와서 밥을 얻어먹고 가곤 하였다.

어느 날 대중 스님들이 모여 앉아 "성심과 말만으로는 법당이 세워질 리 만무하니, 화주를 내어 권선을 받아 중창합시다."라고 주관하신 큰 스님께 이구동성으로 간청하였다.

큰 스님은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라며 찬성하시고는 "그러면 샘에 가서 물 한 동이를 길어 와서 방 가운데 놓고, 또 쌀독을 가져와 방 가운데 놓으라."고 하셨다.

상좌에서부터 말석, 공양주 스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팔뚝을 걷고 물동이에 팔뚝을 푹 담갔다가 쌀독에 집어넣어 빼내 보기를 전부 다 해보았다.

강주스님, 노전스님, 부전스님 등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팔뚝에 쌀겨가 묻어 하얗게 되었으나, 오직 공양주 스님 한 분만은 홍두깨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매끈하였다.

큰 스님이 둘러보시며 "응, 됐다. 공양주 아무개를 권선화주로 정하노라." 하시고 권선문책을 매어 주면서 부탁하셨다.

"자네가 권선을 나갈 때, 절문을 나서면서부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떤 사람이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여 돈을 얻어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을 놓치면 일이 허사가 될 터이니, 나의 이 부탁을 부디 명심하라."고 무겁게 당부하셨다.

이 무거운 책임을 온몸에 걸머지고 대문 밖을 나서는 화주 스님은 한 걸음, 두 걸음 발자국을 옮겨 걸어가는데, 동구에 내려가서는 오른편으로 올라갈까? 왼편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오른편으로 돌아올라 산 동원을 더듬고 밤티재를 넘어 남원, 전주를 차례로 밟을 양으로 오른편으로 가기로 내정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필 피하지도 못할 좁은 주먹소가에서 절에 와서 밥 얻어 먹는 노파를 딱 만나게 되었다.

일이 틀렸다. 천지가 아득하다. 동전 한 푼 없는 저 노파에게 무슨 시주를 권하랴! 주저하다가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사람이라도' 하신 말씀이 권선 제일성을 토하게 되었다.

"할머니, 우리 법당 짓는데 시주 좀 해주십시오." 하는 서글픈 권선을 형식적으로 해보았다.

"아이고, 이 스님아, 내가 무슨 시주야?" "어찌되었든 해주어야겠소." 하고 졸라댄다.

그만두려다가도 '처음 만난 사람을 떨고서는 안 된다'는 부탁이 머릿속에 철못 박히듯 굳어져서 그저 졸라댄다.

"할 수 없다"고 하면 듣고 있다가 또 그러기를 여러 시간을 시달렸더니, 나중에는 그 노파가 "아이고, 답답해!" 하면서 어디론가 가버린다.

올까 하고 기다리니 그 편에 있는 못가로 가더니 못에 빠져버린다. "이것 큰일 났구나!" 하고 쫓아가 보니 사람은 물속에 잠겨 있는데 새파란 연기가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이게 웬일인가?" 하고 어찌할 줄 모르고 서 있으니 무지개 발같은 연기가 떠올라 북쪽으로, 북쪽으로 멀리멀리 날아가 버린다.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 이제는 화주고 뭐고 다 틀렸다. "달리자, 걷자, 정처 없이 떠나가자, 옥음아, 날 살려라!" 하고 밤티재를 넘어서 이 집 저 집 문전에서 밥을 빌며 이골 저골 얻어 먹는 동안 세월 간 줄도 잊어버리고 다닌 것이 어느새 4, 5년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서울까지 유리걸식하게 되었다.

그때 서울 왕궁에서는 왕자를 낳았으나, 나이 다섯 살이 되어도 주먹을 쥐고 펴지 못한 불구 몸인 왕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유모가 대궐문 밖으로 왕자를 모시고 거리 구경을 나왔다가 그때 마침 웬 스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왕자가 별안간 손으로 스님을 가리키며 "저 스님 바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펴버린다.

유모가 하도 이상해서 안으로 들어가 상감님께 사뢰었더니, 그 대사를 이리 오게 하라고 분부하신다. 쫓아나가 그 스님을 찾아 모시고 들어갔다.

상감이 "네 어디 사는 대사인고?" 하고 물으시매, "살인죄를 이제 당하겠구나, 지은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깨끗이 고백하여 거짓말하는 죄나 짓지 말아야겠다." 하고 "예, 소승은 구례 화엄사에 있습니다." 하고 꼭 사실대로 자초지종을 사뢰었더니, 상감님이 들으시고 무지개 연기가 배태되어 왕자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러면 빨리 화엄사로 가서 그 스님이 계시며 법당은 어찌 되었는가 보고 오라." 하신다.

그래서 화엄사로 돌아와 전후 사실을 큰 스님께 알려 드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경과 현상을 아뢰었더니 왕은 기뻐하시고 왕궁에서 거액을 시주하여 화엄사 큰 법당을 중창하시고, 숙종대왕께서 친필로 '각황전'이란 편액을 하사하셨다.

각황전 이름은 이때 생긴 이름이다.

(이 이야기는 전후 사실을 종합해 살펴보면 숙종 때에 생긴 이야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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