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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보시(布施)와 이타(利他)

 

 

보시에는 법보시와 재보시가 있다. 법보시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으로 법을 설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재보시는 명예나 이익,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자비심에서 남에게 주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 돈을 베풀면서 '그가 우리 일을 도와줄 것이다'라는 계산이 있다면, 이는 보시가 아니다. 자기 생각에 어긋나면 원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어느 때 어떻게 했는데, 너는 그 은혜도 모른다'고 나무라면, 그때까지의 감사한 마음은 사라지고 원망심이 생기게 된다. 천하를 덮을 큰 공을 자랑하면 그 덕을 잃어버린다. 자기 명예를 위해 남에게 주는 것은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이기 때문에 별로 복이 되지 않고, 명예를 얻는 대신 오히려 상실된다. 이와는 달리 순전히 남을 위하여 하는 보시는 한량없는 복으로 돌아온다.

비유하자면, 한 알의 밀알이 썩어 많은 열매를 맺고, 한 줌의 소금이 녹아 많은 부패를 막는 것과 같다. 남을 위하여 자신의 괴로움을 참으면 모든 행복이 찾아오고, 자기를 위하여 남을 괴롭히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남에게 봉사하면 봉사자에게 복이 되지만, 자기에게 봉사하면 할수록 고통을 안겨 준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사람들은 전생에 이타를 행한 사람들이며,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자는 전생에 이기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치는 것은 곧 자결하는 방법이고, 남을 위하여 내가 해 보는 것은 곧 복을 저축하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조선 시대 홍역관이 중국에 갔다가 '천금에 몸을 판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가 보니 꽃 같은 처녀가 나왔다. 그 처녀에게 몸을 팔려는 이유를 물었더니, 처녀는 "아버지는 청렴한 관리였으나 세상을 떠나자 장사 지낼 돈이 없어 할 수 없이 몸을 팔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 한다"고 말했다. 그 처녀의 효성에 감동한 홍역관은 선뜻 천금을 무상 보시하고 돌아왔다. 그 후 설 소저는 재상의 아내가 되었고, 설 소저의 남편인 적재상이 병부 상서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중국에 청병을 요청했을 때, 설 소저의 간곡한 애원과 적재상의 적극적 주선 덕분에 청병을 얻어 국가의 위기를 모면했다. 설 소저가 손수 짠 보은단 삼백 필을 홍역관에게 전했는데, 보은단이란 '갚을 보(報)'자와 '은혜 은(恩)'자, '붉은 단(丹)'자를 수놓아 만든 비단이다. 홍역관의 무상 보시는 크게는 한 국가를 구하는 헤아릴 수 없는 복으로 돌아왔고, 작게는 개인의 영달을 가져왔다.

이와 비슷한 예는 독립운동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이 공익을 위해 받은 고통은 해방 후 대부분 고위직을 맡았고 국민의 존경을 받아 지금도 보상을 받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함은 곧 자기를 위함이며, 강도나 소매치기의 말로를 보건대 남을 해치는 것은 곧 자기를 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 공덕은 복의 뿌리이다. 그 뿌리가 깊지 않으면 어찌 복의 가지가 무성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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