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외버스를 타고 용궁에 들어갔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나다
전일성 비구니스님이 살아오신 기적
1971년(신해년) 5월 9일(음력 4월 26일) 아침 8시경의 일이다.
이날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희곡리에서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삼일회사 시외버스가 청평내 발전소 저수지인 청평호(淸平湖)의 가장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져 큰 참변을 일으켰다.
버스에는 90여 명의 승객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실려 있었는데, 물속으로 다이빙하듯 빠져들어 8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버스 사고가 잦아 경향 각지에서 참사가 빈번했으나, 이처럼 운전사와 차장, 승객이 거의 몰살하다시피 한 참변은 그때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참변 속에서 남녀 약 십여 명이 겨우 구출되었으나 모두 중경상을 입었고, 그중 몸에 아무 상처 없이 살아남은 사람이 네 명 있었다.
한 사람은 39세의 비구니 전일성(全一晏) 스님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 거주하는 23세의 유도 4단 안기현(安基铉) 씨였으며, 또 한 사람은 태어난 지 70여 일 된 아기였다.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엄마 품에 안겨 있었는데, 일성 비구니 스님이 안고 나왔으나 놓쳐서 포대기에 싸인 채 물 위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을 구조원이 구출하였다.
마지막 한 사람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헤엄쳐 나오는 것을 구출한 경우였다.
과연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 할 만하다.
이 이야기는 우연히 대전시에 있는 도안사에서 전일성 스님을 직접 만나 조난 당시의 참상을 듣고 대강 정리한 것이다.
그 후 대전에서 여러 차례 만났으며, 지금도 전일성 비구니 스님은 대전에 거주하고 계신다.
전일성 비구니 스님은 전라북도 함열 출생으로, 전라남도 광주(현재 광주광역시)에 있는 신광사(新光寺)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의 노스님과 은사 스님 모두 참선을 수행하는 선객(禪客) 스님이었기에, 일성 스님도 기본적인 의식과 염불만 마치고 곧바로 선방에 들어가 십여 년간 참선 공부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 스님은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향원사(向遠寺)의 초청을 받아 부처님 오신 날인 4월 8일 성탄 봉축 기념법회를 치렀다.
그달이 부처님 오신 달이니 기념 방생을 하기로 하고 준비 차 주지 스님 대신 설악면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살인 버스를 타게 되었다.
스님은 운전기사가 앉은 뒤 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버스를 탈 때부터 초만원이라 불쾌했으나, 비좁은 데서 다시 내릴 수도 없어 그대로 타고 가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스님들은 배나 차를 탈 때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천수주문인 대비주나 반야심경을 외운다고 하는데, 일성 스님은 어려서부터 참선만 해왔기에 보행이나 차, 배를 탈 때나 언제든지 행주좌와(行住坐臥) 중에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하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날도 버스에 앉아 참선 정진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옆에서 떠들거나 차가 흔들려도 아무 관심 없이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 있었는데,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풍덩 빠져들었으나 얼떨떨하기만 했고 공포심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음력 4월 절기라 아침 나절에는 추웠기 때문에 버스의 유리창문이 닫혀 있었다.
승객들은 아우성을 치며 유리창문을 부수는 사람도 있었으나, 육지와 달리 열린 창문으로 물이 들어와 손을 쓸 새도 없이 물을 들이켜 질식해 죽은 사람이 많았다.
버스 맨 뒤칸에 서 있던 사람들은 승강구 문을 부수고 나와 생명을 건진 이가 약간 있었으나, 버스 앞칸에 포개어 서 있던 사람들은 승강구 문이 열리지 않아 운전사와 함께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성 스님은 유리창을 부수고 나오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를 안고 나와 열 길이나 되는 물속에서 솟아올랐다.
물속이 환하게 보여 용궁과 같았으며,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귀와 콧속으로 물이 조금 들어갔으나 큰 고통은 느끼지 않고 물 위로 불끈 솟아올랐다.
수면 위에 올라와 아기를 놓친 뒤에는 다시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화두를 다시 챙겨 들고 허우적거리며 헤엄칠 줄 몰라 두 팔을 벌려 물결을 잡아당기는 시늉으로 움직였더니, 마치 누군가 손목을 끌어당기듯 활 한 바탕이나 되는 거리까지 휘어져 나왔다가 구조선의 배를 만나 구출되었다고 한다.
육지에 나와 몸을 살펴보니 다친 곳은 털끝 하나 없었고, 다만 기운만 차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마치 불보살님이나 금강신장이 신통력으로 추락한 버스의 유리창을 열지 않고도 신비롭게 구해준 것만 같았다.
한편, 일성 스님은 구조원들이 병원에 가자고 권했으나, “아무 데도 다친 곳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병원에 가겠습니까?”라며 향원사 절에 통지하여 다른 승복을 갖다 달라고 일렀다.
그리고 법복으로 갈아입은 뒤 구조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수부들이 조난자의 유해를 건져내어 노변에 늘어놓았다.
마치 가을 김장철에 배추나 무를 뽑아 늘어놓은 것 같았다.
일성 스님은 이를 보고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불쌍하고 가엾은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의 애혼을 위하여 염불을 하고 경전을 외워주었다.
그렇게 하자 유가족들이 관의 통지를 받고 모여들어 통곡하며 시신을 찾아 확인하고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참상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다가 이 비통함이 흥분과 분노로 변해 회사 측 사람과 관에서 나온 이들에게 달려들어 폭행을 가하려 하고, 시신을 모시고 서울까지 간다며 데모와 난동을 벌일 때는 현장이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구나 죽은 이들의 보상금을 청구하며 소란을 피울 때에는, 죽은 이를 위한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돈에 대한 욕심만 내는 듯하여 아귀규환의 상황을 연출한 것 같았다.
그들이 자기 집에서 죽었다면 몇만 원씩 들여 장사를 지낼 텐데, 회사 측에서 사과하고 장례도 후하게 치러주며 위자료도 상당히 고려해 주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격앙하여 난동을 피우는 모습을 보니, 유가족들이 돈만 알고 망자를 잊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
사람의 마음은 경우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양심의 중심을 잃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일성 스님의 머릿속에는 그들이 떠드는 것과는 상관없이 81명의 영혼이 아우성치며 “스님은 이미 불보살님의 가피력으로 살아나셨으니, 우리 불쌍한 영혼을 법력으로 건져내어 영원히 물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중음신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온몸에 매달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스님은 책임이 크고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 “내가 여러분의 49재를 바로 이곳에서 잘 지내서 천도해 드릴 터이니 그리 아시오.”라고 다짐하고, 일구월심으로 그들 망령의 49재를 지내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때부터 탁발하여 모은 돈과 이전에 조금 저축한 것을 합쳐 당시 5만 원을 들여 버스가 물속으로 들어간 그 장소에 단을 차리고 괘불과 81명의 명단을 면사무소에 제출하여 81명의 위패를 모셨다.
또한 고승대덕 스님들도 청하여 모시고, 수백 명의 유가족과 함께 위령재 겸 49재를 지냈다고 한다.
참으로 장하신 스님이라 하겠다.
생후 70일 된 여아의 아버지는 폭행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어머니는 면회 및 아이와의 부녀 상봉을 위해 교도소를 방문하던 중 사망하였다.
아기를 돌볼 사람이 없게 되자, 일성 스님이 아버지 출소 전까지 아이를 돌보다가, 아버지가 출소한 후 아이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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