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깨달음
오늘은 조금 색다르게 깨달음과 해탈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한다.
깨달음의 범위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대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넓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결국 '바로 안다'는 것에 불과하다.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에 따라 세계관과 인생관이 완전히 달라지며, 금생뿐만 아니라 미래세까지도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깨친 사람과 깨치지 못한 사람은 관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인들은 수도자를 보고 '무슨 재미로 산중에서 고행을 하고 있을까?' 하고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관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세속적이고 우물 안 개구리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마음을 깨쳐야만 모든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깨닫는다'는 말은 곧 '진리'라는 뜻이며, 특히 불교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해석이 너무 구구하여 많은 차이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수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출가하여 해탈하겠다고 출가한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그르쳐 놓는 중대한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부처님을 정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큰 스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탁!' 하고 깨치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며, 그 정도에 따라 보살도 되고 부처도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산승이 보는 깨달음의 견해는 그와 좀 달라서, 아무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신통이 자재하다 하더라도 깨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바로 아는 것'에 불과할 뿐, 깨침 자체가 바로 해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안다고 해서 욕심과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를 보면 깨쳤다는 몇몇 도인들도 종정을 하겠다는 것조차 욕망이고 번뇌이며, 죽음이 두려워 생명 안전을 위해 치안 공무원인 경찰에게 보호를 청탁하는 것이 어찌 해탈이겠는가?
해탈의 경지는 욕심과 번뇌를 제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욕심과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해탈의 경지인 것으로 산승은 보고 있다.
보조국사의 『수심결』에도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닦아서 증득하게 된다고 하였으며, 신통과 변화는 깨달음 이후에 닦아 감으로써 얻어진 것으로, 점차 훈습하여 나타난 것이지 깨달음이 즉시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규봉 선사께서도
"먼저 깨닫고(이는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확철대오한 돈오의 경계가 아닌 혜오의 경계인 것 같다) 나서 닦는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비유를 들어
"얼음 못이 모두 물인 줄은 알지만 햇볕을 쬐어야만 녹아 물이 되듯이, 범부가 곧 부처임을 깨달아도 법력에 의해서만 이를 훈습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상근기는 즉시 깨치고, 중근기는 삼일 만에 깨치며, 하근기도 석 달이면 깨친다고 하셨다.
깨치는 것이 세수하다 코를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는데, 만약 깨침이 곧 해탈이라면 왜 그토록 도인이 드문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이다.
또한 옛날 재송 도인(載松道人)은 확철대오를 하고 오신통이 자유자재하여 천안통으로 내다보니 자기 공부가 바른 해탈법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사조 도신대사(四祖 道信大師)를 찾아가 바른 해탈법을 물으니, 노인은 불수요, 파거는 불행이라 하셨다.
도신대사께서는 몸을 바꾸어 오라고 하시며, 이곳에 온 기념으로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두고 가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재송 도인은 그 길로 돌아 나오다가 일주문 밖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5년 후에 다시 보자"고 말한 뒤, 육신은 물에 버리고 그 영혼은 빨래하는 처녀의 몸에 들어가 무임시태로 태어났다.
5년 후 다시 출가하여 사조 도신대사가 계시는 절을 찾아가던 중, 전생에 자신이 심어놓은 소나무를 보고 또 한 번 대오하여 전생의 일을 알게 되었다.
이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삼삼백발하청산(鬖鬖白髮下靑山) 팔십년전환구안(八十年前換舊顔) 인각소년송자생(人却少年松自生) 시지종차격인간(始知從此格人間)
삼삼한 백발로 청산을 내려가 팔십년전 옛 얼굴을 바꾸어 오니 사람은 도리어 소년이 되고 소나무는 그동안 저절로 자랐네. 이것을 보니 비로소 인간으로 환생했음을 알겠구나.
이와 같이 크게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조 도신대사를 찾아가 법을 듣고 닦은 후에 견성하여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가 된 것을 보면, 깨침 자체가 견성도 아니며 해탈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요즘 말하는 초견성이나 견성은 모두 혜오에 불과하다.
참된 견성과 해탈은 확철대오(廓徹大悟)한 돈오(頓悟)의 경지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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