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강원도 청평사(淸平寺)의 연기
청평사는 강원도 춘천시에 위치한 사찰로, 원래 춘천군이었으나 1995년 시·군 통합으로 춘천시가 되었다. 청평사는 삼한고찰 중 하나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쳤으나, 오랜 세월과 풍우로 인해 다시 중건하지 않으면 곧 퇴락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산중 스님들은 절을 중창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인 가사불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수십 명의 화주승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절의 곡간에 자금을 모으기로 하였다.
그 결과 80여 벌의 가사가 제작되었다. 각지의 뛰어난 장인 스님들이 모여 백여 명의 대중이 엄숙한 규율을 지키며 불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원나라 공주가 거지 복장을 하고 청평사에 들어와 가사를 만지고 10여 땀의 바느질을 한 공덕으로, 몸에 붙어 있던 고질적인 상사뱀이 완전히 떨어져 큰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후 공주는 이 사실을 고려 왕조에 알리고 원나라에 전하여 청평사를 단독으로 중건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옛날 원나라의 어느 황제의 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나라 공주 중에 천하절색의 미모를 지닌 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꽃처럼 아름다운 인물로 많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나라에서 정한 부마가 아니면 남자가 공주에게 접근할 수 없었기에, 많은 이들이 공주를 짝사랑하다가 결국 포기하곤 했다.
그런데 궁중에서 공주를 모시며 하인처럼 섬기던 젊은 별감 하나가 공주를 보고 사랑에 빠져 혼자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의 원혼은 상사뱀으로 변해 공주에게 달라붙어 밤낮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공주는 이를 몹시 싫어하며 부왕과 모후에게 알렸고,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시켜 상사뱀을 떼어내 멀리 내쫓고 죽였으나, 금세 다시 생겨 붙어 있었다. 이는 정말 불치의 고질병과도 같았다.
그래서 공주는 나이가 차도 부마를 맞아 결혼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 사실이 궁중에 알려져 궁녀들 사이에 퍼지면 궁중의 불명예가 될 터였다.
공주는 자신이 죽은 셈 치고 궁중을 나가 천하강산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죽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어머니인 황후에게만 말씀드리고 궁중을 나왔다. 모후인 황후도 불쌍하고 측은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눈물을 삼키며 그녀의 뜻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궁중을 나간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더욱 고생할 터라, 값진 패물 여러 가지를 싸서 허름한 보자기에 넣고 나왔다. 만승천자의 금지옥엽인 공주가 하루아침에 거지 아가씨가 된 셈이었다.
공주는 정처 없이 떠돌며 밥을 얻어먹고 천하의 명산을 찾아 절간에서 신세를 지으며 기도와 염불로 세월을 보냈다. 참으로 처량한 신세였다.
여자는 너무 못생겨도 안 되지만, 너무 아름다워도 팔자가 망칠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공주가 이렇게 종적을 감추고 다니자 며느리가 되라며 붙드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못된 남자는 호젓한 곳에서 강제로 공주를 욕보이려 했으나, 공주의 몸에 붙은 상사뱀을 보고 기절초풍해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공주는 중국의 명산승지를 다 돌아본 뒤, 고려의 금강산이 천하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구경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고려국에 들어왔다. 영동 해안에 내려 인제 설악산과 평창 오대산을 구경한 후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어찌하여 춘천 땅에 이르게 되었다. 춘천에서 청평사가 고찰로 좋다는 말을 듣고 청평사를 향해 가다가 청평사 동구 개천에 이르렀다.
그때 상사뱀이 사람의 말로 말하기를,
"나는 이 절에 들어갈 수 없으니 이 절에는 들어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공주는
"내가 여기까지 와서 절 구경도 않고 갈 수 있겠느냐? 네가 들어가기 싫다면 깨끗한 반석에 떨어져 놀며 기다려라. 내가 잠깐 가서 보고 돌아오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상사뱀은 사르르 풀려 반석으로 가서 둥지를 틀었다.
공주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공주가 절에 들어가자, 가사를 만들던 양공 스님들이 점심공양 시간이 되어 가사를 깁다가 벌려 놓은 채 두고 식당 큰방으로 다 들어가고 가사당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공주가 들어가서 보니 붉은 비단 천을 조각조각 잘라 조각보 같은 보자기를 만드는데 흥미가 있어 보였다.
이러한 가사는 중국 절에서도 보고 한국 절에서도 보았지만 만드는 것은 이 절에 와서 처음 보았다. 그래서 공주는 쪼그리고 앉아 깁다가 둔 가사에 꽂힌 바늘을 빼어 들고 손으로 멋지게 박아 내려갔다. 퍽 재미가 있었다. 이러는 찰나에 스님들이 나와 보고 꾸짖었다.
"웬 거지 여자가 남의 가사당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그 더러운 손으로 신성한 가사 조각을 함부로 만지는 거냐? 그리고 통문불 구멍도 모르고 막 박아 버렸으니 이 가사 한 바탕은 버렸구나, 버렸어!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일이 다 생겼단 말야. 그러니 나만 며칠을 헛고생한 것이 아니냐, 이년아 나가라, 망할 년 같으니! 남의 새 가사를 망쳐 놓았으니 이것을 어찌한단 말이냐."
"잘못하였습니다. 나가라면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내 바느질이 스님 것보다는 나을 터인데 그러는 구려."
"이년아, 바느질만 잘하면 되는 줄 아느냐? 법대로 해야지."
"제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왜 남의 것을 만졌느냐 말이야? 어서 나가거라. 안 나가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고 소리쳤다.
이때 뇌성벽력과 함께 벼락 치는 소리가 났다. 스님들과 공주 모두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졌다. 소낙비가 두세 번 퍼붓더니 날이 개었다. 공주는 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꾸중만 당한 채 동구 개천으로 나왔는데, 상사뱀이 있는 곳을 가서 보니 벼락을 맞아 재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자기 몸에 붙은 것이 없었다.
공주는 어찌나 기쁜지 울음이 터져 나왔다. 공주가 가사를 박은 공덕으로 상사뱀이 벼락을 맞고 죽어 완전히 떨어져 간 것이다. 공주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다시 청평사로 올라가 말하되, 심부름이라도 하고 반찬을 만들고 공양주라도 하겠다고 애걸하며 사정을 했다. 그러나 대중 스님들은 절에는 여자가 필요 없다며 나가라고만 독촉했다. 그러나 공주는 억지로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대중 회의가 벌어지더니, 이 대웅전 법당을 중창하려면 화주를 여러 사람 내야겠다는 회의였다. 공주가 일어나 말하되,
"여러 스님께 말씀드리겠나이다. 이 절 법당은 제가 단독 화주로 지어드릴 터이니 그리 아십시오."
하였다.
대중 스님들이 아주 실색하며 놀라, 한 스님이 말하되,
"거지 여자가 무슨 재주로 그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그러자 공주가 말하되,
"두말 말고 먹과 벼루와 붓만 가지고 오라."
하였다.
그래서 필기도구를 갖추어 주었더니 공주는 춘천현감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달라고 했다.
한편 원나라에서는 공주가 몰래 나가 거지로 다녀도 사람을 따라 보내 멀리서 감시하고 있었는데, 고려국으로 들어간 뒤에는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원나라 황제가 고려국 왕에게 알아봐 달라고 하여 공주의 행방을 탐지하도록 각 도 각 현에 알렸다. 춘천현감이 공주의 편지를 받고 행방을 알게 되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현감이 공주의 의복을 새로 지어 청평사로 가서 공주를 찾으니 절 안이 떠들썩했다.
공주는 서울로 가서 고려국 왕을 뵙고 청평사 법당을 지어주면 내가 원나라에 돌아가 부모에게 여쭈어 외상으로 지은 돈을 보내 드리겠다고 하여 청평사의 법당은 순조롭게 중창되었다. 그리고 공주가 원나라로 돌아가 부모에게 아뢰되, 고려 청평사 가사불사에 참여하고 상사뱀을 완전히 떼어버렸는데, 이것은 오직 부처님의 공덕이요 가사불사의 공덕이라고 칭찬하였다.
지금은 6·25 동란 때에 타버려 없지만, 청평사 법당은 타기 전까지도 비단으로 기둥을 싸고 옻칠까지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다시 중창되어 사찰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가사불사 공덕이 장하여 공주가 가사를 만진 공덕으로 상사뱀이 하늘의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이며, 이는 전설이 아니라 청평사 사적기에 기록된 사실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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