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두운 조사(杜雲祖師)의 구호와 소백산 희방사의 유래
오늘은 옛날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예천군 용문면 두인동에서 태어난 고승 두운 조사님이 계셨다.
그는 사굴산 범일국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을 배워 돌아와 소백산 도솔봉 아래에 초암을 짓고 선정을 수행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선정에 들었을 때, 무엇인가가 조사의 옷깃을 찔벅찔벅 건드려 돌아보니 큰 범이 문턱에 걸터앉아 입을 벌리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사께서
"네가 배가 고파 나를 먹으러 왔느냐?"고 묻자, 범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입만 벌리고 목구멍을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운 조사는
"아, 이놈이 목에 무언가 걸렸구나"
싶어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들여다보니, 여자의 비녀가 걸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빼내주며
"살생은 축생보를 받으니 살생하지 말라"고 타이르며 돌려보냈다.
얼마 후, 그 범이 다시 와서 옷깃을 입으로 물어당기며 '같이 가자'는 뜻을 나타냈다.
"같이 가자는 말이냐?"고 묻자 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가 보니 문밖에 이팔청춘의 묘령의 여자를 업어 놓았다.
"이놈아, 네가 나에게 은혜를 갚으려 처녀를 데려온 모양인데, 스님에게 처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에게 업혀온 이 처녀는 얼마나 십겁을 겪었겠느냐?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처녀를 방으로 데려와 주물러 주고 미음을 끓여 먹였다.
한참 후에 처녀가 깨어나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조사는
"아무 데도 아니니 걱정 말라"고 일러주었다.
처녀에게
"너는 어디 사는 사람이며 부모와 형제는 어떠냐?"고 묻자, 처녀는
"나는 경주 어느 재상의 딸로, 부모와 형제가 다 있는데 어젯밤 초저녁에 변소에 갔다 나오다가 무엇인가 휙 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지금 여기 와 있다"고 대답했다.
"허, 호는 천 리, 어는 만 리라더니, 하루 밤 사이에 육, 칠백 리를 왔구나. 그러나 기왕 이래 되었으니 여기서 며칠 조리하여 몸과 정신이 완전히 회복된 뒤에 내가 데려다주겠다."
처녀는 감사하며
"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기운이 회복된 뒤, 두운 조사는 처녀를 데리고 경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집에서는 호식했다고 하여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해 사방 산을 수일간 수색했으나 호식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풀이를 하던 중, 조사가 처녀를 데리고 들어가자 부모와 형제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한편에서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곡성이 진동하였다.
그 아버지인 재상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조사를 맞이하였다.
두운 조사는 전후 경과를 밤새 이야기하고 며칠을 쉬었다가 돌아가려 하자, 재상은
"이것이 모두 인연인가 봅니다.
산으로 갈 것 없이 여기서 부귀를 함께 누리시지요."라며 진심으로 만류하였다.
그러나 조사는
"부귀영화는 나에게 소용없으니, 굳이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내가 머무는 토굴이 협소하니 그것이나 좀 넓혀 달라"고 부탁하였다.
재상은 쾌히 승낙하고 부근 각 읍 수령에게 통지하여 상납할 돈을 인용해 크게 절을 짓고 이름을 희방사라 하였다.
동하에 다니는 교량은 무쇠로 놓았는데, 지금도 수철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순흥과 풍기의 중앙에 있는 유천은 희방사로 곡물을 운반하는 유로라 하여 놋쇠로 다리를 놓았는데, 지금도 유다리라 불린다.
만고에 무섭다고 하는 맹수 호랑이도 몸을 구해준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다.
뜻밖에도 희방사가 창건되어 대가람 불도량을 이루는 공덕을 세웠다.
이것이 희방사의 창건 유래이다.
(희방사 사적기와 불교지 1, 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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