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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사음에 대하여

 

 

사음은 재가 불자에게 셋째로 엄격히 금지된 계율(戒律)로, 부부 이외의 이성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부부가 한 번 탈선하기 시작하면 이를 막기 어렵다.
또한 사음은 불행의 씨앗이자 파멸의 문이다.
그러므로 사음으로 인해 네 가지 허물이 발생한다.

첫째, 부덕을 초래하며
둘째, 마음이 편하지 않고
셋째, 비난을 받으며
넷째, 지옥에 떨어진다.

사욕은 욕심에서 비롯되며, '남의 밥에 콩이 굵어 보인다'는 속담과 같다.
냉철하게 판단해 보면 별것 아닌데도 남의 것을 탐내는 욕심 때문에 훔쳐 먹는 떡이 더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탐욕은 아편과 같이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길들여지면 헤어나지 못하고,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한 예로, 이씨 조선 말기 강원도 회양군의 어느 마을에 윤씨 형제가 함께 급제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당파 싸움만 일삼고 정치는 날로 부패해 가는 판국이었다.
본래 고결한 성품을 지닌 윤씨 형제는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회양 고을 두메산골로 돌아가 초야에 묻혀 전원생활을 하였다.

동생 윤씨의 부인은 당대에 보기 드문 절세가인으로, 수분을 머금은 꽃처럼 희고 윤기 나는 피부와 호수처럼 맑은 눈, 그리고 도톰하고 촉촉한 장밋빛 입술에 애교 어린 미소를 살짝 머금은 자태는 보는 이의 넋을 잃게 할 만큼 뛰어난 미인이었을 뿐 아니라 글씨와 문장에도 능하였다.
윤씨 역시 훤칠한 미남으로, 누가 보아도 천생연분이라 할 만한 윤씨 부부는 때로는 김을 매고, 때로는 시를 주고받으며 조용한 세월을 지키고 오순도순 금슬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평양 감사의 아들이 호화로운 행장을 차리고 금강산 구경을 가는 길에 마침 그곳을 지나다가 윤씨 부인이 개울에서 삼을 헹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평양 감사의 아들은 말을 멈추고 서서 한참이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곳을 떠나려 했으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 그늘에 말을 매고 앉아 정신없이 부인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삼을 다 헹군 부인이 삼 그릇을 들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돌아갔다.
알맞은 몸매에 동정깃 위로 야릇하게 드러난 희고 깨끗한 목덜미와 유연한 자태는 마치 연기가 피어오르듯 어느 초가집 안으로 사라졌는데, 감사 아들의 젊은 간장을 녹여 주었다.

그 부인이 들어간 집을 한참 바라보던 감사 아들은 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석양이 너울너울할 무렵 그 부인이 들어간 집 문 앞에 이르러 주인을 찾았다.
이목이 수려한 젊은 선비가 나왔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가자고 청하니 집 주인은 흔쾌히 맞아들여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저녁을 먹고 나서 주인은 손님에게
"이거 참 죄송합니다만, 혼자 쉬셔야겠습니다.
오늘 밤에 제사가 있어 큰댁에 다녀와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윤씨는 이웃 마을에 있는 큰댁으로 갔다.

감사 아들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으며, 절호의 기회였다.
너댓 집 되는 초가가 어둠 속으로 잠겨들자 밤은 무덤처럼 고요했다.
묘안을 짜내기 위해 골치를 앓던 감사 아들은 문짝도 없이 포장 한 겹 드리워진 아랫방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한 번 놀랐다.
놀랄 만큼 하얀 허벅지를 살짝 드러내고 삼을 삼고 있는 부인은 옆에 펴놓은 『논어』 책을 보아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어엿한 품위와 고고한 인품을 보니 도저히 어떤 폭력도 행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감사 아들은 생각다 못해 편지를 몇 자 써서 아랫방에 던졌다.

소군옥골(召君玉骨)도, 호산토(湖山土)요,
귀비화용(貴妃花容)도, 마외진(馬隈塵)이라.
인생이 본래 무정물임을 알지니,
막석금야일허신(莫惜今夜一許身)하소서.

뜻을 번역하면
왕소군의 옥 같은 화용은 호산의 흙밥이요.
양귀비의 꽃 같은 얼굴도 마외역의 티끌일세.
인생은 본래 무정물이 아니니
오늘 밤에는 몸을 한 번 허락하는 것을 아끼지 마소서
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것을 읽은 부인은 붓을 들고 그 종이 뒤에 답을 써서 윗방에 던졌다.
일천간장 다 조이며 목이 마르도록 반응을 기다리던 감사 아들은 얼른 편지를 주워 읽어보니

첩재산중(妾在山中)하여 무위아신(無爲我身)터니
천만의외(千萬意外)에 화간(華簡)이 낙내운간(落來雲間)이나
연(然)이나 군(君)도 유부지군(有婦之君)이요, 첩(妾)도 유부자첩(有夫之妾)이라
막설비례(莫說非禮)하시고 속속귀정(速速歸定)하소서

뜻으로 번역하면.
첩이 산중에 있어 이 몸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더니,
천만 뜻밖에도 빛나는 편지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 같으나
그러나 당신도 부인이 있는 분이요, 첩도 남편이 있는 여자라,
예의가 아닌 말씀은 하지 마시고 속속히 마음 돌리소서.

이와 같은 글을 본 감사 아들은 땅이 꺼져라 하고 긴 한숨을 내쉬고 힘없이 피식 드러누워 목침을 베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일각일각 밤은 깊어만 갔다.
시간은 감사 아들의 초조한 생각을 아랑곳 하지 않고 흘러서 윤 씨가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간밤을 뜬눈으로 새운 감사 아들은 아침 밥을 입에 떠 넣으니 왕모래 같이 까끌까끌하여 넘어가지 않았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서 금강산 구경도 포기하고 평양으로 되돌아간 감사 아들은 그만 상사병에 걸려 급기야 몸져눕게 되었다.
별별 약을 다 써도 효험이 없었고, 마침내 사경에 이르렀다.
그쯤 되자 할 수 없이 부모에게 사실을 알렸다.
외아들의 병의 원인을 알게 된 평양감사는
"야, 이놈아! 진작 이야기할 일이었지. 내가 평양감사로서 그까짓 촌놈의 계집 하나쯤 가지고 너의 소원을 못 들어 줄 줄 알았더냐?"
하고 나무란 뒤, 날랜 포교 4, 5명을 불러 불문곡직하고 속히 데려오라는 감사의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감사의 명을 받은 포교들은 질풍같이 윤 씨 집에 들이닥쳐 덮어놓고 윤 씨의 부인을 끌어내어 동여서 말에 태웠다.
부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유를 잃고 포교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것을 제지하려던 윤 씨는 억센 포교들에게 육모방망이로 매를 맞고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한편 부인은 소리개에게 병아리 채여 가는 것처럼 자유 없는 몸으로 매를 맞으며 쓰러진 남편을 바라보고 샘솟는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한 발 한 발 멀어져 가는 정든 보금자리를 뒤로 남겨두고 산구비를 돌아가며 바라보니, 꿈같은 세월이 아롱진 정든 초가집이 멀어져만 갔다.
나무 끝에 스스린 단풍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길게 한숨을 쉰 부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시는 이 길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시야에서 아물아물 멀어져 가는 정든 산천을 몇 번이고 되돌아보며 그럭저럭 포교들에게 끌려 대동강 나루에 이르렀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평양 부중에는 무심한 저녁 연기가 바람을 타고 피어오르고, 뱃전에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 위에 연보랏빛 저녁노을의 고운 낙조가 어우러진 수면과 함께 그리운 남편과 정든 보금자리의 전경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부각되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숨을 길게 내쉰 부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길게 읊었다.

읍고대동강수록(泣顧大同江水綠)하니
위여상설절여산(威如霜雪節如山)한데
불거위난거역난(不去爲難去亦難)하니
일신투처일심한(一身投處一心閑)이라

※ 울면서 대동강 푸른 물을 돌아 보니
감사의 위엄은 서릿발 같고 나의 절개는 산과 같은데
가지 않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으니
이 한 몸 던지면 마음은 한가하리.

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읊음이 끝나자
윤 씨 부인은 강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강이라고 방심한 포교들은 술을 부어 놓고 권커니 잣커니 하며 희희낙락하다가 이 뜻밖의 일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옷을 벗고 어물거리는 사이에 부인은 물살에 떠내려가서 찾지 못했고, 할 수 없이 돌아가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감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펄펄 뛰며 호령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감사의 아들은 윤 씨 부인을 데려오기만을 고대하던 중 이 소식을 듣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사랑하던 아내를 빼앗기고 매를 맞은 윤 씨는 너무 억울하여 그 길로 한양에 올라가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윤 씨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던 임금은 그를 암행어사로 임명했다.
윤 씨는 곧바로 평양으로 직행하여 모든 비위를 샅샅이 들추어 감사는 파직시키고 공무를 마쳤다.
이후 윤 씨는 여러 날에 걸쳐서라도 시신이라도 찾겠다며 대동강을 샅샅이 뒤지기 위해 사공들을 모아놓고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중 늙은 사공이 한 달 전에 저녁 놀을 때 그물을 치고 있었는데, 무엇인가 그물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그물을 끌어올리니 방금 빠진 듯한 젊은 여인을 건져냈다.
집으로 데려가 주무르고 간호하니 여인은 살아나 회복하였고, 집으로 데려다주려고 집에서 치료하고 있었다고 한다.
함께 가보니 꿈속에도 잊지 못하던 부인이었다고 한다.
윤 씨는 부인을 그렇게 다시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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